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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01:04:42

리버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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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
이름리버라치
Liberace
분야음악&텔레비젼
입성날짜1960년 2월 4일
위치6500 Hollywood Boulevard&6700 Hollywood Boulevard.[1]}}} }}}
<colbgcolor=#000><colcolor=#fff> 리버라치
Liberace
파일:fineartamerica_com_20170405_214548.jpg
본명 브와지오 발렌티노 리버라치
Władziu Valentino Liberace
출생 1919년 5월 16일
위스콘신 웨스트밀워키
사망 1987년 2월 4일 (향년 67세)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묘소 할리우드힐스 포리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데뷔 1933년 시카고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직업 피아니스트, 엔터테이너, 가수, 배우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평가5. 기타6. 그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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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gannett-cdn.com/1369531587000-TDS-Liberace-CP-robe-1305252127_4_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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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ww_google_co_uk_20170216_224647.jpg
1979년 Muppet Show에 출연한 리버라치.은갈치 패션의 원조

1919년에 위스콘신 주 웨스트밀워키에서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피아니스트, 가수, 배우이다. 미국 내에서는 화려한 의상과 연출 등의 쇼맨십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별명은 '미스터 쇼맨십'.

2. 생애

리버라치는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나 1930년 이후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하고 대중 음악 분야로 돌아섰다. 그리고 클럽 등지에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융합한 연주를 하여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그는 1950년대에 TV 쇼에 출연하였고, 그 이후 미국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백악관에서도 초청장이 날아와 그는 당시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연주실력을 뽐내었다.

그 후 영국의 방송에서도 출연하면서 세계적 스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점점 더 화려하고 개성적인 의상과 연출을 고집하기 시작하였다. 화려함에만 집착한다고 정통 클래식 음악 종사자들은 리버라치를 좋게 보지 않았으나 대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화려한 의상과 연출 등이 각광을 받았던 당시의 코드에 부합했던 리버라치는 화려함을 고집했어도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한편 70년대에 언론이 그를 동성애자라고 보도했는데 리버라치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그런 보도를 한 언론사들을 고소하였다. 그러나 1982년에 전 운전기사이자 연인이었던 스콧 토슨이 [3] 리버라치에게 과거 연인 시절의 교제에 대한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결국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고야 말았다.

보통은 점점 잊혀질 법한데다 아웃팅까지 당한 말년에도 도저히 그의 인기는 사그러들 줄 몰랐다. SNL이나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했으며 1985년에 개최된 레슬매니아 1에도 깜짝 출연하는 등 여전히 메인 이벤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쯤 그는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고 계속 앓다가 1987년 2월 4일에 사망하였다. 처음 의료진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했지만, 몇 주 뒤 에이즈에서 기인한 죽음이었다고 정정되었다.

3. 가족 관계

이탈리아계 이민자 아버지와 폴란드계 이민자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매로 형 조지 리버라치와 누나 안젤리나 리버라치, 동생 루디 리버라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프렌치호른 주자였고 같은 악단의 바순주자와 바람이 나 브와지오를 비롯한 그의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4] 그의 형은 바이올리스트였다 그리고 그의 동생은 배우로 활동했으며 그는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그는 항상 그의 가족들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팔아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평생을 불평하며 살았다고 한다.콩가루 집안

4. 평가

화려한 무대와 현란한 쇼맨쉽으로 청중을 사로 잡았으며 후대에 엔터테이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5][6]

40~50년대 까지는 깔끔한 턱시도차림이었지만, 60년대 이후부터는 반짝이 의상 같은 화려한 의상[7] 을 주로 입었다. 스튜디오에는 아크릴 피아노를 세트해놓기도 하였고, 그 위에 올려놓은 고풍스러운 촛대는 그의 트레이드마크. 연주시에는 자주 쓰는 종횡무진 긴 스케일과 함께 보여주는 큰 손짓이 특징이다. 또한 카메라를 응시하며 카메라 너머의 청중에게 눈빛을 건네는데, 이는 프로그램 촬영때 역사상 최초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촬영한 사람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보며 청중에게 윙크를 날리기도 하는데, 그와 관련된 노래 까지 나왔을 정도. [8]. 한마디로 요약하면, 리버라치는 그 누구보다 쇼를 위해 태어난 피아니스트라고 평가내릴 수 있겠다.

5. 기타

여담으로 기네스북에 세상에서 피아노 연주비를 가장 많이 받은 피아니스트로 올라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1953년 26주간 세션활동으로 2백만불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2백만불을 오늘날 가치로 따지면 대략 1800만불...한국돈으로 200억원에 육박한다.[9]

그는 생전 피아노를 많이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였는데 32개의 피아노중 18개는 골동품으로써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10] 그리고 그는 집을 여러채 소유했는데 그중에는 방이 32개나 있는 호텔도 있었다.

그의 인생은 1963년 케네디대통령 암살 전후로 180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당시에 리버라치는 그의 매니저때문에 쉬지도 않고 공연해서 생긴 피로와[11]그의 옷을 세탁하는데 필요한 사염화 탄소중독으로 인하여 온 내장에 물이 차오르는 이상한(?) 병에 걸리게 된다. 의사들도 가망없다 하며 다가오는 임종을 기다릴 때 흰색 수녀복을 입은 수녀가 다 집어치우고 기도만 하라고 해서 기도만 했다고 한다. 그러니 다음날 그의 몸은 건강을 되찾게되고 그는 흰색옷을 입은 수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의사들에게 말하자 의사들은 이 근처에는 흰색옷을 입은 수녀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건강이 최고고 신은 존재한다는 것은 몸소 체험했다고 한다.

다소 뜬금없게도 힙합과도 연관이 있는데, 후술한 1969년 Liberace쇼에서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기 전에 말한 "and now for my next number i'd like to return to the classics" 라는 문장은 De La Soul의 Plug Tunin'에서 샘플링 된 이후로, 다이나믹 듀오의 이력서 및 DJ Premier의 Classic (Better Than I've Ever Been DJ Premier Remix) 등등 여러 곡에서 샘플링되어 힙합 팬들에게 익숙한 구절이다.

도널드 트럼프와도 친분이 있었다.
파일:www_google_co_uk_20180114_135530.jpg[12]

독실한 천주교도로 교황 앞에서 연주한 것을 자기 최고의 콘서트로 꼽았다.

리버라치의 생은 스티븐 소더버그쇼를 사랑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했다. 이때 리버라치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맡았다.

6. 그의 연주


1969년 Liberace 쇼에서 연주된 Boogie Woogie


1969년 Liberace 쇼에서 연주된 Chopsticks


영화 써니OST


영화 오즈의 마법사OST


러브 스토리 OST


1972년 The Royal Variety Performance에 초청받은 리버라치


리버라치의 마지막 무대 Christmas medley


[1] 첫번째에 있는 위치가 음악 분야이고 두번째가 텔레비전 분야이다.[2] 위 사진의 피아노가 밑에서 서술할 쇼팽시대에 만들어진 피아노이다.[3] 참고로 이 사람은 사생활과 인성이 개막장이기로 유명하다. 온갖 거짓 루머를 퍼트리고 돌아다니는데다 밥먹듯이 감옥을 들락날락거렸다. 쇼를 사랑한 남자가 개봉한 이후로도 또 체포되었고 2022년 9월 풀러날 예정이라고.[4] 오죽하면 브와지오 본인도 자신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준게 이름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5] 마돈나 레이디 가가 등등[6] 그가 무대에 끼친 영향은 그가 데뷔하기 전후가 명확히 구분될 정도로 엄청났다.[7] 이 화려한 의상도 1969년에 자켓만 1500달러나 할 정도로 가격이 어마어마 했다. 심지어 제일 비싼 옷에는 다이아몬드 단추를 달기도 했다.[8] "When Liberace Winks At Me"[9] 이때 리버라치가 데뷔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이다. 그러면 그의 전성기인 6~70년대에 그의 수익은 상상을 초월 할 것이다.[10] 그중 몇개는 쇼팽시대에 만들어졌던 피아노들로 가치가 어마어마 하다.[11] 케네디 대통령 암살로 미국이 뒤집힌 와중에도 공연일정이 있었다 한다.[12] 트럼프 타워에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