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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5 20:34:15

리처드 마셜

성명 리처드 마셜
Richard Marshal
생몰년도 1191년경 ~ 1234년 4월 16일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사망지 아일랜드 영지 킬케니 성
아버지 윌리엄 마셜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
형제 윌리엄, 마틸다, 길버트, 월터, 안셀, 이사벨라, 시빌라, 에바, 조안
배우자 게르베시아 드 디낭
직위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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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윌리엄 마셜의 차남이다.

2. 생애

1191년경 노르망디 공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기사로 칭송받은 윌리엄 마셜이고, 어머니 이사벨라 드 클레어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딸이자 제4대 펨브로크 여백작이다. 1208년, 존 왕윌리엄 마셜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의 장남 윌리엄 2세 마셜에 이어 리처드까지 인질로 잡기로 했다. 이후 1212년까지 인질로 붙들려 있다가 풀려났고, 존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14년 존 왕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했다가 도중에 중병에 걸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16년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에 건너간 것으로 보이며, 1219년 5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궁정에 전해졌을 때 리처드도 그곳에 있었다. 1220년 3월 어머니가 사망한 후, 리처드는 롱그빌과 오르베크를 중심으로 한 이사벨라의 노르망디 영지를 물려받았다. 또한 버킹엄셔의 롱 크래던 마을과 영지 역시 상속받았다. 1220년 6월, 리처드는 형 윌리엄과 함께 멜룬에서 필리프 2세를 만나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들이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에게도 충성을 맹세하는 걸 양해해 달라고 요청해 승인받았다. 1222년 디낭 남작 알란 디낭의 딸이자 햄프셔의 링우드와 노팅엄셔의 버튼 라티머의 상속녀인 게르베시아 드 디낭과 결혼했다.

1231년 형 윌리엄이 급사한 뒤 형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 해 7월 25일 런던으로 향한 리처드는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잉글랜드 왕실 마셜 직위를 인정받았다. 1232년 7월 29일, 헨리 3세는 잉글랜드의 실권자였던 휴버트 드 버그가 잉글랜드 내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공모했다는 고발을 받자 휴버트를 대법원장에서 해임하고 스티븐 세그레이브를 새 대법원장으로 세웠다. 이후 윈체스터 주교이자 왕실 재무관 피에르 데 로슈는 리처드 마셜과 함께 용병 부대를 구축한 뒤 휴버트를 완전히 몰아낼 기회를 엿보았다.

1232년 말, 휴버트는 반역을 꾸민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뒤 데비지스 성에 투옥되었다. 뒤따른 숙청 과정에서 휴버트의 지지자들은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피에르의 추종자들이 빈 자리를 채웠다. 또한 1233년 초에는 친척 피에르 드 리보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헨리 3세는 피에르의 조언에 따라 휴버트에게 토지와 지위의 영구 소유를 보장하는 여러 헌장을 취소했다. 그러나 숙청을 자행하는 와중에 피에르의 동맹자였던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마셜의 가까운 동료인 길버트 바셋이 해임되자, 리처드 마셜은 불만을 품었다.

1233년 봄, 피에르 데 로슈의 외국인 추종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드 몰리가 길버트 바셋에게 넘어간 영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바셋이 이를 거부하자, 피에르 데 로슈가 주도하는 잉글랜드 정부는 그를 반역자로 몰았고, 바셋은 웨일즈 남부 변경으로 도망쳐서 리처드 마셜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리처드 마셜은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웨일스 국경지대에서 웨일스 영주 레드너를 몰아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웨일스 대공과 휴전 중이었는데, 두 사람이 왕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웨일스인들과 전쟁을 벌였기에 정부의 분노를 샀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에 대응해 리처드 마셜의 가신들에게 수여되었던 어폰 영지를 회수한 뒤 피에르 드 몰리에게 넘겼다. 이에 리처드 마셜 측은 분개했고, 콘월의 리처드도 이에 동조해 반란 계획에 참여했다. 1233년 8월 중순, 리처드 마셜은 자신과 협상하기 위해 글로스터로 찾아오려는 헨리 3세의 방문을 거부했다. 그 후 리처드 마셜의 사촌인 세인트 데이비즈 주교가 헨리 3세를 찾아가서 영주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리처드 마셜은 정말로 내전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했고, 헨리 3세와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9월 말에 길버트 바셋과 리처드 시워드가 잉글랜드 전역에서 습격전을 감행했고, 한때 런던을 위협하기도 했다.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본 리처드 마셜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우선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와 동맹을 맺은 뒤, 1233년 10월 중순 허웰린의 지원을 받아 사우스 웨일스를 휩쓸고 우스크, 에버게브니, 뉴포트, 카디프 성을 연이어 포위한 후 점령했다. 그러나 다른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에게 호응하지 않았다. 리처드 마셜은 콘월의 리처드 만큼은 자신에게 반드시 호응하리라 믿었지만, 콘월의 리처드는 돌연 마음을 바꿔 피에르 데 로슈와 화해하기로 했다.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페이르 데 로슈는 리처드에게 리처드 마셜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면 리처드에게 수여된 크라이스트처치 성, 카리스브룩 성을 포함해 데번주의 행정을 리처드에게 위임하겠다고 약속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이에 리처드 마셜은 함께 반란 계획을 세워놓고 이제 와서 참여하지 않은 걸 배신으로 간주했고, 리처드가 통치하던 웨일스의 헤이 성이 그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그 후 리처드 마셜의 지지자들은 1233년 겨울 내내 웨일스에서 잉글랜드로 급습했는데, 특히 리처드의 영지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또한 반군 기사 리처드 시워드는 리처드가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였던 옥스퍼드셔의 베클리를 불태웠다. 이런 상황에 부담을 느낀 리처드는 다시 리처드 마셜과 손잡는 쪽으로 넘어가는 듯했지만, 1234년 3월 14일 휴버트 드 버그의 영지에 속했던 서퍽의 하울리 영지를 자신에게 영구 봉토로 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받고 도로 정부 편에 섰다.

이렇듯 귀족들의 호응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왕실군 역시 리처드 마셜을 토벌하러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피에르 데 로슈에 의해 재무부장으로 선임된 피에르 데 리보가 무능한 행보로 일관해서 내전에 쓰일 군자금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측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지리멸렬하자, 그는 아일랜드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1234년 2월 2일 아일랜드로 건너가 헨리 3세를 따르는 아일랜드 보안관 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점령한 가문의 영지 렌스터를 탈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 해 3월 중순, 리처드 마셜은 토몬드 지방의 아일랜드인들과 연합해 헨리 3세를 추종하는 버그 가문을 공격하여 여러 성을 공략했다. 이에 버그 가문은 레이시 가문과 연합한 뒤 미스에서 재빠르게 반격을 가해 칼데어의 마셜 성을 포위했다.

1234년 4월 1일, 리처드 마셜은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포위군에 접근한 뒤, 주위의 권고에 따라 모리스 피츠제럴드와 협상을 시도했다. 모리스는 이에 동의했지만, 그날 리처드 마셜이 데려온 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즉각 군대를 일으켜 리처드 마셜을 공격했다. 리처드 마셜은 우세한 병력으로 몰아붙이는 적군을 상대로 소규모 기병대로 커리에서 항전했지만, 끝내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 후 킬케니 성으로 옮겨졌지만, 2주 후인 4월 16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킬케니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리처드 마셜은 생전에 게르베시아 드 디낭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에, 당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하급 성직자 계급인 시종을 맡던 길버트 마셜이 그의 직위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 있던 마셜 가문의 영지는 계승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