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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4:56:12

마닐라 전투(1574년)

1. 개요2. 발단3. 전개4. 결과5. 그 후 임봉의 행방

1. 개요

마닐라 전투는 1574년 11월 29일, 마닐라에서 벌어진 중국 출신의 중국-일본 해적단의 우두머리 임봉스페인콩키스타도르 후안 데 살세도 사이의 싸움이다.

2. 발단

임봉은 중국 남부 해안의 항구들을 약탈하던 해적단의 우두머리 중 한 명으로 동시에 군벌이었다.

임봉은 중국 남부를 약탈하다가 명나라 정부의 토벌로 인해 중국 내륙에서의 활동이 제한되자, 필리핀의 루손 섬 최북단에 정착했다.

루손 섬 최북단에는 왜구들이 세운 여러 일본인 마을들과 이방인, 네그리토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은 국가라 하기엔 구심점이 없없고 정치체제를 이루지 못한 곳이였다. 또한 필리핀 제도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무역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였다. 스페인측 기록에 인구 수는 96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지만 큰도시가 발달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가족 단위로 정치체제 없이 흩어져 자유롭게 살던 네그리토 인구의 우세속에 여러 외국인들이 섞여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네그리토들이 이방인들에게 배타적인 성향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에 섞여살던 일본인 마을 인구는 2000여 명 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루손은 일본 각지에서 온 왜구들의 중국 약탈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당시 지도에도 국가가 없는 비어있는 땅으로 여러 국가에서온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였다. 임봉은 중국어에 능하고 중국 내륙의 지리에 훤한 당시 화교들이 그랬듯 무역과 해적활동을 미끼로 왜구 마을들과 결탁했다.

그렇게 왜구들과 함께 루손 섬 최북단에서 중국 남부해안 약탈을 일삼던 임봉은 어느해, 한 중국 무역선을 붙잡았는데, 그 배는 루손 남부에 위치하던 스페인령 필리핀에 후송하려고 금은보화를 싣고 있었다. 이를 본 임봉은 중국 남부를 터느니 차라리 가까운 루손 섬 남부의 땅을 통해 금은보화를 약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페인의 마닐라로 눈길을 돌렸다.

마닐라는 고대부터 많은 해외상인들이 오가던 무역도시였지만 스페인이 1571년부터 점령한 이후 서구식 요새와 도시를 건설했다. 당시 같은 신대륙의 스페인 자본이 막대한 양으로 유입되어 호황을 맞이해상태로 동남아, 일본, 중국 사이의 중심적인 무역기지가 되었다. 임봉은 무장한 해적 뿐 아니라 많은 기술자와 여자들도 다수 태워서 왔는데, 마닐라를 완전히 점령해 정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3. 전개

임봉은 62척 이상에 달하는 선박과 본인이 보유한 군대 중 3천600여 명의 정예병과 4백의 왜구 용병들을 거느린 함대를 이끌고 마닐라로 출발했다.

마닐라로 향하던 도중 임봉의 해적들은 비건에 정박한 스페인갤리엇을 발견했는데, 이는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후안 데 살세도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보낸 배로 대략 80여 명 이하의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국의 함대에 어쩔 줄을 모른 선원들은 재빨리 제압되었고, 선원 중 22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선원들의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에 놀라 임봉의 행동에 경고문을 날린 다음, 마닐라로 방어군을 보냈다. 임봉은 이에 살세도가 겁을 먹은 것이라며 경고를 무시한 채로 마닐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닐라 남쪽 항구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Saint Andrew)에 도착한 임봉은 다음날 바로 700명의 선봉대를 마닐라에 상륙시켰다.

이때 임봉의 해적들은 많은 수가 메일(쇄자갑), 투구를 쓴 면사포(두정갑)를 입고, 아쿼버스 총[1], 파이크, 전투도끼, 커틀러, 중국식 장검, 단검, 초기형 수류탄을 비롯한 여러 폭발물과 화포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적지 않은 왜구도 섞여 있었는데 이들은 카타나로 무장하고 있었다. 도합 4000여 명 정도였다.

스페인 측은 300여명의 스페인군을 주력으로 식민지 전사들 중 화포 등의 원거리 무기를 다루는 병과를 고용했고, 그외에도 일로카노 지역 전사 300명과 숫자불명인 식민지 민병대가 있었다. 식민지 민병대 중에는 철제 갑옷을 갖추지 않은 숫자가 임봉 측 보다 많았다. 식민지군은 다양한 토착 양식의 시미터,세이버,단검을 사용했다.

마닐라를 재빠르게 점령하려던 임봉은 외곽과 내부에서 샤콘 대위와 벨라스케즈 대위의 지휘를 받는 저항군에 부딪혀 크게 밀렸다. 이에 해적들은 해안에 정박된 배에 남겨둔 포로(스페인 소속 선원)들을 사살하고 임봉의 배로 후퇴했다. 해적들이 마닐라에서 철수한 틈을 타 스페인은 마닐라에 방어용 팔레사드를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이때 살세도가 추가적인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

이틀 뒤, 아침이 되자 임봉은 전 함대를 이끌며 해안을 향해 세 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마닐라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백병전이 벌어졌고 중국 해적들은 무작정 마닐라 도시 내부로 진입해 시가전을 목표로 돌격했다. 해안가에 형성된 방어 진형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오직 80여 명의 해적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들은 즉시 사살되었고 사기가 꺾인 해적들은 마닐라에서 후퇴했다.

마닐라에서 패배한 임봉은 임시방편으로 루손 섬 중부 해안에 위치한 팡가시난[2][3]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요새를 건설하여 한동안 머무르기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를 가만히 둘 세라, 즉시 마닐라에 방비를 강화했으며 임봉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살세도는 병사 256명과 일로카노 전사 300여명을 포함한 식민지군을 거느리고 1572년 3월 23일 샤콘, 채브스, 리베라, 라미레즈, 차콘 대위가 지휘하는 59척의 함정으로 출항했다. 하루 뒤 살세도는 팡가시난에 도달했는데, 임봉의 바다 도주로와 연결되는 아그노 강을 봉쇄하고 차브스, 차콘 대위에게 각각 8명의 병사들을 하사하여 9척의 작은 배를 통해 강 상류의 해적 배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이에 임봉의 해적단은 도망칠 곳 없이 스페인군의 공세를 직접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세도는 대장 리베르와 28명의 군사를 보내어 육지 쪽에서 임봉의 요새를 습격했는데 때가 밤이라서 시야가 보이질 않아 스페인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 해적들은 다시 뭉칠 수 있었고, 4개월 간의 긴 포위 공방이 이어졌다. 임봉은 포위당한 틈을 타 부하들과 함께 요새 안에서 30척의 배를 만들었고, 8월 4일, 임봉의 일당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결과

스페인 측은 초반 기습으로 인해 갑작스레 인질로 잡힌 수십명을 포함해 70여명이 사망하였고, 임봉 측은 수습된 시신만 헤아리면 400여명 이상이였다고 한다. 임봉 측이 대체로 접근전에서 밀린다는걸 깨닫고 이후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기에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다.

이 전투는 스페인명나라 정부 사이가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양 국가는 더 많은 교류를 했고 이후 갤리온 무역이 확대됐다. 루손섬 최북단을 거점삼아 활동하던 왜구와 중국인들을 토벌한 필리핀 도독령 군대 덕분에 중국 남부지방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해지자, 명나라와 필리핀간의 갈레온 무역과 사무역 및 밀무역이 큰 규모로 확대되었고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청나라때까지 유지했다. 무역으로 유입된 압도적인 양의 은으로 옹정제 시기에 지정은제를 실시했다. 대항해시대 당시 중국은 네덜란드, 영국과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스페인과는 거의 매년 무역선이 오갈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실제 많은 청나라인들이 19세기에 필리핀 도독령으로 이민하기도 했다.

5. 그 후 임봉의 행방

팡가시난을 탈출한 임봉은 대만으로 돌아와 다시 해적질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호수인(胡守仁)이 이끄는 명나라 군에게 궤멸당한다.[4] 이후 시암인도를 떠돌다 목격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자취를 감췄다.

한편, 마닐라 전투의 영웅 살세도는 마닐라 전투의 이듬해인 1576년에 말라리아 때문에 사망했다. 때문에 당시 살세도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마닐라를 방문한 명나라 사신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하릴없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1] 전장식 화기[2] 고대부터 현지인이 살던 곳에 일본인 및 화교들이 곳곳에 정착촌들을 형성해 15세기쯤엔 이미 도시화된 곳이였다. 중국어를 아는 인구가 많아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했고, 많은 수가 해적(왜구)가 되기도 했다.[3]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정화(명나라)가 이곳에 방문한 후, 도독부가 세워 졌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오래되지 않아 없어졌다.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기록이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화교계 필리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이쪽 지방 출신이고 정치적 기반도 이곳 주변이다. 마르코스 본인도 조상이 중국해적이라 발언한 바 있다.[4] 호수인은 임봉이 명나라에서 해적질을 할 때부터 그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