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5-05 21:15:35

베르나데트 수비루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Bernadette Soubirous
SCN
파일:b2ap3_large_Sainte_Bernadette_sRVB.jpg
<colbgcolor=#6a8e9d><colcolor=#000> 국적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프랑스|{{{#!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프랑스}}}{{{#!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dark-style="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출생 1844년 1월 7일 ([age(1844-01-07)]주년)
프랑스 왕국 오트피레네 루르드
사망 1879년 4월 16일 (향년 35세)
프랑스 제3공화국 니에브르 느베르
시복 1925년 6월 14일,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
축일 4월 16일(가톨릭)
가족 아버지 프랑수아 수비루 (1807–1871)
어머니 루이스 수비루(1825–1866)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성모 발현2.3. 성모발현 이후2.4. 사후
3. 미디어믹스

1. 개요

프랑스가톨릭 성녀로, 루르드 성모 발현의 시현자이다. 과거 한국 천주교에서는 '벨라뎃다'라는 표기로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2.1. 유년기

프랑스 루르드에서 1844년 1월 7일에 태어났고, 부모님결혼기념일1월 9일 지역의 조그마한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다. 그 당시 프랑스는 거듭된 정치·경제·사회적 불안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고 베르나데트의 가족도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유아콜레라에 걸렸고 평생 심한 천식을 앓았다고 한다. 결국 베르나데트의 가족은 지역 주민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조그마한 지하실 골방으로 이사를 갔다.

2.2. 성모 발현

그러던 중 1858년 2월 11일, 당시 열네 살이었던 수비루는 언니, 친구와 함께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서 장작을 구하러 나갔다가 첫 환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베르나데트는 땔감용 나무수프 재료용 뼈 등을 모으러 돌아다니던 도중 가브 강을 건너려고 신발을 벗었을 때, 폭풍우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주변 나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마사비엘 동굴에서 갑자기 이 비쳤다.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온 흰 드레스에 하늘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와 어깨를 덮었으며, 팔에는 묵주를 두르고 있고 발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을 한 여인이 나타났다. 베르나데트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 기도를 바쳤다. 묵주기도를 끝마치자, 여인은 베르나데트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나데트는 이 일을 자기만이 아는 비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 비밀은 부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체벌을 받았다. 3일 후, 베르나데트는 다른 2명의 소녀와 동굴을 다시 찾았는데, 베르나데트가 탈혼 상태에 빠진 것에 놀라 두 소녀가 몹시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녀들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베르나데트는 아직도 황홀경이 없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2월 18일, 베르나데트는 부인에게서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 동굴에 오너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어서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지역 전체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부모와 경찰은 베르나데트가 더는 마사비엘 동굴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했지만, 베르나데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동굴을 찾았다.

2월 25일, 부인은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마신 다음에 씻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지만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바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샘물을 통해 치유된 것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환자는 사고 후 오른손이 기형으로 변한 여성이었다.

3월 25일, 밤중에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갔으나 울타리가 쳐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브 강가에 무릎을 꿇고 동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베르나데트는 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3번이나 되풀이하여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부인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4번째 물음에 그녀는 "나는 원죄 없는 잉태이다."라는 부인의 대답을 들었다.[1]

4월 7일 주님 부활 대축일, 베르나데트를 관찰한 의사는 그녀가 탈혼 상태에 빠졌을 때, 촛불에 손을 뻗었는데도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에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부인의 미소를 보고 감탄한 그녀는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2.3. 성모발현 이후

베르나데트는 성모발현 사건으로 시끄러워지자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하여 느베르 자선 자매회가 운영하는 호스피스 학교에 갔는데, 문맹이던 그녀는 그곳에서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후 가르멜회에 입회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건강에 엄격한 가르멜회의 내규상 들어갈 수 없었다. 1866년 7월 29일, 그녀는 다른 42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수련자의 수도복을 입고 느베르에 있는 생질다르 수도원의 애덕의 자매회 모회에 입회했다. 이후에는 생질다르 수도원에서 병실 조수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성구 관리자로 일하면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어린 시절 겪은 콜레라 때문에 심각한 만성 천식을 앓았고 결국 폐와 뼈 결핵에 걸렸다. 죽기 직전 몇 달 동안은 수도원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결국 1879년 4월 16일 부활절 주간 수요일에 35세의 나이로 장기 질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녀의 시신은 생질다르 수도원 부지에 있는 성 요셉 경당에 안치되었다.

2.4. 사후

파일:2000004632947.webp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1909년 9월 22일, 1919년 4월 3일, 1925년 4월 18일 세 차례에 걸쳐 경찰과 지자체 대표들, 교회 관계자들의 참관과 선서 하에 교회법과 프랑스 국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개봉되었다고 한다. 시복시성을 위한 조사를 위해 시신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1909년 첫 번째로 성녀의 관을 개봉했을 당시에도 성녀의 피부색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고 이가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당시 관을 개봉하여 검시 참관한 의사들은, 성녀가 매장된 곳이 매우 부패가 일어나기 쉬운 환경으로, 성녀가 입은 수도복은 물기를 머금어 축축했고, 함께 매장된 묵주는 녹슬고 십자가는 녹색으로 변색되어 있었음에도 정작 성녀의 시신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1919년 성녀의 관을 두 번째로 개봉했을 때, 첫 번째 개봉했을 때와는 달리 곰팡이균과 칼슘염으로 보이는 층으로 시신이 덮여 있었는데, 의사들은 이는 1909년 첫 번째 개봉 당시 시신을 세척했던 영향이라고 판단하였다. 정작 곰팡이균과 염층을 걷어내니 시신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베르나데트의 관은 성녀의 시복을 앞두고 1925년 세 번째로 개봉되었고, 성유물로 공경될 유해의 일부분을 분리할 겸 부검 절차까지 거쳤는데, 이에 참여한 외과의사 콩트(Comte) 박사는 루르드 노트르담 의사협회지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가장 놀랐던 것은 골격, 근육의 섬유 조직(아직 유연하고 단단함), 인대, 그리고 피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46년이 지난 지금 이 예상치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간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부서지기 쉬운 장기이므로 매우 빠르게 분해되거나 백악질로 굳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잘라보니 부드럽고 거의 정상적인 질감이었다. 나는 현장에서 이 점을 지적하며, 이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때 콩트 박사는 완벽하게 보존된 성녀의 심장성유물 공경을 위해 분리해 내는 것을 고려하였으나, 수녀원장은 성녀의 심장이 그의 온몸과 함께 온전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피력한 데다, 심장 적출 과정에서 성녀의 시신에 눈에 띄는 손상이 발생할 수 있는 점도 고려하여 포기하였다고 한다.

베르나데트는 그해 6월 14일 복녀품에 올랐고, 같은 해 8월 3일 성녀의 얼굴, 손 등 노출된 부위에 얇은 밀랍 막을 도포하는 조치만 거친 뒤, 공경을 위해 유리청동으로 된 관에 담겨 생질다르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후 1933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축일은 4월 16일이다.

3. 미디어믹스


1943년 제니퍼 존스 주연의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헨리 킹이 감독을 맡았으며 프란츠 베르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였다. 제1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영화는 성모발현부터 베르나데트의 사망까지 전 생애를 다루고 있다. 퍼블릭 도메인으로 유튜브에서도 감상이 가능하다.


[1]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루르드 동굴의 성모상 아래에도 이 구절 QUE SOY ERA IMMACULADA COUNCEPCIOU가 새겨져 있다. 베르나데트가 문맹이라서 루르드 등 프랑스 남부의 방언으로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