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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4:48:37

마리 조피

마리아 소피아 왕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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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1세 페르디난도 2세 프란체스코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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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colbgcolor=#DDE5CE><colcolor=#000000> 양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2세의 왕비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Marie Sophie in Bayern
파일:J._Albert,_München_-_Queen_Marie_of_the_Two_Sicilies.jpg
이름 독일어 마리 조피 아말리
(Marie Sophie Amalie)
이탈리아어 마리아 소피아 아말리아
(Maria Sofia Amalia)
출생 1841년 10월 4일
바이에른 왕국 포센호펜 성
사망 1925년 1월 19일 (향년 83세)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뮌헨
배우자 프란체스코 2세 (1859년 결혼 / 1894년 사망)
자녀 데이지(사생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
아버지 바이에른에서의[1]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작
어머니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2]
형제 루트비히 빌헬름, 빌헬름 카를, 헬레네, 엘리자베트, 카를 테오도어[3], 마틸데 루도비카[4], 막시밀리안, 조피 샤를로테,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종교 가톨릭
파일:Maria Sophie of Bavaria.jpg
초상화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왕세자비2.3. 용감한 왕비2.4. 망명 생활2.5. 말년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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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2세의 왕비.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제국 엘리자베트 황후의 동생이다.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비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의 전쟁 중에 보여준 용감한 모습으로 '바이에른의 독수리'라고 불렸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41년 10월 4일 바이에른에서의 공작 막시밀리안 요제프와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의 3녀로 태어났다. 애칭은 마디(Madi).

비텔스바흐 가문의 방계 출신인 마리 조피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유롭게 뛰놀며 자랐다. 마리 조피는 검은 눈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으로 자랐고 자매들 중 언니 엘리자베트 다음으로 아름다웠다.

1854년에 언니 엘리자베트가 이종사촌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했다. 그 결혼으로 가문의 격이 급상승하자 1857년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세자인 칼라브리아 공작 프란체스코와 혼담이 들어왔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은 동맹 관계였고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원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결혼이었다. 마리 조피는 빠르게 궁중 예법과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그리고 16살이나 되었음에도 아직 월경을 하지 않았기에 치료사들로부터 거머리와 목욕을 이용한 치료를 받았다.

2.2. 왕세자비

파일:Marie_Sophie_Amalie,_Herzogin_in_Bayern_1859.jpg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1859년

1859년 1월 8일 뮌헨 레지덴츠에서 사촌이 대신한 대리 결혼식을 진행하고 나폴리로 향했다. 2월 3일 나폴리에 도착했지만 궁중은 왕세자비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결혼식을 마치고 부부는 신방에 들어갔다. 독실한 프란체스코는 새벽 내내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했고, 마리 조피는 울다가 잠들었다. 양시칠리아에서 마리 조피는 이탈리아식 이름인 마리아 소피아라고 불렸다.

영 좋지 않은 상태로 시작한 결혼은 불행했다. 프란체스코의 계모 마리아 테레사 왕비는 마리 조피를 차갑게 대했고, 부부는 어색한 사이였다. 부부는 프란체스코의 포경 문제로 인해 결혼하고도 한참 동안 부부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1859년 5월 22일 페르디난도 2세가 숨을 거두면서 프란체스코 2세가 즉위했다. 마리 조피는 결혼하고 넉 달도 되지 않아 17살의 나이에 왕비가 되었다.

2.3. 용감한 왕비

파일:Maria_Sofia_di_Baviera.jpg
양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소피아, 1860년

1860년 이탈리아 반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중심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졌고, 나폴리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피에몬테군은 교황령움브리아마르케를 정복한 후 양시칠리아 왕국을 침공했다.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군대가 나폴리까지 점령하자 국왕 부부는 요새 도시 가에타로 피신했다.

가에타에서의 공성전은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공성전 동안 마리 조피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며 용감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번은 적군의 대장이 다치는 걸 피하고 싶다면 국왕 부부가 거주하는 곳에 깃발을 달라고 하자, 원한다면 언제든지 총을 쏴보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전염병의 창궐과 식량 부족으로 가에타의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자 프란체스코 2세는 아내에게 피난을 가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마리 조피는 차라리 이곳의 훌륭한 전사들과 함께 죽겠다고 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군인들은 왕비를 존경했고,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도 가에타의 군인 왕비에게 경의를 표했다.

결국 1861년 초 가에타는 피에몬테 군에 점령당했고 가리발디는 테아노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모든 점령지를 조건 없이 헌상했다. 이로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멸망했으며, 프란체스코 2세 부부는 로마로 망명했다.

2.4. 망명 생활

국왕 부부는 교황 비오 9세로부터 퀴리날레 궁에서 환대를 받고 파르네세 궁에 거주하게 되었다. 프란체스코 2세는 교황의 지지를 받으며 로마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마리는 가에타에서의 용기로 유럽에서 많은 찬사와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행동에 제약이 따르면서 답답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때 벨기에 출신 교황령 군위대 장교 아르망 드 라베이스라고 알려진 남자(실존했는지 알 수 없다)와 사랑에 빠졌다. 1862년 마리 조피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부모님이 있는 포센호펜 성으로 떠났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사생아를 임신하고 있었다. 언니 엘리자베트, 친정 가족들과 의논하여 1862년 11월 24일 은둔처에서 딸 데이지를 낳았고[5] 아이는 프랑스의 귀족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2011년 나온 마리의 전기에서는 펠릭스-에마누엘 드 라바이스가 데이지의 아버지라고 서술하고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1년 후 마리 조피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프란체스코 2세는 아내를 용서하고 부부 사이를 나아지게 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포경 관련 수술을 받았다. 1869년 봄, 마리 조피는 마침내 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 1869년 12월, 엘리자베트 황후의 생일에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는 병약했고, 태어난지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슬픔에 빠진 부부는 다시는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파일:Queen_Maria_Sophie_of_Bavaria_1875.jpg
바이에른 왕국에서, 1875년

1870년 교황령까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부부는 프랑스를 거쳐 바이에른 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오갔다. 딸의 죽음 이후 유럽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마리 조피는 남편의 곁으로 돌아왔다. 1894년 마리가 여행을 떠난 사이 프란체스코 2세는 위독해졌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던 아내가 도착하기 전 숨을 거두었다.

2.5. 말년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프랑스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왕정 복고를 위해 노력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교전하던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했다.

말년에는 파리뮌헨을 오가며 생활했다. 1925년 1월 19일 뮌헨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Marie Sophie in Bavaria)
<colbgcolor=#fff3e4,#331c00> 바이에른에서의 막시밀리안 요제프 공작
(Duke Maximilian Joseph in Bavaria)
<colbgcolor=#ffffe4,#323300> 바이에른에서의 피우스 아우구스트 공작
(Duke Pius August in Bavaria)
바이에른에서의 빌헬름 공작
(Duke Wilhelm in Bavaria)
팔츠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의 마리아 안나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Anna of Zweibrücken-Birkenfeld)
아렌베르크의 아멜리 루이제 공녀
(Princess Amélie Louise of Arenberg)
아렌베르크의 루트비히 공
(Prince Louis of Arenberg)
마리 아델라이드 줄리 드 메일리
(Marie Adélaïde Julie de Mailly)
바이에른의 루도비카 공주
(Princess Ludovika of Bavaria)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프리드리히 미하엘
(Frederick Michael,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팔츠줄츠바흐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여백작
(Countess Palatine Maria Franziska of Sulzbach)
바덴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아르망 드 라베이스 (사생아)
(Armand de Lavayss)
1녀 마틸드 마리 소피 앙리에트 엘리자베트 루이즈
(Mathilde Marie Sophie Henriette Elisabeth Louise)
1862년 11월 24일 1886년
프란체스코 2세
(Francesco II)
1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 공주
(Princess Maria Cristina Pia)
1869년 12월 24일 1870년 3월 28일

4. 여담



[1] Herzog in Bayern(英:Duke in Bavaria). 바이에른 공국은 1506년 이후 기존의 게르만족 전통의 분할상속제를 폐지하고 장자상속제를 적용시켰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자신들의 영지와 공작위를 잃어버린, 그리고 후에 분할 상속을 통해 작위를 받았어야할 이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이라는 작위를 만들었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후예들은 모두 이 작위를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작위는 예우상의 작위였고 실제로는 바이에른 공작(Herzog von Bayern/Duke of Bavaria)이 통치했다.[2]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7녀.[3] 알베르 1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왕비의 아버지다.[4]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동생인 루이지 왕자의 아내다.[5] 본명은 마틸드 마리 소피 앙리에트 엘리자베트 루이즈. 보통 데이지라고 불렸으며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훗날 아이를 입양한 집안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마리 조피는 계속 데이지와 연락을 취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