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리아 판 헬러 Maria van Gelre |
출생 | 미상 |
헬러 벡국 | |
사망 | 1405년 5월 12일 |
헬러 공국 | |
아버지 | 레이누드 2세 판 헬러 |
어머니 | 소피 베르투 |
형제 | 마가레타, 메흐텔트, 엘리사벨 |
남편 | 빌헬름 6세 폰 율리히 |
자녀 | 빌헬름 7세, 레이날트 4세, 요한나 |
직위 | 헬러 여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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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 여공작. 언니 메흐텔트와 헬러 공작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2. 생애
1325년경 헬러 공작 레이누드 2세 판 헬러와 메헬렌과 베를라르의 영주인 플로랑 베르투의 딸인 소피 베르투의 막내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가레타[1], 메흐텔트, 엘리사벨[2]이 있었다. 1362년 12월 25일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와 결혼했다.1371년 이복 형제인 에두아르트와 레이누드 3세가 1371년에 잇따라 자녀 없이 사망하자 헬러 공작위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헬러 공작 계승자로는 그녀와 누나인 메흐텔트 판 헬러가 유력했다. 당시 미망인이었던 메흐텔트는 자기가 여공작이 되는 것을 지원할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1372년 2월 14일 자신보다 20살 어린 블루아 백작 장 2세 드 블루아샤티옹과 세번째로 결혼했다. 마리아는 남편인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와 함께 이에 대항했다. 또한 아들 빌헬름 7세를 사망한 이복형제 에두아르트의 약혼자였던 카타리나[3]와 결혼시킴으로써 하바이에른 공국과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국의 지원을 받아내고자 했다.
1372년 봄, 블루아 백작 장 2세는 벨루웨로 진군해 후크파와 연합한 후 여러 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이후 여세를 이어가 겔데른 시를 포위했지만 16주에 걸친 공방전 끝에 공략에 실패했다.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는 이에 맞서 루르몬드, 벤로 등 헬러 공국의 상부 지역을 확보했다. 장 2세를 추종하는 후크파의 지도자 고스윈 폰 바릭이 티엘을 공략했지만, 곧 율리히 공작에게 패퇴했다. 이후 빌헬름 6세는 위트레흐트를 침공해 아메롱겐, 도른, 자이스트 등지를 약탈했고, 장 2세는 이에 대응해 잘트보멜을 공략하고 도시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1373년, 아르눌트 판 호른이 메흐텔트를 위해 하르데르베이크를 공략했다. 1373년 2월 6~9일 양측간의 평화 회담이 게르트루이덴베르크에서 열렸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374년, 레이누드 1세 판 브레데로데가 메흐텔트를 위해 티엘을 수복했다. 1347년 4월 28일, 슈트탈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헬러 공국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기로 했다. 라인 강 우측 지역과 발강 북쪽 지역은 메흐텔트가 소유하고, 라인강 좌측과 발강 북쪽 지역은 마리아가 소유하기로 했다. 단, 메흐텔트가 상속인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율리히 공국에게 계승되기로 했다. 그러나 양자 모두 이 합의에 만족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1377년 4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개입했다. 그는 마리아와 빌헬름 6세의 아들인 빌헬름 7세가 이제 성인이므로 그에게 헬러 공국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과 척질 생각이 없었던 블루아 백작 장 2세는 내전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메흐텔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후크파의 지원에 힘입어 항전을 이어갔다. 1378년 4월 18일, 티엘의 후크파가 마리아를 지지하는 대구파가 교회에서 통행세 징수소로 가려 할 때 습격해 집단 학살했다. 이 사건은 '사악한 부활절(kwade Paasdag)' 사건으로 일컬어졌다.
1378년 10월 19일, 대구파가 후크파의 지도자 레이누드 1세 판 브레데로데의 본거지인 겐넵 성을 포위해 한 달만에 함락하고 파괴를 자행했다. 1379년, 대구파는 여세를 이어가 젠와인 마을을 점거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포함해 모든 건물을 파괴했다. 그해 2월 23일, 티엘의 통행료 징수소가 빌헬름 7세의 군대에 의해 점거되었다. 그리고 3월 24일, 메흐텔트가 이끄는 군대가 회네펠 전투에서 빌헬름 7세의 기습 공격으로 참패했다. 결국 메흐텔트는 더 이상의 항전은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헬러 여공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여공작 칭호를 계속 쓰는 것도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내전에서 승리한 뒤, 마리아는 헬러 공작위를 아들 빌헬름 7세에게 넘기고 조용히 지내다 1405년 5월 12일에 헬러 공국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빌헬름 6세 폰 율리히(1325 ~ 1393): 율리히 공작.
- 빌헬름 7세 폰 율리히(1364 ~ 1402): 헬러 공작, 율리히 공작.
- 레이날트 4세 폰 율리히(1365 ~ 1423): 헬러 공작, 율리히 공작.
- 요한나(? ~ 1394): 아르켈 영주 요한 5세의 부인.
[1] 1320 ~ 1344, 율리히 백작 빌헬름 5세의 아들인 베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폰 베르크의 부인[2] ? ~ 1376, 카셀과 아스퍼덴 사이에 위치한 그라벤달 수도원의 수녀원장.[3]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인 알브레히트 1세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