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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몬 왕조 초대 군주 מַתִּתְיָהוּ הַכֹּהֵן בֶּן יוֹחָנָן | 마타디아 벤 요하난 | ||
제호 | 한국어 | 마타디아 벤 요하난 |
히브리어 | מַתִּתְיָהוּ הַכֹּהֵן בֶּן יוֹחָנָן | |
라틴어 | Mattathias ben Johanan | |
존호 | 코헨(כֹּהֵן , 제사장)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166/165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168/167년 ~ 기원전 166/1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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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의 제사장, 하스몬 왕조의 초대 군주. 마카베오기에서 그의 활약상을 다루고 있다.2. 행적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요하난의 아들이자 시몬의 손자이며, 요아립의 증손자로, 예루살렘에 태어나서 모딘(Modin)에서 살았다고 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족보를 한 세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시몬 다음으로 아사모네우스(=하스모나이우스, Hasmonæus)를 언급한다. 하지만 후대의 그리스 및 랍비 자료에서 그의 집안을 일컬어 "하스모니아인의 집"이라고 일컬은 점, 요하난과 시몬이라는 이름은 마타디아 이후의 가문에 계속 등장하지만 "하스모나이우스"라는 이름은 역사 문헌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점을 볼 때, 하스모나이우스라는 이름의 첫번째 소유자는 먼 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편, 여러 랍비 자료에서는 그의 가문과 별도로 "하스모나이(Hasmonai)"라는 인물을 언급한다. 소페림에서는 "대제사장 요하난의 아들 마타디아와 하스모나이와 그 아들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러 자료에서는 마타디아와 하스모나이가 동시대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이끈 것으로 서술되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 하스모나이를 마타디아의 친척으로 추정한다. 탈무드에서는 하스모나이를 마타디아보다 먼저 언급한다. <신명기에 대한 미드라시(midrash, 주석)>에는 하스모나이의 자손이 언급되었는데, 이중에는 유다 마카베오의 최측근이었던 엘라자르도 있다. 한편, 여러 랍비 자료에서 마타디아의 아들로 언급된 이들로는 유다 마카베오, 엘레아자르 아바란, 시몬 타시, 요한 가디, 그리고 요나단 압푸스가 있다.
대제사장 요아립의 후손인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무렵에는 모딘에 거주했다고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노년의 나이에 은퇴하여 시골인 모딘으로 낙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말년을 조용히 보내는 듯했지만, 아펠레스 휘하의 셀레우코스 제국 병사들이 모딘에 찾아와서 제우스를 위한 제단을 쌓고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면서 운명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초기엔 유대인들이 정통 신앙을 지키고 일정한 자치를 허용하는 등 회유적인 모습을 보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안티고노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 주변의 만만치 않은 국가들과 전쟁을 매번 치러야 했던 제국 입장에서 소수 민족을 불필요하게 탄압할 여유가 없었고, 지정학적으로도 프톨레마이오스가 차지한 이집트와 접경 지역인 유대 지방에 거주하는 그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75년에 즉위한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정책 방향을 바꿨다. 그는 내전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제국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제국의 국교인 그리스 종교를 전 신민이 따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제국 곳곳에 신전을 설치했고, 토착민들에게 기존에 믿던 신 대신 제우스를 섬기라고 권고했다.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유대에서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유대교는 전통을 지키려는 하시아파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를 지원했고, 이아손을 대제사장으로 선임하여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짓고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문명을 가르치는 걸 허락했다. 기원전 172년, 그는 모종의 이유로 이아손 대신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로 쳐들어갔을 때, 이아손이 반란을 일으켜 성채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역을 정복하고 메넬라오스의 많은 추종자를 학살했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전 유대 대제사장 이아손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특권을 박탈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제우스 신전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했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세우며 그 발 아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모딘으로 찾아온 아펠레스는 이러한 왕의 뜻을 받들어 모딘에서 가장 명망 높았던 그에게 제우스에게 바칠 희생 제물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왕의 통치 아래에 있는 모든 나라가 그에게 복종할 지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의 언약에 따라 행하겠다."
몇몇 유대인이 아펠레스의 명령에 따르려 하자, 그는 그들을 죽이고 제단을 파괴했으며, 아들들은 아펠레스를 살해했다. 그 후 그는 주민들을 향해 외쳤다.
"율법에 충실하며 언약을 지키는 자는 나와 함께 나와라!"
마카베오기 1서 2장 27절.
마카베오기 1서 2장 27절.
이에 1,000여 명의 장정이 그를 따랐다. 그는 이들을 통솔하여 여러 지역에 설치된 제단을 파괴하고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에게 할례를 배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