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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20:41:02

망국신

1. 개요



나라를 망하게 한 신하를 말하며 육사신의 하나다. 간신이나 반신이 나라를 쇠락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망국신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육사신 중에서 최악의 신하로 꼽힌다. 간신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면 그는 망국신으로 취급하지만 반신은 이미 나라를 등졌기 때문에 망국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망국신들 중 일단은 본인 의도가 아닌 경우는 있는데 대표적으로 강유왕윤 같은 경우다. 이들은 국정운영을 제대로 못하고 결국 나라가 패망한 결과를 낳아버린 인물들로 어쨌거나 망국신으로 평해도 이상하지 않는 사례다.

2. 목록

사실 망국신의 판단은 주관이 반영되기 쉬운 부분이므로 어느 정도 유의할 필요는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나라 하나가 망하는 데 신하 한 명이 전부 기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테고, 신하들이 망국에 기여한 지분을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라 멸망에는 근본적 원인이 있고 직접적 원인이 있기 때문에 어느쪽을 더 크게 쳐줘야 할지 명백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소를 피하려다가 오히려 다른 멸망 요소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1] 이 부분에 대하여도 과연 나라 멸망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아니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고 정상참작을 해야 할지 의견이 갈릴 수도 있다. 본 문서에서 은근히 망국신들의 목록이 상대적으로 적은것도 신하 하나, 혹은 몇명 정도가 나라를 말아먹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극단적인 사례는 생각 외로 그리 많지 때문이다.

2.1. 동아시아

2.1.1. 대한민국

2.1.2. 중국

2.1.3. 일본

2.2. 유럽

2.2.1. 프랑스

2.2.2. 로마 제국


[1] 예를 들어 북송은 무인들의 권력과 입지를 약화시킨 결과 국방력의 저하로 이어졌다고 비판받지만, 한편으로 북송 이전의 오대십국 시절에는 무인들의 권력이 너무 강해서 정권을 쉽게쉽게 갈아버렸다. 그 외에도 황실 종친 권력의 강약, 중앙과 지방의 권력 균형 등도 전통적인 딜레마였다.[2] 초주와 협력하여 북벌로 초토화된 국력을 되살려야 한다는 구국론을 지었다.[3]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전쟁을 좋아하나 공이 없고 국내가 피폐해졌다 하여 후주에게 표를 올려 그를 소환해 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촉 장로는 제갈첨이 표를 올려 염우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하도록 했다는 고사가 있다 한다.(동궐, 번건전) 또한 환관 황호는 염우와 결탁했고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대장군으로 삼고자 하였다.(강유전) 이는 사실상 강유를 내쫒고 군권을 정상화하기 위해 황호, 제갈첨, 동궐, 염우 등이 결탁한 증거를 보여준다. 제갈첨은 죽을때 아들인 제갈상과 같이 황호를 막지 못한걸 극히 한탄한 유언을 남긴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유를 막기 위해선 황호와도 뜻을 같이 할 정도로 강유를 더 위험히 본 것이다. 또한 황호 역시 그가 간신으로 평가받긴 했지만 그래도 강유는 위험인물이라고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을 정도로 당대 강유에 인한 촉의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4] 다만 동궐, 요화, 장익의 경우엔, 강유에 대해 비판하지만 끝까지 협력은 했다, 이 역시 강유가 나라의 강역을 열어 촉을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은 상황이라 안 그럴수가 없었던 것이며 촉한이 망한 후 실제로 성도에 남아있는 장익과 다르게 동궐, 요화는 낙양으로 호송되는 것을 선택했다. 장익의 경우에는 장익전에 강유에게 저항했다고 언급이 나오듯이 강유의 북벌을 끝까지 비판하는 포지션이었으며 그가 억지로 강유의 북벌에 종군했어도 강유가 북벌로 촉한을 말아먹는 행위를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강유는 이를 듣지 않았다고 장익전에 기록되어 있다.[5]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학자 호삼성은 강유가 집권한 이유 강유가 나라를 망치는 기록이 나올때마다 그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극렬히 비판하였으며 마지막 촉 부흥 시도에서야 그나마 충심만은 인정할만 하다고 평했다.[6] 아이러니하게도 등애의 신원을 복권시킨 인물은 강유를 비판했던 번건이었다.[7] 또한 여포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후한서》 <왕윤열전>에 따르면 여포는 동탁의 재물에 대한 처분을 두고 왕윤과 서로 의견충돌이 굉장히 심했는데 정작 왕윤은 평소 여포를 가볍게 보고 검객으로 대우해서 이에 여포는 이전부터 그 공로에 기대어 스스로 자주 으스댔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왕윤에 대해 점차 불만이 쌓이고 거리감을 두기 시작하였다.[8] 이때 살아남은 일족 중 한명인 조카 왕릉은 피신해 훗날 조조를 섬겼다.[9] 그나마 왕윤의 시신은 조전이라는 사람이 관직을 포기하고 장례를 치르고 유표에게 도망갔다.[10] 강유의 성도 초토화보다 더 심한 것은 관중은 삼보의 난으로 인해 2~3년 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록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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