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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0:11

메리 워틀리 몬태규

<colbgcolor=#E1BC78><colcolor=#000000> 메리 워틀리 몬태규
Mary Wortley Montagu
파일:Mary Wortley Montagu.jpg
이름 메리 워틀리 몬태규[1]
Mary Wortley Montagu
출생 1689년 5월 15일
잉글랜드 왕국 노팅엄셔
사망 1762년 8월 21일 (향년 73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배우자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
(1712년 결혼 / 1761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메리
아버지 제1대 킹스턴어폰헐 공작 이블린 피에르폰트
어머니 메리 필딩
형제 프랜시스, 이블린, 윌리엄, 캐롤라인, 앤
1. 개요2. 생애3. 작품4. 천연두 예방접종 전파5. 알렉산더 포프와의 악연6. 가족관계7. 여담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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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작가. 여류시인이다. 영국 하원의원으로 터키 대사로 파견되었던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의 아내이다.

그녀가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 지인들에게 썼던 편지를 정리한 책인 <터키 대사관의 편지(Turkish Embassy Letters)>[2]는 당시 동양에 대한 유럽 사회의 인식과 오스만 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2. 생애

메리는 노팅엄셔 주의 저택에서 초대 킹스턴어폰헐 공작인 이블린 피에르폰트(Evelyn Pierrepont)의 장녀로 태어났다. 명문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보수적인 부친 아래에서 메리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구열이 높았던 메리는 방대한 자료가 있는 저택의 서재와 도서관을 전전하며 독학하였다. 다양한 문학 작품을 섭렵한 메리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을 공부하고 글을 쓰곤 했다.

메리는 여러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중 앤 워틀리(Anne Wortley)라는 친구가 있었다. 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메리는 앤의 오빠인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Edward Wortley Montagu)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법률가로 휘그당을 지지하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을 쌓은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메리를 부유한 귀족과 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1712년, 23살의 메리는 11살 연상의 에드워드와 시골로 도망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에드워드가 하원의원이 되면서 부부는 런던에서 살게 되었다.

결혼한 지 1년이 되는 1713년에 메리는 첫 아이인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다. 메리는 가정에 충실한 동시에 귀족으로써 사교계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사교계 인사들은 메리의 아름다움과 말솜씨에 반했고, 메리는 런던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715년 겨울에 메리는 천연두를 앓게 되었다. 병을 이겨냈지만 메리는 칭송받던 미모를 다소 잃게 되었다.

1716년, 에드워드는 터키 대사로 임명되었다. 메리는 남편을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게 되었다. 메리의 여행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이를 전부 기록했다. 그리고 특유의 사회성으로 터키 유력가의 부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 중에는 술탄의 후궁도 있었다. 1718년에 본국으로 돌아오기까지 메리는 유럽이 얼마나 하렘에 대해 남성중심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비웃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인 1718년 1월에 메리와 에드워드는 딸 메리를 낳았다.애 이름 짓기가 얼마나 귀찮았던 거야 두 자식을 두었으며 사랑의 도피로 맺어졌던 두 사람이었지만 중년에 접어든 부부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 1736년, 메리는 프란체스코 알가로티(Francesco Algarotti)라는 이탈리아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23살이나 연하였지만 학식이 깊고 매력적인 그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 메리는 함께 유럽 대륙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1739년, 50세의 나이에 메리는 건강상의 요양을 핑계로 대륙으로 떠났다. 메리는 프란체스코와 동거했지만 2년이 채 안 되어 그와 헤어졌다.[3] 그러나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을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베니스, 피렌체, 로마, 제노바 등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던 메리는 1761년에 딸의 편지로 남편의 죽음을 전해받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1762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3. 작품

메리는 생전 여러 시와 에세이를 썼다. 그녀가 쓴 여러 시는 후에 외손녀에 의해 <The Letters and Works of Lady Mary Wortley Montagu>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대표적인 시로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영 부인이 남편에게 보내는 서신(Epistle from Mrs. Yonge to her Husband)>, <도시의 목가(Town Eclogues)>가 있다. 정치에 관련된 글을 쓰기도 했다. 메리는 로버트 월폴 총리와 교분을 나눴었는데, 1737년 월폴의 반대파가 월폴을 공격하기 위한 만든 팸플릿인 Common Sense에 반박하는 연재물인 The Nonsense of Common-Sense을 출간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터키 대사관의 편지>는 메리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터키에서의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메리는 52통의 편지를 지인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모든 편지를 베껴 써서 앨범으로 정리해놓았다. 메리는 이 앨범을 철학자인 메리 아스텔 등 몇몇 사람들에게 빌려주었다. 메리가 죽은 지 1년이 채 안 된 1763년에 이 편지는 유가족의 동의없이 <터키 대사관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메리는 사적인 교류를 통해 터키 여성의 삶과 의복, 전통, 관례 등을 관찰하였고 이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메리는 오스만 제국의 후궁들의 목욕탕에 들어간 최초의 유럽 여성이었다. 당시 유럽에 있어 미지의 세계였던 터키의, 그 중에서도 비밀스러운 여성들의 깊고 내밀한 곳을 직접 체험한 메리의 기록은 진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4. 천연두 예방접종 전파

한편 그녀는 유럽에 천연두 예방접종을 확산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천연두 예방이라고 하면 에드워드 제너우두법을 떠올린다. 우두법 이전에 유럽에서는 사람의 고름을 쓰는 인두법(variolation)이 사용되었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딱지, 고름 등의 감염물질의 독성을 약화시킨 후 피부에 접촉시켜 약하게 앓게 하는 것으로 천연두를 예방하는 방법이다. 당시 터키, 인도 등 아시아 등지에서는 인두법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유럽에는 전해지지 않았었다. 메리는 터키에서 인두법을 알게 되고 자신의 아들에게 접종하였다. 영국에 돌아온 메리는 인두법을 알리고 예방접종 캠페인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메리를 무시했다. 그 시대에 여성이며 의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동양의 치료법이라고 환자의 고름을 피부에 대라는 메리의 주장은 사이비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메리는 굴하지 않고 인맥을 동원해 상류층과 왕실에 강력하게 인두법을 어필했다.[4] 인두법은 왕실의 지지를 얻었고 죄수를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실행, 효과를 입증받아 점차 접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후에 상대적으로 더 안전한 우두법이 개발되기 전까지 인두법은 유럽의 천연두 예방과 백신의 개발에 큰 기여를 하였다.

5. 알렉산더 포프와의 악연

메리는 시인 알렉산더 포프와의 관계로도 유명하다. 메리와 포프는 사교계에서 알게 되어 친해졌고 편지를 주고 받았다. 메리는 포프, 극작가이자 시인인 존 게이와 함께 전원시 <도시의 목가>를 집필하기도 했다. 메리와 포프의 사이는 포프가 메리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사랑을 고백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메리가 남편과 함께 터키로 떠난 뒤 포프는 메리에게 열정적인 러브레터를 보냈다.
After having dreamed of you several nights, besides a hundred reveries by day, I find it necessary to relieve myself by writing . . . . In all I can say, I only make you a present in many words of what I can do you no manner of good, but only raises my opinion of myself,―all the good wishes and hearty dispositions I am capable of forming or feeling for a deserving object; but mine are indeed so warm, that I fear they can proceed from nothing but what I can’t very decently own to you, much less to any other; yet what if a man has, he can’t help it.

낮 동안 수백 번 당신 생각을 하는 것도 모자라, 몇 날밤이나 당신의 꿈을 꾸고서, 편지로라도 제 마음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 . .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당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면서 헛꿈만 키우는 이 마음, 고귀한 대상을 향해 제가 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호의와 애정을 많은 말로 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제 호의와 애정은 정녕 너무나 뜨거워, 다른 사람은 물론이요 당신에게조차 제정신으로는 털어놓을 수 없는, 남자로서 어쩔 수 없는 그것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 1716년 10월, Letters and Works
포프의 편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노골적인 내용을 담았고 메리의 빠른 귀국을 재촉하기도 했다. 응답을 피하던 메리는 결국 거절의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포프는 메리에 대한 악의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찌질하다 메리에게는 애석하게도 포프는 풍자의 대가였다. 포프는 그의 대표작인 우졸우인전(The Dunciad) 등의 글에서 이니셜로 간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때로는 대놓고 이름을 언급하며(!) 메리를 공격했다. 한 풍자시에서는 메리의 천연두를 매독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메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방탕하고 문란한 여자로 묘사하는 포프의 공격을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했다.

6. 가족관계

남편인 에드워드와의 사이는 초반에는 다정하였으나 후에 싸늘해졌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재산 불리기에 바빠 가정에 소홀해졌고 메리는 그런 그에게서 젊은 날과 같은 열정을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자식 또한 메리에게 연달아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아들 에드워드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며 빚에 쫓겨 도망치듯이 여러 나라를 전전하였다. 딸인 메리는 가난한 스코틀랜드인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이 남자가 훗날 영국의 제7대 총리가 되는 존 스튜어트다. 메리는 딸의 결혼에 실망하였지만 후에 출세한 스튜어트를 보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아들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마음이 풀리지 않아 아들을 만날 때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만났으며 대부분의 유산을 딸에게 남겼다.

7. 여담

메리가 쓴 편지를 보면 안부를 묻거나 전하는 일반적인 편지와 달리 기록에 내용이 치중되어 있다. 메리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일 텐데'라든가 '이런 경험을 해본 건 나밖에 없다'는 식의 표현을 종종 하면서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러한 보고 정신으로 메리는 생전 9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메리는 터키 여성들의 생활과 하렘을 직접 보며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그녀의 감상은 하렘을 퇴폐적인 매음굴 정도로 생각하는 서양인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터키 대사관의 편지>를 읽고 많은 유럽 남성들의 환상이 깨졌으며 일부는 현실부정을 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와중에 프랑스의 화가 앵그르는 <터키 대사관의 편지>를 참조해 하렘을 에로틱하게 묘사한 ‘터키탕’(1862)을 그렸다. 그림 참조

8. 참고 문헌


[1] 결혼 전 이름은 메리 피에르폰트.[2] 이하 <대사관 편지>[3] 그러나 나쁘게 헤어졌던 것은 아닌지 노년에 두 사람은 담백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4] 메리가 천연두 예방에 이토록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녀도 천연두를 크게 앓은 동시에 동생을 천연두로 잃었던 과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