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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6:47:57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미헨 대공비에서 넘어옴
<colbgcolor=#f9d1ff><colcolor=#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Herzogin Marie zu Mecklenburg-Schwerin
파일: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jpg
이름 독일어 마리 알렉산드리네 엘리자베트 엘레오노레
(Marie Alexandrine Elisabeth Eleonore)
러시아어 마리야 파블로브나
(Мари́я Па́вловна)
출생 1854년 5월 14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루트비히슬루스트
사망 1920년 9월 6일 (향년 66세)
프랑스 콩트렉세빌
배우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4년 결혼/1909년 사망)
자녀 알렉산드르, 키릴[1], 보리스, 안드레이, 옐레나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어머니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공녀
형제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파울 프리드리히, 니콜라우스, 요한 알브레히트, 알렉산더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2.3. 니콜라이 2세 일가와의 갈등2.4. 말년
3. 가족관계
3.1.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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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아내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엘레니의 어머니이다.

덴마크의 왕비 알렉산드리네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체칠리에의 큰고모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54년 5월 14일 루트비히스루스트 궁전에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공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1862년 어머니 아우구스타 대공비가 사망했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두 번의 재혼을 하면서 계모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공녀[2]의 손에 자랐다.

2.2. 결혼

1874년 8월 16일, 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다.[3]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루터교를 믿고 있었던 마리는 정교회로 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시어머니가 될 마리야 황후는 마리의 개종 거부를 반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비정통파 여성과 결혼하도록 허용했고, 결국 마리는 '마리야 파블로브나'로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 채 결혼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네바 강의 궁전 제방에 위치한 블라디미르 궁전에서 살기 시작했다.

2.3. 니콜라이 2세 일가와의 갈등

그렇게 러시아의 대공비가 된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러시아 궁정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했다. 마리야는 알렉산드르 3세보다 자신의 남편 블라디미르 대공이 훨씬 나은 황제가 될 거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로, 황위에 대한 야심이 매우 커서 조카며느리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4]조차 그녀를 두려워하며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렇다보니 시조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일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계승법에 따르면 니콜라이 2세의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21세가 되기 전에 니콜라이가 죽으면 마리야의 장남 키릴 대공이 섭정이 될 거라 예상됐지만[5], 니콜라이 2세는 현행법에 따라 자신의 장녀이자 알렉세이의 큰누나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섭정으로 지명했고 후견인도 자신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황후로 지명했다. 이 처사에 마리야는 화가 났지만 니콜라이 2세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6]

2.4. 말년

1908년 마리야는 정교회로 개종했다.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의 딸인 메리엘 뷰캐넌은 "지난 얼마 동안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러일전쟁 중 부상을 입은 아들 키릴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성모께 부탁했고, 키릴이 무사히 탈출한 것을 보고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언급했다. 1년 후 남편 블라디미르 대공이 사망하자 마리야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남은 생애 동안 상복을 입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마리야는 러시아를 진심으로 지지했다.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고민에 빠졌는데, "내 마음과 내 정신 속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회상하면서 러시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 후 마리야는 키슬로보츠크로 떠났다. 1920년 2월에 그녀는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행 배를 타고 러시아를 떠났고, 베네치아에서 프랑스로 떠나 콩트렉세빌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떠났다. 1920년 8월 6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콩트렉세빌에 있는 사도와 동등한 막달라 마리아와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기 위해 교회 무덤에 묻혔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알렉산드르 블리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Vladimirovich)
1875년 8월 31일 1877년 3월 16일
2남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Kirill Vlaimirovich)
1876년 10월 12일 1938년 10월 12일 작센코부르크의 빅토리아 멜리타 공녀
슬하 1남 2녀[7]
3남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Boris Vladimirovich)
1877년 11월 24일 1943년 11월 9일 지나이다 세르게이예브나 라셰프스카야
슬하 1남
4남 안드레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Grand Duke Andrew Vladimirovich)
1879년 5월 14일 1956년 10월 30일 마틸다 마리아 크셰신스카
슬하 1남
1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엘레니
(Elena, Princess Nicholas of Greece and Denmark)
1882년 1월 29일 1957년 3월 13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
슬하 3녀[8]

4. 여담


[1] 빅토리아 멜리타의 두번째 남편이다.[2] 빌헬미나 여왕의 국서 헨드릭 공의 어머니이다.[3]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의 할아버지 파울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촌이었다. 블라디미르와 마리는 7촌 관계인 셈이다.[4] 시조카 니콜라이 2세의 아내.[5] 니콜라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평민 여성 나탈리야 브라소바랑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6] 심지어 1916년에 마리야는 조카손녀 올가 여대공과 자신의 차남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결혼을 주선하려고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18살 연하의 순수하고 상큼한 소녀"가 "잘 사용하고 반쯤 지쳤으며 뻔뻔한 청년"과 결혼하게 할 수 없다며 단번에 거절했고 마리야도 알렉산드라 황후의 갑작스러운 거절에 격분했다.[7]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비 키라,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8] 유고슬라비아 왕국 파블레 왕자비 올가,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 등.[9] 그 이유는 마리와 다우마 모두 외향적인 성격으로 러시아 궁정에 잘 적응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알릭스는 정반대로 내향적인 성격에 가족들과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해서 러시아 황실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