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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6대 샤한샤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 محمدعلی شاه قاجار | |
<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 محمدعلی شاه قاجار |
출생 | 1872년 6월 21일 |
카자르 왕조 타브리즈 | |
사망 | 1925년 4월 5일 (향년 52세) |
이탈리아 왕국 산 레모[1] | |
재위 기간 | 카자르 왕조 샤한샤 |
1907년 1월 3일 ~ 1909년 7월 16일 (2년 6개월) | |
전임자 |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 |
후임자 | 아흐마드 샤 카자르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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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6대 샤한샤.2. 통치
모자파르 앗딘 샤가 황제의 권한을 일부 의회에 양도하고 헌법 제정을 통해 제한적인 테두리 내에서 언론, 집회, 결사, 자유, 생명, 재산권을 보장했다지만 그의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는 이걸 그대로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즉위식에도 단 한 명의 입헌파도 초대하지 않을 정도였다. 모자파르 앗딘 샤 사후 즉위한 새 황제 모하마드 알리 샤는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헌법을 폐지하려 시도했다. 그는 1908년 6월 의회 건물을 폭격했고 12월에 국회의원들을 체포했으며 국회를 폐쇄했다. 하지만 샤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땅바닥으로 떨어진 채 오래였다. 의원들은 이스파한, 타브리즈 등에서 재결집해 민중군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격했다. 1909년 7월 민중군이 샤를 폐위시키고 헌정 질서를 재건했다.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의회 세력은 본격적인 입헌군주정 도입을 하려 시도했다. 의회는 1909년 7월 16일 모하마드 알리 샤의 아들 아흐마드 샤 카자르를 새 샤한샤로 올리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의회 세력은 곧 심각한 난관에 부닥쳤는데, 입헌 혁명과 내전이 페르시아의 국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무역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망친 모하마드 알리 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황좌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입헌파의 모든 희망은 영국과 러시아가 대놓고 페르시아에 개입하며 허무하게 날라갔다. 영국은 페르시아 남쪽을, 러시아는 페르시아 북쪽을 영유권으로 삼고 중간에 완충지대를 두는 안에 양국이 합의해버린 것이었다.[2] 카자르 왕조는 이 합의로 인해 나라가 여러 조각 나버렸고, 거의 반쯤 무정부 상태가 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했다.
나이 어린 아흐마드 샤가 제위에 앉아 있었기에 왕실 최고 어른 아조드 알 물크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근대화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미국인 자문가 '모건 슈스터'를 재무부 장관으로 영입하는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모건 슈스터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 러시아의 영향권이 미치는 지방에 세리를 파견하자 러시아가 발끈했고, 결국 러시아와 영국이 힘을 합쳐 슈스터를 파면하라는 압력을 넣자 아흐마드 샤는 그대로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슈스터 사건을 빌미로 타브리즈에 군대를 파견해 의회를 닫아걸었으며 주요 입헌파 인물들을 숙청했다. 1914년 6월에 이르자 러시아 군대는 거의 페르시아 북부 일대는 자신의 영토로 삼다시피 했고, 영국도 이에 질세라 남쪽의 부족들에게 독자적으로 충성 맹세를 받는 등 페르시아를 사분오열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페르시아는 여러 열강들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것이다.
페르시아 황제 자리에서 쫒겨난 이후의 모하마드 알리 샤의 모습.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하마드 알리 샤는 국외에서 꾸준히 복귀를 시도했다. 일단 러시아 제국의 오데사로 대피한 모하마드 알리 샤는 1911년 아스트라바드에 외세에게 빌린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지만 패배했다. 쓸쓸히 도망쳐나온 모하마드 알리 샤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가 1920년 이스탄불, 결국 이탈리아의 산 레모로 들어갔다. 이후 모하마드 알리 샤는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다가 1925년 4월 25일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죽었다.[3] 그나마 1925년 12월에 카자르 왕조가 공식적으로 팔라비 왕조에게 망하는 모습은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