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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쿠티 Pachacuti | |
경제 중심 | 팽창주의 | |
특유 능력 | |
땅을 흔드는 자 (Earth Shaker) | |
특유 안건 | |
산왕 (Mountain King) | |
1. 개요
파차쿠티
침략으로부터 쿠스코 왕국을 지켜낸 파차쿠티는 1438년경 왕위에 올랐으며 곧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력과 정치력을 겸비한 파차쿠티는 힘으로 정복할 수 없는 국가에는 선물을 보내며 충성심의 대가로 자치와 번영을 약속했습니다. 잉카 제국은 그의 사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약 60년 만에 멸망했지만, 파차쿠티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침략으로부터 쿠스코 왕국을 지켜낸 파차쿠티는 1438년경 왕위에 올랐으며 곧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력과 정치력을 겸비한 파차쿠티는 힘으로 정복할 수 없는 국가에는 선물을 보내며 충성심의 대가로 자치와 번영을 약속했습니다. 잉카 제국은 그의 사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약 60년 만에 멸망했지만, 파차쿠티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 역사적 배경 [ 펼치기 · 접기 ]
- > 파차쿠티의 이야기는 유럽인이 신대륙에 도착하기 전(세계 반대편의 일부 노르드 모험가 제외)에 시작하고 끝납니다. 그의 이야기는 탈식민주의 저항의 이야기가 아니라 안데스 고원의 지배와 헤게모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펼쳐진 무대는 나중에 스페인이 발견하게 됩니다.
쿠스코 왕국은 '유일한 왕' 사파 잉카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 왕가의 혈통은 태양의 직계 후손(인팁 츄린, intip churin)이었다고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세습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도전과 정복으로 잉카, 즉 왕을 결정했으며, 파차쿠티의 경우 영리함과 행운으로 잉카가 되었습니다.
쿠시 유판키라는 이름을 가진 파차쿠티는 이전 잉카인 비라코차 잉카의 여러 아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비라코차는 세계의 절반을 정복하겠노라 주장하며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친, 자부심 넘치는 황제였습니다. 당연히 그 세계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반대했고 그러한 이들 중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또 다른 집단인 창카족 같은 일부 집단은 정복이 시작되기 전에 이 태양의 후손의 빛을 꺼뜨리기로 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포기한 비라코차는 차기 잉카의 후계자로 인정받던 사랑하는 아들 우르코 잉카와 함께 수도를 떠났습니다. 쿠시 유판키만이 침략자들을 막기 위해 남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쿠시 유판키의 방어가 너무 훌륭해서 바위들이 일어나 함께 싸웠다고 하는데, 시적인 우화처럼 들리지만 잉카의 종교는 산과 바위를 형상화한 대지의 존재인 티라쿠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침략자들이 쓰러지자 쿠시 유판키는 아버지가 발을 닦을 수 있도록 포로들을 아버지에게 바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인 비라코차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비라코차는 큰아들 우르코가 차기 잉카의 왕이 되어 제물을 바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심한 언쟁이 벌어졌고 비라코차는 너무 기분이 상한 나머지 쿠시 유판키를 암살하려 했습니다. 이 음모는 실패했고 비라코차는 수도에서 쫓겨났으며 쿠시 유판키는 파차쿠티가 되었습니다.
파차쿠티의 뜻은 '세계의 개혁자'이지만 '대격변' 또는 '땅을 흔드는 자'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파차쿠티의 확장에는 쿠스코를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 다른 곳과 확실히 구별이 되는 도시로 요새화하는 것, 각 사회 계급에 따른 구역을 마련하는 것, 도로 체계를 정비하는 것, 그리고 후대 잉카 선택에 중요하게 작용할 잘 정의된 사제 계급을 갖추는 것이 있었습니다. 파차쿠티 치하에서 쿠스코는 제국다운 제국이 되었습니다. 이 통치 체제는 지배자의 신성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잉카 통치자는 신성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가족끼리 결혼하고는 했습니다.
쿠스코 외부에서 잉카 제국은 제국의 스타일에 잘 맞는 방식으로 예술 스타일과 문화 요소를 가져와 서로 이질적인 집단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파차쿠티 치세의 인상적인 건축물에는 파차쿠티의 사유지였을 마추픽추와 쿠스코에 있는 태양의 사원 등이 있습니다. 새 공동체에서는 적극적으로 정착민을 보냈고, 이러한 정착지는 특정 집단이 특정 구역에 거주하는 방식의 뚜렷한 카스트 제도와 비슷한 제도를 따랐습니다. 파차쿠티는 일련의 종교적 찬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파차쿠티는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임종을 평화롭게 맞이한 지도자는 역사상 보기 드뭅니다. 파차쿠티는 오늘날 잉카 제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확정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페인과 마주친 불운한 통치자들 및 그들과 싸운 반란군을 포함한 케추아 지도자들에게 영웅이자 영감이 되었습니다. 파차쿠티가 없었다면 안데스 산맥은 더 다양해 보였겠지만, 안데스 문명의 위대함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