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봉래(鳳來) / 우초(愚樵)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80년[2] 10월 3일 |
경상도 문경현 가북면 완장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 |
사망 | 1966년 11월 8일[3] |
경상북도 문경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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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순호는 1880년 10월 3일 경상도 문경현 가북면 완장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아버지 민치일(閔致一)과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 蔡氏)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896년 1월 11일 이강년 의병장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 재산을 군자금으로 삼고 의병을 모았다. 이어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순검 이치윤(李治允)·김인담(金仁覃)을 생포하고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죄상을 치죄하고 농암시장(籠岩市場)에서 목을 베어 효수했다. 그 후 마성면 마고성에서 관군과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했다.
한편 제천 의진의 안승우 등이 연합 의진을 계획하고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사방의 의병을 불러모으자, 이강년은 이에 호응하여 의진을 이끌고 가서 유인석의 휘하에 들어가 돌격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민순호는 종사가 되어 서상렬 의병장의 부대와 합세해 조령에서 적군과 교전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제천의진의 주요 의병장 대부분이 전사하자 제천 의진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민순호 등과 함께 단양 산중으로 피신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그는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다시 일으켜 원주, 연풍, 영주, 강릉, 봉화, 충주, 안동, 문경 등 14개 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7년 7월엔 제천에서 일본군 500명과 맞붙어 격퇴하기도 했다. 이강년은 이 공로로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칙명을 받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되고, 민순호는 후군소모장(後軍召募將)으로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을 살상했다.
그러나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는 중군장(中軍將) 김상태(金尙台)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간 대일 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 가옥과 가재를 소각당하고 가족이 핍박받았다. 이후 김상태마저 종사 우중수(禹中守)의 밀고로 체포당한 뒤 1912년 옥중에서 단식한 끝에 사망하자, 그는 고향에 은거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8.15 광복 후 문경에서 추진된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 간행 사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66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민순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