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밀턴 허시 Milton Snavely Hershey | |
출생 | 1857년 9월 13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 도핀 카운티 | |
사망 | 1945년 10월 13일 (향년 88세) |
미국 펜실베이니아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기업인 |
창립 기업 | 허쉬 |
부모 | 아버지 헨리 허시 어머니 파니 스나벨리 허시 |
형제자매 | 여동생 세리나 허시[1] |
배우자 | 캐서린 스위니 (1898년 결혼 / 1915년 사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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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기업인. 초콜릿 제조회사 허쉬의 창업자.[3]2. 생애
창립자 밀턴 스네이블리 허시는 메노나이트[4] 분파 출신 기독교 계열 신자라서 당시 자본가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인 인물로,[5] 자사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에게 전기와 온수가 펑펑 나오는 집도 주고, 극장이나 경기장 같은 여가 시설도 충분히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대공황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리 해고는 최대한 피하려 했고 임금도 인상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허쉬는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지상 낙원이라고 여겨졌다고. 게다가 원래부터 향토 기업가였기 때문에 생전에 그의 공장이 있던 마을에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생겼다.하지만 밀턴 허시도 자본가였기에 노조를 불허했고, 결국 임기 말년에 회사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기도 했다. 그래도 밀턴 허시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용역을 동원해서 다 때려잡던 다른 기업가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폭력만은 엄격히 반대해서 어떻게든 협상으로 원만하게 해결을 보려 했지만,[6] 문제는 허시가 너무 잘 해주니까 노조가 허시를 만만하게 본 건지, 무리한 요구 조건을 내세우면서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해서 협상은 평행선을 달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진척이 없다 보니 노조원들 중에서도 원래 파업에 참여할 의사가 별로 없었던 온건파 노조원들이 지쳐버렸고, 허쉬에 우유를 공급하던 농민들도 파업 때문에 거래가 중단되어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거기다가 노조가 공장부지 내에 있는 국기대에 계양되어있던 성조기를 내리고 노조 깃발을 내걸어서 전역군인회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고, 결국 이 문제의 노조는 파업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던 온건파 노조원들 + 장기간의 거래 중단으로 빡친 농민들 + 노조가 국기를 훼손해서 빡돈 전역군인회로 이루어진 연합군에게 공격받아 강제 해산되어 버린다.
비록 밀턴 허시 본인은 절대로 원하지 않았고 본인이 사주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 폭력 사태에 큰 죄책감을 느꼈던 밀튼은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만다. 그래도 별세하기 몇 년 전인 1940년에는 허쉬에 공식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을 보고 축하해 줬다. 다행히 이 사건 이후에도 허쉬의 복지 수준은 달라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사회복지 사업 참여에도 적극적이다. 그리고 밀턴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어도 부지런히 자선 활동을 계속했다. 밀턴 허시는 자녀가 없었기에 재산의 대부분을 자신의 이름을 딴 학교의 신탁 기금인 Milton Hershey School Trust에 기부했다. 그리고 아예 신탁 회사를 세워서 학교와 기업 양자를 다 관리하게 했다. 실제로 펜실베이니아에는 은근히 허시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엄청나게 많은데, 거의 대부분이 다 밀턴 허시가 관여한 것이다.
허쉬 문서에 나온 Milton Hershey School은 자녀가 없었던 허시 부부가 1909년에 고아원 겸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처음에 세워진 부지는 허쉬가 자랐던 농장의 부지라고 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2천 명 정도의 재학생이 다니는 매우 거대한 규모의 기숙학교로 사회적,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 위주로 운영하고 있는 학교다. 대공황 때 고아가 된 소년이 이 학교 겸 고아원에서 교육받고 자라서 허쉬에 입사하여 이후 CEO가 된 훈훈한 사례도 있다. 그리고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학교다 보니 당연히 학비는 없다. 게다가 위에 써놨듯이 실질적으로 이 학교의 최대 주주는 허쉬기 때문에 자금력도 엄청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군에 초콜릿바를 공급했다.[7] 이에 대한 공로로 5개의 육군-해군 생산상을 수상했다. 또한 허쉬 기계 공장은 탱크와 기계의 부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밀턴 허쉬는 1945년 10월 13일 폐렴으로 인해 88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사망했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열려 수천명의 사람들이 참가해서 애도했다.#
3. 기타
1912년에 영국에서 일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일정이 앞당겨져 원래 타기로 했던 배가 아닌 다른 배를 타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원래 타기로 했던 배가 타이타닉호였다는 것. 지금도 허쉬 박물관에는 당시 타이타닉호의 표가 전시되어 있다.[1] 1862.04.12.~1867.03.31.[2] 1872.~1915.03.25.[3] 기업명은 '허쉬'지만 이 문서의 인명은 외래어표기법을 따라 '허시'로 쓴다.[4] 기독교의 분파들 중 재세례파의 분파로, 재세례파의 비폭력주의는 따르되, 현대 문명을 거부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온건파 부류이다. 현대 문명조차 거부하는 재세례파가 아미시.[5] 독과점과 협박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자본을 쓸어담으며 가혹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용역을 동원해 폭행, 살해하는 등의 막장 행각으로 이 당시 자본가들은 강도 귀족으로 명명되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생각하면 정말 흔치 않은 인물. 이 때문인지 당대에 트러스트로 유명했던 자본가들로 꼽힌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하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6] 이런 성품 때문인지 밀턴 허시는 러들로 학살을 매우 강렬하게 비판했다.[7]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비상시의 전투식량용이므로 잘 녹지 않으며 최대한 맛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맛있으면 미리 다 까먹어 버리니까...그래서 카카오 함유량을 높이고 오트밀을 섞었는데, 이를 의뢰한 육군 군수사령부에서는 빨랫비누 맛이라며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군인들이 본국의 가족들에게 사제 허쉬 좀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들이 싸제를 찾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래도 수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유럽에선 이 맛없는 군용 허시 초콜렛도 감지덕지였다고 한다. 6.25때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