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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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바밧 타나 자위》 장식 필사본 | 1917년판(1937년 인쇄) 인쇄본 첫 페이지 |
《바밧 타나 자위》(Babad Tanah Jawi, ꦧꦧꦢ꧀ꦠꦤꦃꦗꦮꦶ)는 자바섬의 역사(주로 중부·동부의 자바어권)를 기록한 자바어 연대기로, 자바어 명칭은 '자위(자바) 땅의 연대기'라는 뜻이다. 오늘날 자바의 근세사를 다룰 때 단연 가장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는 문헌이다. 18세기에 작성되었으며, 자바 중부·동부의 역사를 왕조사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가장 긴 판본에서 서술 범위는 아담부터 1745년까지로, 2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동안 자바의 연대기를 따라가다가 근세 마타람 왕가의 연대기로 귀결된다.[1]
인도와 자바의 연대기 전통이 오랫동안 그러해 온 바에 따라, 특히 고대사를 다룸에 있어 초자연 현상이나 기적적인 사건, 기이한 설화들도 역사적 사건과 함께 삽입되어 있으므로 실제 역사 연구를 위해 활용할 때는 비판적 독해가 필수적이다. 설화적 서술의 예로 이하에 소개하는 '9인의 왈리'들의 행적이 있다. 그 외에도 《바밧 타나 자위》에는 마타람의 초대 군주 파늠바한 세나파티와 그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남해의 여신 냐이 라라 키둘(Nyai Rara Kidul)에 얽힌 설화도 적혀 있다.
마자파힛 제국 이전에 관한 내용은 정확성이 낮으며, 마자파힛의 연대기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파라라톤》[2], 《나가라크르타가마》나 비문들로 교차 검증되는 바와 다른 부정확한 내용이 많다. 당대 문헌으로 당대에 구할 수 있는 자바의 사료를 최대한 참고하여 서술한 서적이므로 특히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서술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2. 판본
《바밧 타나 자위》는 크게 다음 두 가지 판본으로 나뉜다.- (1) 18세기 전반 파쿠부워노 1세(재위 1705–1719), 아망쿠랏 4세(재위 1719–1726), 파쿠부워노 2세(재위 1726–1749) 시대에 걸쳐 서기관(carik) 아딜랑우 2세(Adilangu II)가 1722년부터 저술한 판본(이하 제1본).
- (2) 18세기 후반 파쿠부워노 3세(재위 1749–1788)의 명으로 서기관 티르타위구나(Tumenggung Tirtawiguna)가 1788년에 완성한 판본(이하 제2본).
제1본과 제2본의 차이는 고대사 및 중세사 서술의 관점에 있다. 제1본은 이슬람 이전 시대의 역사에 관해 상세하게 설화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제2본은 보다 건조하게 서술을 줄이고 왕조의 계보를 강조하는 편이다. 이슬람화 이후 근세사는 양 판본이 대동소이하다.
자바어 전통 문학 양식으로서 연대기나 기행문을 서술하는 데 사용한 '바밧'은 기본적으로 운문이지만, 19세기부터 산문으로 재정리된 판본이 나왔다. 현대 판본은 산문으로 재편집된 것들이 널리 읽히고 있다.
3. 《바밧 타나 자위》에 실린 자바 문화권 군주 목록
고대 및 중세사의 경우 자바의 다른 연대기나 비문에서는 《바밧 타나 자위》와 다른 재위 기간이나 이름을 가진 군주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바밧 타나 자위》 기준 왕사 외에 신뢰성 높은 왕사를 별도 기재한다. 마자파힛의 말기 역사에 관해서도 《바밧 타나 자위》에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마자파힛 말기사는 다른 문헌을 참고해야 알 수 있다. 이슬람화 이후 드막 시대부터는 믿을 만하다.《바밧 타나 자위》에는 자바 서부 순다 왕국의 군주나 군주 계보도 일부 실려 있지만 이하에서는 생략한다. 생몰년은 불확실한 경우가 많으므로 따로 기재하지 않는다.
3.1. 사일렌드라 왕조?
일부 《바밧 타나 자위》의 확장된 판본에는 이하의 카후리판 왕조 이전 사일렌드라 왕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근현대의 편집본인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고대 사일렌드라 왕조, 산자야 왕조, 이샤나 왕조의 역사는 자바 중·동부의 풍부한 비문 기록에 의존한다. 시마, 산자야, 라카이 파낭카란 등 고대의 유명 군주들은 《바밧 타나 자위》보다 오래된 《차리타 파라향안》(16세기 순다 연대기) 등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3.2. 카후리판 왕조
- 통일 카후리판 왕국
- 아이를랑가(Airlangga, 1019–1045): 원래 사일렌드라 방계인 발리의 와르마데와 왕조에 속함. 고대 자바 군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편이고 관련 기록도 풍부하다. 아이를랑가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은 당대의 풍부한 비문 기록과 후대 연대기들에 따르면 확실하다. 《바밧 타나 자위》에 따르면, 아이를랑가는 근타유(Resi Gentayu)라고도 불렸다.
- 연대기에 따르면, 아이를랑가 왕이 1045년에 서부의 크디리와 동부의 장갈라로 왕국을 나누어 두 왕자에게 각각 양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갈라는 그 이전 이미 독립 세력이었을 수 있다.
3.2.1. 실제 왕사
이하는 비문 기록 등으로 어느 정도 현대의 편집을 거쳐 실재하였음이 믿어지는 크디리 및 장갈라 왕들의 목록이다. 크디리 왕국의 실제 왕사는 불확실하기로 악명이 높으며, 장갈라 왕국의 왕사 역시 오늘날 크디리 왕사보다도 불확실하다. 크디리와 장갈라의 세부 왕사에 대한 신뢰도 높은 연대기도 오늘날 발견된 바 없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인도네시아 고고학은 활발한 분야이므로 비문과 연대기가 계속 발굴되면 이하의 왕사가 보다 구체화되거나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크디리[다하Daha, 판잘루Panjalu] 왕국
- 바메스와라(Sri Bameswara, 1112–1135): 판지 왕자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카메스와라'(Kameswara)라고도 하며, 이하 12세기 말의 카메스와라 왕과 혼동될 때도 있지만, 크디리와 장갈라의 대립과 통합은 일반적으로 12세기 전반과 중반의 일로 여겨진다. 카랑가얌 비문(Prasasti Karanggayam, 1112)부터 바메스와라 비문(Prasasti Bameswara, 1135)까지 10기의 서로 다른 비문에 등장한다.
- 자야바야(Jayabaya, Jayabhaya, 1135–1157~1159): 장갈라를 정복하여 자바 중·동부를 재통일하였다. 《바밧 타나 자위》에도 등장하는 등 실존 여부는 분명한 왕으로, 크디리 왕 중 가장 유명하다. '광기의 시대'(Jaman Edan)[3]를 끝내고 '번영의 시대'(Jaman Raharja), 즉 크디리의 전성기를 연 '공의의 군주'(ratu adil)의 본보기로 여겨진다. 응안탕 비문(Prasasti Ngantang, 1135), 탈란 비문(Prasasti Talan, 1136년 8월 24일), 즈푼 비문(Prasasti Jepun, 1144), 《카카윈 바라타유다》(Kakawin Bharatayuddha, 1157) 등에도 등장한다.
- 사르웨스와라(Sri Sarweswara, Sarweshwara, 1157~1159–1161?): 파들르간 제2비문(Prasasti Padelegan II, 1159년 9월 23일), 카휴난 비문(Prasasti Kahyunan, 1161년 2월 23일)에 등장한다. 사르웨스와라가 언제 퇴위했는지는 불확실하다.
- 아례스와라(Sri Aryeswara, ?–1171–?): 앙인 비문(Prasasti Angin, 1171년 3월 23일)에 등장한다.
- 간드라(Sri Gandra, ?–1181–1182?): 1181년 11월 19일 기록된 자링 비문(Prasasti Jaring) 등에 등장한다.
- 카메스와라(Kameswara, Kamesywara, 1182?–1194?): 스만딩 비문(Prasasti Semanding, 1182년 6월 17일) 등 여러 비문에 등장한다.
- 크르타자야(Kertajaya, 1194?–1222): 카물란 비문(Prasasti Kamulan, 1194년 8월 31일), 갈룽궁 비문(Prasasti Galunggung, 1194), 팔라 비문(Prasasti Palah, 1197), 비리 비문(Prasasti Biri, 1202), 라와단 비문(Prasasti Lawadan, 1205)에 등장한다. 《파라라톤》과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1222년 반란자 켄 아록에게 패배하여 크디리가 싱하사리[투마펠]에 복속되었다.
- 장갈라 왕국
- 마판지 가라사칸(Mapanji Garasakan, 1044?–1052): 투룬향 제2비문(Prasasti Turun Hyang II, 1044), 캄방푸티 비문(Prasasti Kambang Putih), 말릉아 비문(Prasasti Malenga, 1052)에 등장한다.
- 알란중 아혀스(Alanjung Ahyes, 1052–1059?): 반자란 비문(Prasasti Banjaran, 1052)에 등장한다.
- 사마롯사하(Samarotsaha, 1059?–?): 수믕카 비문(Prasasti Sumengka, 1059)에 등장한다. 이후 12세기 중반에 크디리에 통합될 때까지 장갈라의 실제 왕사는 미지의 영역이다.
- 싱하사리 산하 크디리 지역: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크르타자야 이후 크디리 영주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하술할 보다 이른 비문 기록과 상충하며, 자야캇왕의 실존을 제외하면 믿을 만하지 않다.
- 자야사바(Jayasaba, Jayasabha, 1222–1258):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켄 아록은 크르타자야의 아들 자야사바를 크디리(다하)의 영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말루룽물라 비문(Prasasti Malurung Mula, 1255)에 따르면 크르타자야 이후 크디리의 영주는 켄 아록의 아들 파라메스와라(Bhatara Parameswara)였다.
- 사스트라자야(Sastrajaya, 1258–1271):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차기 크디리 영주는 자야사바의 아들 사스트라자야였다.
- 자야캇왕(Jayakatwang, 1271–1293):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차기 크디리 영주는 사스트라자야의 아들 자야캇왕이었다. 계보는 다소 아리송하지만 '자야캇왕'이라는 인물의 실존 자체는 확실하며, 또한 잘 알려진 것처럼, 자야캇왕은 크르타나가라 왕의 싱하사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야캇왕이 '크디리' 지역의 영주였는지는 다소 논란이 있는데, 프낭궁안 비문(Prasasti Penanggungan, 1296)에 자야캇왕은 글랑글랑(Gelang-gelang)의 영주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야캇왕이 크디리, 글랑글랑 두 지역 모두를 지배했을 수도 있다.
- 기타
- 자야와르사(Sri Jayawarsa, Sri Jayawarsa Digjaya Sasastraprabhu, 12세기 후반–13세기 초): 므루왁 비문(Prasasti Mruwak, 1186), 파모토 제2비문(Prasasti Pamotoh II, 1198), 시라크팅 비문(Prasasti Sirah Keting, 1204) 등에 등장하는, 오늘날 자바 동부 마디운(Madiun)과 포노로고(Ponorogo) 지역을 지배한 유명한 왕이다. 크디리 산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고문헌에서 워낙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관계로 별도로 기재해 둔다.
3.2.2. 《바밧 타나 자위》 기준
- 크디리 왕국
- 근드라야나(Prabu Gendrayana)
- 자야푸루사(Prabu Jayapurusa)
- 사리와하나(Prabu Sariwahana)
- 아지 자야바야(Prabu Batara Aji Jayabaya)
- 자야 아미자야(Prabu Jaya Amijaya)
- 자야 아미스나(Prabu Jaya Amisena)
- 아지 파마사(Prabu Aji Pamasa)
- 픙깅(Pengging) 왕국
- 판차드리야(Prabu Pancadriya)
- 앙링드리야(Prabu Anglingdriya)
- 다르마마야(Prabu Darmamaya)
- 장갈라 왕국
- 름부 아밀루후르(Lembu Amiluhur)
- 판지(Raden Panji)
- 쿠다 랄르얀(Kuda Laleyan)
- 반자란사리(Prabu Banjaransari)
- 문딩사리(Prabu Mundingsari)
- 파므카스(Prabu Sri Pamekas)
3.3. 라자사 왕조
싱하사리와 마자파힛 시대에 관해서는 《파라라톤》, 《나가라크르타가마》 등 서적과 다수의 비문 등 교차 검증할 자료가 많다.3.3.1. 실제 왕사
- 싱하사리[투마펠] 왕국
- 켄 아록(Ken Arok, 1222–1227): 《파라라톤》에 따르면 농부의 아들로, 이전의 왕조나 귀족 가문과는 계보상 거의 무관하다.
- 아누사파티(Anusapati, 1227–1248)
- 토자야(Tohjaya, 1248)
- 위스누와르다나(Wisnuwardhana, 1248–1254): 비문 기록 등에 따르면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일부 문헌에서는 재위 기간을 1248–1268년으로 본다.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따르면, 위스누와르다나 왕은 1254년 아들 크르타나가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1270년에 죽었다.
- 크르타나가라(Kertanagara, 1254–1292): 다른 일부 문헌에서는 재위 기간을 1268–1292년으로 본다.
- 마자파힛 제국
- 라덴 위자야(Raden Wijaya, Kertarajasa Jayawardhana, 1293–1309)
- 자야나가라(Sri Jayanagara, 1309–1328)
- (女)트리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Tribhuwana Wijayatunggadewi, 1328–1350)
- 하얌 우룩(Hayam Wuruk, Sri Rajasanagara, 1350–1389)
- 위크라마와르다나(Wikramawardhana, 1389–1429)
- (女)수히타(Suhita, Dyah Ayu Kencana Wungu, 1429–1447)
- 브라위자야 1세(Kertawijaya, Brawijaya I, 1447–1451)
- 브라위자야 2세(Rajasawardhana, Brawijaya II, 1451–1453)
- 공위(1453–1456)
- 브라위자야 3세(Girishawardhana, Brawijaya III, 1456–1466)
- 브라위자야 4세(Singhawikramawardhana, Brawijaya IV, 1466–1468[4]–1474)
- 브라위자야 5세(Girindrawardhana Dyah Wijayakarana, Bhre Kertabumi, Brawijaya V, 1468–1478)
- 기린드라와르다나 댜 라나위자야(Girindrawardhana Dyah Ranawijaya, Brawijaya VI?[5], 1474–1478–?)
3.3.2. 《바밧 타나 자위》 기준
《바밧 타나 자위》도 마자파힛의 경우는 《파라라톤》, 《나가라크르타가마》, 《군도 지역 제왕들의 서》(Pustaka Rajyarajya i Bhumi Nusantara, 17세기 치르본 연대기) 및 각종 비문과 교차 검증이 가능할 정도가 되지만, 싱하사리 등은 자세히 등장하지 않는다. 이하에 등장하는 왕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어떤 인물에 대응하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다.- 마자파힛 제국
- 스수루(Raden Sesuruh, Jaka Sesuruh): 《바밧 타나 자위》에 따르면 순다(파자자란)의 왕자 출신이다. 일반적으로 라덴 위자야(Raden Wijaya)와 동일시되지만, 《바밧 타나 자위》에 실린 세부 행적은 믿을 만하지 않다.
- 아놈(Raden Anom)
- 아다닝쿵(Raden Adaningkung)
- 하얌 우룩(Raden Hayam Wuruk)
- 름부 아미사니(Raden Lembu Amisani)
- 브라탄중(Raden Bratanjung)
- 브라위자야(Prabu Brawijaya, Raden Alit)
3.4. 드막 술탄국
이하의 근세사부터는 교차 검증할 사료가 많다.- 라덴 파타(Raden Patah, 1478–1518)
- 파티 우누스(Pati Unus, 1518–1521)
- 술탄 트릉가나(Sultan Terenggana, 1521–1546)
- 수난 프라와타(Sunan Prawata, 1546–1547)
- 아랴 프낭상(Arya Penangsang, 1547–1554): 1554년 하디위자야–키 아긍 파마나한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암살당함. 드막 붕괴.
3.5. 파장 왕국
- 술탄 하디위자야(Jaka Tingkir, Sultan Hadiwijaya, 1568–1582)
- 술탄 응아완티푸라(Arya Pangiri, Sultan Ngawantipura, 1583–1586)
- 프라부위자야(Pangeran Benawa, Prabuwijaya, 1586–1587): 1587년 프라부위자야가 퇴위하고 마타람에 종속됨.
3.6. 마타람 술탄국
- [키 아긍 파마나한(Ki Ageng Pamanahan, 파장 산하 마타람 영주 1556–1575)]: 키 아긍 파마나한이 통치하는 마타람은 독립 세력이 아니었으나 마타람 왕계를 서술할 때는 반드시 함께 서술되는 인물로, 마타람의 초대 군주 파늠바한 세나파티의 친아버지이다. 《바밧 타나 자위》에는 파마나한이 키 아긍 에니스(Ki Ageng Énis)의 아들이자 키 아긍 셀라(Ki Ageng Séla)의 손자라고 적혀 있다. 키 아긍 셀라는 파장 군주 하디위자야의 스승이었으며, 마자파힛 제국 황제 브라위자야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 다만, 계보에 대한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 완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 파늠바한 세나파티(Raden Sutawijaya, Panembahan Sénapati, 마타람 영주 1575–1587, 마타람 국왕[파늠바한] 1587–1601)
- 파늠바한 하냐크라와티(Panembahan Hanyakrawati, 1601–1613)
- [마르타푸라 공(Adipati Martapura, 1613)]: 단 하루만 집권하여 정식 군주로 인정되지 않음
- 술탄 아궁 하냐크라쿠수마(Sultan Agung Adi Prabu Hanyakrakusuma, 1613–1645)
- 수수후난 아망쿠랏 1세(Amangkurat I, 1645–1677)
- 수수후난 아망쿠랏 2세(Amangkurat II, 1677–1703)
- 수수후난 아망쿠랏 3세(Amangkurat III, 1703–1705)
- 수수후난 파쿠부워노[파쿠부와나] 1세(Pakubuwana I, 1705–1719)
- 수수후난 아망쿠랏 4세(Amangkurat IV, 1719–1726)
-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2세(Pakubuwana II, 1726–1749)
-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3세(Pakubuwana III, 1749–1788): 1755년 기얀티 조약으로 욕야카르타 술탄국이 분리됨
4. 9인의 왈리
《바밧 타나 자위》의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자바의 이슬람 성인(wali)인 '9인의 왈리'(Wali Sanga) 각각의 명칭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각지에서 여러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감화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전해지며, 상당수는 자바 각지에서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오늘날 순니 근본주의 살라피야가 성인 숭배를 반대하기는 하지만, 성인을 공경하는 문화는 이슬람이 퍼진 각 지방마다 널리 퍼져 있었으며, 특히 인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에서는 지역별로 다양한 성인 전승이 존재한다. '9인의 왈리' 전승은 자바에서 아주 유명하고 여러 문헌과 민담에서 언급되어 왔지만, 구체적인 9인의 왈리 목록은 유명한 몇몇을 제외하면 출전마다 조금씩 다르다. 《바밧 타나 자위》 기준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수난 암펠(Sunan Ampel, Sunan Ngampel-Denta)
- 수난 쿠두스(Sunan Kudus)
- 수난 무랴(Sunan Murya)
- 수난 보낭(Sunan Bonang)
- 수난 기리(Sunan Giri)
- 수난 칼리자가(Sunan Kalijaga)
- 수난 시티즈나르(Sunan Sitijenar)
- 수난 구눙자티(Sunan Gunungjati)
- 수난 왈릴라낭(Sunan Walilanang)
5. 읽어 보기
《바밧 타나 자위》는 작성된 지 100년이 지나 저작권 보호 시기가 만료된 퍼블릭 도메인이다. 특히 1917년 스마랑에서 나온 라덴 판지 조요수브로토(Raden Pandji Djojosubroto)가 편집하여 출판한 판본은 위키미디어에 1937년 인쇄본이 pdf 문서로 올라와 있으며, 자바어가 가능하다면 자유롭게 접근해 읽을 수 있다.인도네시아어 번역본도 있으며,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학술어는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어이므로 인도네시아 역사학계의 관련 연구를 알고 싶다면 인도네시아어로 2차 문헌을 읽어야 한다. 영미권 미국, 호주, 영국 등지에서도 인도네시아사 연구가 활발한 편이므로 영어로 된 관련 논문도 다수 있다.
[1] J. J. Ras, "The Genesis of the Babad Tanah Jawi: Origin and Function of the Javanese Court Chronicle," Bijdragen tot de Taal-, Land en Volkenkunde 143 no.2/3 (1987): 343-356.[2] 싱하사리 왕국 초대 군주 켄 아록의 상세한 전기와 싱하사리, 마자파힛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헌으로, 16세기 초부터 16세기 말에 걸쳐 작성되었다.[3] 19세기의 작품 《칼라티다》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개념으로, 자바 세계관의 혼세를 뜻한다. 20세기에도 독재 시대에 간혹 다시 수면 위로 등장하였다.[4] 마자파힛 분열[5] 토메 피르스의 《동방지》에 따르면 라나위자야가 '브라위자야'를 칭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