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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27 12:29:17

나가라크르타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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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남아시아의 전근대 사료3. 저자4. 내용5. 발견과 영향6. 출판과 번역의 역사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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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Nagarakertagama.jpg
《나가라크르타가마》 일부가 적힌 패엽 필사본

《나가라크르타가마》(Kakawin Nagarakretagama[Nagarakṛtāgama], ꦏꦏꦮꦶꦤ꧀ꦤꦴ ꦒꦫꦏꦽꦠꦴꦒꦩ, '성스러운 전통[종교]이 있는 나라') 또는 《데사와르나나》(Desawarnana[Deśavarṇana], '마을들[나라]의 기록')는 자바어로 쓰인 카카윈 양식의 서사적 송시로, 서력 1365년(샤카력 1287년)에 음푸 프라판차(Mpu Prapanca)가 작성하였다.

당대 마자파힛 제국의 황제 라자사나가라, 곧 하얌 우룩의 위업을 칭송하는 내용이 골격을 이루지만, 14세기에 작성된 서적으로서 최전성기 마자파힛 제국의 생활상, 의례, 제도, 마자파힛의 왕권과 군주의 역할, 마자파힛 수도의 웅장함, 당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자바의 역사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14~15세기 자바어 문헌 중 단연 가장 중요한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책의 원제는 '데사와르나나'였지만, 18세기(1740년) 필경사 아르타파마사(Arthapamasah)가 '나가라크르타가마'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보존성이 낮기로 악명이 높은 패엽으로 작성된 동남아시아 지역의 고대·중세 서적은 대부분 소실되었는데, 훌륭한 사료로 기능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성 높은 중세 문헌이 그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오랜 전란에 휘말렸으며 이슬람화로 이슬람화 이전 문헌에 대한 필사 전통도 약해진 자바 본토가 아니라 발리·롬복 등 고립된 외곽 지대의 문서고에서 필사를 통해 보존되었던 까닭에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온전할 수 있었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동남아시아의 전근대 사료

활발한 고문헌 필사 전통이 존재하였던 자바·팔렘방·발리·롬복·반자르·아체·조호르 등 도서부 동남아시아 주요 지역, 또는 필사 전통과 더불어 패엽이 아닌 제지술이 적어도 17세기 무렵부터 스리랑카 등의 영향으로 발달하였던[1]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16세기 이래의 근세 연대기는 비교적 흔하다. 16세기부터는 유럽인이 기록한 다양한 사료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14, 15세기나 그 이전의 서적으로 된 (중국 서적이 아닌) 현지 사료는 베트남을 제외한[2] 동남아시아 전체에서 매우 드물다.

마자파힛과 비교할 만한 동남아시아의 대세력 크메르 제국의 전성기에 작성된 패엽 문서 중에는 오늘날 남은 것이 없어, 이 지역의 고대·중세사 연구는 비문과 유물 연구, 사원의 부조, 당대 중국 여행자들의 기록, 그리고 몇 세기 뒤의 후대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태국 지역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대기 《차마데위왕사》(Cāmadevivaṃsa, 팔리어)는 1410년 전후에 작성된 문헌으로 《나가라크르타가마》보다 반세기 뒤의 것이다. 미얀마에는 각각 13세기 후반과 15세기 전반의 짧은 중세 연대기 2권이 남아 있다. 아체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말레이어 연대기로서 파사이 술탄국 초기를 다루는 《히카얏 라자라자 파사이》(Hikayat Raja-Raja Pasai)가 14세기 후반에 작성되었다. 이들 지역에서 서기 1500년 이전에 작성된 이런 사료들은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비하면 내용이 빈약한 편이다.

3. 저자

하얌 우룩 시대의 다른 시인들이나 다른 세기의 자바 시인은 여러 작품을 남긴 경우가 많지만, 《나가라크르타가마》의 저자 음푸 프라판차가 작성한 다른 작품은 오늘날 발견된 것이 없어 저자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다. 《나가라크르타가마》에 프라판차가 이전에 쓴 다른 작품 몇 편의 제목이 실려 있으며, 그는 1365년 이후에도 왕성히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으나, 원본이 없어 현재 다른 문헌들에 발췌 또는 요약되어 있는 일부로 내용을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다. 프라판차의 다른 작품들은 《나가라크르타가마》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아 보존과 필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가라크르타가마》 17:8에서 음푸 프라판차는 자신이 위대한 시인의 아들이며, 과거에 '다르마댝사 카소가탄'(dharmadhyakṣa kasogatan), 즉 불교도(sogata) 궁정 승려의 우두머리인 대승정(종교 대법관)이었다고 적고 있다. 음푸 프라판차가 불교도 승려였음은 거의 확실하지만, 자바 고문헌 전문가들 중 일부는 프라판차가 최고위직 대승정이었을 가능성에 회의적인 경우도 있다. 필명 '음푸 프라판차' 역시 의도적으로 사용한 가명이었는데, '프라판차'는 자바어로 '가명, 별명'이라는 뜻의 단어를 변형한 것이면서 5(panca)와 'pra'를 합성한 것이기도 한 자바어 언어 유희이기 때문이다. 권말에 프라판차의 신변에 대한 서술이 몇 장 실려 있는데, 프라판차는 황제에 의해 대승정 직에서 해임되어 '위나다'(Winada)로 이름을 바꾸고 궁정을 떠났다. 산속으로 들어간 위나다(음푸 프라판차)는 '카말라사나'(Kamalasana)라는 마을에 은거하면서 저술 활동을 했다고 한다. 권말에는 지방으로 내려가 유유자적하는 프라판차가 도시와 시골을 비교하며 쓴 감상도 볼 수 있다.

프라판차가 대승정이었다는 설을 받아들이는 인도네시아 역사학자 하디 시도물료(Hadi Sidomulyo)에 따르면, 필명 '음푸 프라판차'를 사용한 당대 인물의 실명은 '당 아차랴 나덴드라'(Dhang Acarya Nadendra)였으며, 1358년의 창구 비문(Prasasti Canggu)과 몇 년 후의 스카르 비문(Prasasti Sekar)에 따르면 이 인물은 '다르마댝사 링 카소가탄'(dharmadyaksa ring kasogatan) 즉 대승정 직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비문들에 따르면 나덴드라의 아버지 당 아차랴 카나카무니(Dhang Acarya Kanakamuni)도 전대 대승정이었다고 한다.

4. 내용

자바 전통의 카카윈 양식을 따른다. 8~24음절 분량의 행(baris)이 4개 모여 절(pada)을 이루며, 1~11개의 절이 모여 장(pupuh)을 이룬다. 《나가라크르타가마》는 전편(1~49장), 후편(50~98장)으로 나뉘어 총 98장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다.

책의 내용을 크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사에 집중하는 경우 《나가라크르타가마》에서는 마자파힛의 영토와 황가의 계보, 마자파힛의 통치 기구를 정리한 특정 부분만 부각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사실 학자들은 마자파힛의 의례와 자바 전통의 왕권 등을 다룬 다른 부분도 그에 못잖게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특히 수도 마자파힛과 황궁, 황제가 친히 참석하는 축제를 화려하게 묘사한 대목들은 상당한 장관이다.

불교도인 프라판차가 불교도 황태후(하얌 우룩의 할머니)를 칭송하는 부분이나, 세계의 안정을 위해 시바 신이 황제에게 환생했다고 적은 부분 등은 마자파힛 궁정의 복잡한 종교 간 구도를 드러내고 있다. 또 힌두 승려는 제국 속령 어디로든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지만, 불교 승려는 자바 동쪽의 섬들로만 여행할 수 있고 서쪽 지역으로의 선교 여행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국가가 두 종교를 어떻게 대우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정치사적으로도 마자파힛의 광대한 속령 외에, 15장에서 마자파힛의 우방으로 열거된 '샹카요댜푸라'(Syangkayodhyapura, 아유타야 왕국), '다르마나가리'(Dharmanagari, 아유타야 산하의 나콘시탐마랏), 참파, '캄보자'(Kamboja, 캄보디아) 등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5. 발견과 영향

19세기, 마자파힛 제국에 대한 정보는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 당시 자바 본토에 전해 내려오는 《바밧 타나 자위》, 《파라라톤》, 기타 여러 바밧 등 역사서가 있었지만, 이들 문헌은 마자파힛을 다룰 때 지리적으로 주로 자바에만 국한하였고, 또 이들은 대부분 근세, 즉 이슬람화의 과도기나 이슬람화 이후에 작성된 문헌이어서 중세에 대한 서술은 종종 간략하거나 신빙성이 낮았다. 자바 본토에는 다양한 카카윈 문서와 비문들도 있었지만 아직 근대적 역사학 방법론이 자바인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했고, 방대한 고문서는 더 이상 읽는 이들이 없어 대부분 욕야카르타, 수라카르타 등지의 궁정이나 모스크 서고, 당시 자바 본토와 교류가 제한되었던 발리롬복의 각종 서고, 또는 아직 발굴되기 전의 고대 유적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다양한 고대·중세 유물도 겨우 발굴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따라서 자바인들도, 자바 역사에 관심을 두었던 유럽 동양학자도 이슬람화 이전 중세에도 자바와 발리, 보르네오 남부, 수마트라 동부 등지에 세력을 떨친 자바 세력이 있었고, 그 정통성이 드막 술탄국, 마타람 술탄국으로 일부 계승되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상세한 사정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1894년, 네덜란드 식민 당국은 롬복 및 발리 동부 카랑아슴 세력에 대한 원정을 벌였고, 마침내 롬복을 점령했다. 이때 롬복의 중심지 마타람 인근 차크라느가라(Cakranegara)의 롬복 궁전에서 네덜란드인들은 여러 고문서를 포함한 재물을 탈취했다. 이때 네덜란드가 얻어 레이던 대학교로 가져온 고문서 가운데 패엽발리 문자로 기록된 길고 복잡한 문서가 있었다(LOr 5.023). 문자는 자바 문자가 아니었지만, 내용은 중세 자바어로 쓰였음이 분명했다. 네덜란드 동양학자들은 이 문서의 중요성을 곧 감지하고 팀을 꾸려 유럽어로의 번역을 시작했다. 25년에 걸친 길고 고된 노력 끝에 20세기 초 네덜란드어 번역이 완료되었다. 이 문서가 바로 1740년(샤카력 1662년)에 발리 또는 롬복에서 필사된 《나가라크르타가마》였다.

새로 발견된 자바 고문헌이 14세기 당대의 자바와 발리[3]에 대한 매우 풍부한 기록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네덜란드 동양학계뿐 아니라 네덜란드령 동인도, 특히 그 중심부였던 자바섬에도 곧 알려졌다. 이제 자바인들은 자신들이 중세에 정말로 위대한 문명을 이룩해낸 적이 있었음을 상세한 부분까지 자각했고,[4] 이는 곧 폭발적으로 성장해갈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가라크르타가마》의 여러 편집본과 번역본이 출판된 20세기 중반까지도 네덜란드는 레이던 대학교에 《나가라크르타가마》 원본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73년 율리아나 여왕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 원본이 인도네시아로 인도되었다. 이후 원본은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6. 출판과 번역의 역사

7. 외부 링크




[1] 예를 들어 버마는 '파라바이Parabaik', 시암은 '사뭇코이Samut Khoi'라 불리는 18세기 전통 종이 양식이 있으며, 이 둘은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와 별도로 이들 지역에서는 베트남에서처럼 대나무 종이도 사용되었다.[2] 한자 문화권으로서 중국의 기록 문화와 제지술을 받아들인 베트남에는 《대월사기전서》 등 비교적 풍부한 중세 사료가 남아 있다.[3] 《나가라크르타가마》는 13세기와 14세기 발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바만큼 상세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신뢰도 높은 당대 기록을 담고 있다.[4] 이 당시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에 소속된 소규모 제후국들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