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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13 15:06:20

판지 설화

1. 개요2. 원형: 카메스와라 왕과 키라나 왕비3. 등장 인물4. 줄거리: 왕자와 남장한 공주5. 속편: 황금 달팽이 이야기
5.1. 키라나를 납치하는 왕5.2. 키라나를 질투하는 공주
6. 참고 문헌

1. 개요

판지 설화(인도네시아어: Cerita Panji)는 자바에서 널리 알려진 고전 설화이다. 판지 설화는 적어도 13세기부터 자바에 퍼져 있었으며, 이미 13세기 자바 동부 사원 건축물의 부조에 판지 설화의 줄거리가 조각되었다. 판지 설화는 자바에서 토착 설화 가운데 널리 유행한 최초의 설화는 아닐지라도, 최초로 자바에서 인도의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에 견줄 정도의 유명세를 얻은 순수 토착 설화이며, 약 800년 동안 자바에서 여러 판본으로, 문헌과 구전 양쪽으로 창작과 2차 창작이 거듭되었다. 이에 따라 판지 설화의 다양한 판본이 한데 모여 설화군(cycle), 즉 판지 설화군(Panji cycle)을 이룬다. 판지 설화군 전체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장갈라 왕국의 판지(Panji) 왕자와 크디리 왕국의 키라나(Kirana) 공주 사이에 벌어지는 러브스토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인물이 겪는 모험이다.

다마르 울란 영웅담이나 친들라라스(Cindelaras) 설화 등 여러 자바 고전 설화가 자바 동부를 배경으로 하지만, 자바 동부를 넘어 자바 서부나 자바 밖으로 널리 퍼진 설화는 많지 않다. 판지 설화는 이 점에서 특히 독보적이다. 판지 설화는 마자파힛 제국 시대 크게 유행하여 자바뿐 아니라 마자파힛의 정치적·문화적 영향권 하에 있었던 발리, 롬복, 수마트라 등 자바 문화권 각지로 퍼져나갔으며[1], 차츰 자바 문화권과 겹치는 말레이 문화권과 남보르네오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판지 설화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동남아시아 해상 교역로를 따라 널리 전파되어 17–18세기에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테두리를 넘어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등지에서도 유명한 설화가 되었고, 특히 태국에서는 남부 접경 지대 파타니에서 내륙으로 전파되어 《이나오》(อิเหนา)로서 아유타야 왕국 시대와 짜끄리 왕조 시대 태국 고전 문학 전통에 편입되기까지 하였다.[2] 판지 이야기를 기록한 여러 고전 필사본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네덜란드, 영국 5개국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3]

판지 설화는 자바 전통 문화의 기본 요소이며, 전통 시대에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함께 각종 와양이나 전통 무용, 전통 회화조각의 인기 있는 주제였다. 판지 설화가 유명한 다른 지역에서도 판지 설화를 테마로 일종의 미디어 믹스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자바 문화의 영향이 강한 발리와 롬복 지역에서는 아르자(Arja), 감부(Gambuh) 극 등으로 만들어지며 널리 향유되었다. 태국의 《이나오》 역시 인기 있는 태국 전통극 주제였다.

2. 원형: 카메스와라 왕과 키라나 왕비

카메스와라(Kameswara, Kameçvara, Bamesvara, 재위 1112–1135) 왕은 12세기 크디리 왕국(Kerajaan Kediri, 1045–1221)의 국왕으로, 아주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카메스와라'는 힌두교에서 사랑의 신 카마의 이명이다. 카메스와라의 왕비 키라나(Sri Kirana)는 크디리의 동쪽에 있던 장갈라 왕국(Kerajaan Janggala, 1045–1136)의 공주로, 역시 아주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카메스와라와 키라나의 결혼은 원래 아이를랑가 왕 시대에 하나였던 두 왕국의 재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축복받았으며[4], 12세기 전반에 크디리의 시인 음푸 다르마자(Mpu Dharmaja)가 남긴 카카윈 양식의 서사적 송시 《스마라다하나》(Smaradahana, 자바어)는 카메스와라 왕을 카마의 환생으로, 키라나 왕비를 사랑의 여신 라티(Rati, रति)의 환생으로 묘사하며 장대한 신화적 세계를 전개하였다. 《스마라다하나》는 판지 설화의 직접적인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3. 등장 인물

이하의 두 인물은 모든 판본에서 등장하며,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다른 모든 인물들은 판본에 따라 선택적으로 등장한다.

4. 줄거리: 왕자와 남장한 공주

파일:Abb17,Gedompol.jpg
팔루함바(Paluhamba) 시장에서 만나는 판지 왕자(좌)와 키라나 공주(우)
(17세기 와양 베베르 극에서 사용된 도판)

판지 설화군에는 고정된 '정통' 줄거리가 없으며, 매우 다양한 판본과 2차 창작의 망이 존재하므로 여기서 모든 판본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판지 설화의 판본들은 다음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5. 속편: 황금 달팽이 이야기

판지 설화군에는 일단 판지와 키라나가 결혼으로 이어져 판지 설화의 본편이 끝난 후를 다루는 다양한 후일담과 속편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황금 달팽이(Keong Emas) 설화로, 이 역시 매우 유명한 자바의 설화이며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황금 달팽이 설화는 판지와 키라나의 이별과 재결합을 다루는데, 한국의 우렁각시 설화와도 유사한 점이 있다. 황금 달팽이 설화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두 판본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1. 키라나를 납치하는 왕

옆 나라 안타브란타(Antah Berantah) 왕국의 왕이 키라나를 탐내 부인으로 삼으려고 납치한다. 그러나 키라나를 지켜보던 여신이 납치당하던 키라나를 황금 달팽이로 변신시켜 탈출시킨다. 가난한 늙은 과부 란다 다다판(Mbak Randa Dadapan)이 키라나가 변신한 황금 달팽이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서 항아리에 넣어 소중히 기른다. 키라나는 란다 다다판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보답하기 위해 여러 번 란다 다다판이 물고기를 낚으러 간 사이 본모습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대신 하고 요리까지 해 놓는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해주는지 궁금해진 란다 다다판이 하루는 낚시를 가는 척하고 벽의 구멍으로 집 안을 들여다보자, 웬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 집에서 일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다음 날도 같은 일이 벌어지자 란다 다다판은 황금 달팽이를 넣어 둔 항아리를 깨뜨려 버리고, 키라나는 황금 달팽이로 돌아갈 수 없어 본모습으로 남는다. 란다 다다판은 키라나를 집에 맞아들이고 딸처럼 대접해 준다. 한편으로, 키라나를 찾으러 다니던 판지는 마침내 란다 다다판이 사는 마을에 도착해 란다 다다판과 함께 살고 있는 키라나를 발견하고, 키라나와 란다 다다판을 함께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온다. 란다 다다판은 판지와 키라나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5.2. 키라나를 질투하는 공주

황금 달팽이 설화의 다른 판본에서는 키라나가 황금 달팽이가 되고, 키라나를 돕는 늙은 과부가 등장하는 기본 구조는 같으나, 옆 나라 왕이 키라나를 탐내 납치하는 것이 아니라 판지를 좋아하던 크디리의 다른 공주 데위 갈루(Dewi Galuh)가 키라나를 질투하여 마녀를 시켜 키라나에게 저주를 걸어 황금 달팽이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데위 갈루가 키라나를 모함하여 저주가 걸리기 전 판지가 키라나를 궁전에서 쫓아내도록 하는 판본도 있다. 저주는 키라나가 판지를 만나야 풀리도록 되어 있으며, 키라나는 늙은 과부 란다 다다판의 도움을 받는다. 키라나는 란다 다다판의 집안일을 대신 해 주고, 이를 눈치챈 란다 다다판에게 자기가 크디리의 공주임을 알린다. 그러나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는다.

판지는 사라진 키라나를 찾기 위해 평민으로 변장하고 이곳저곳을 헤맨다. 키라나에게 저주를 건 마녀는 까마귀로 변신해서 판지가 키라나를 찾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판지는 우여곡절 끝에 늙은 남자 마법사의 도움으로 까마귀로 변신한 마녀를 물리치고, 마법사의 도움으로 란다 다다판이 사는 마을을 찾게 된다. 마을을 찾아간 판지와 키라나는 낭만적으로 해후하고 키라나의 저주가 풀리며, 판지는 키라나와 란다 다다판을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온다.

6. 참고 문헌


[1] (The Jakarta Post Dec 16, 2020)[2] (Robson 1996, 39-53)[3] (UNESCO Dec 16, 2020)[4] 카메스와라를 계승한 크디리의 다음 왕 자야바야(Jayabaya, 1135–1157~1159) 시대에 크디리는 장갈라를 다시 통합하여 자바 동부를 재통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