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포의 외인구단의 등장인물
마동탁이 속한 유성그룹 회장의 처남으로 고등학교 야구 감독이었다가 유성구단이 만들어지자 회장을 설득해 유성구단의 감독으로 손병호 감독을 추천하면서 자신 또한 은근슬쩍 코치진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속으로는 유성구단의 감독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손병호 감독 몰래 선수단을 장악하고 조카 유미선[1]을 이용해 마동탁을 포섭함으로서 실질적인 권세를 누리게 되고, 결국 회의를 통해 손병호 감독은 명목상의 총감독으로 남기고[2] 자신이 감독의 자리에 오른다.오혜성이 마동탁을 상대로 노히트 노런 게임을 달성하자 그의 어깨가 완전히 망가진 줄 모르고 스카우트 하기위해 마동탁의 연봉 2억보다 높은 3억원을 제시하려고 하며, 한때 선후배 사이였던 최인엽 감독은 박광도의 이 제안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오혜성에게는 어깨 부상을 비밀로 한 채 스카우트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어깨부상이 밝혀지고 나자 최인엽 감독을 추궁하지만 굳이 이것을 세간에 알려봤자 자신들만 웃음거리가 되는데다가 마동탁의 자존심을 생각해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다.
이후 박광도 감독이 이끄는 유성구단은 박광도 취임후 2년연속 우승에 이어 3년차에도 전기리그 우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으나 사실 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마동탁의 능력 때문이었으며, 그 때문에 마동탁을 편애하는 바람에 마동탁의 오만함이 심화되고 그에 따라 타 팀원들과의 반목 또한 심해졌다. 이 문제는 유성구단이 잘 나갈 때는 보이지 않다가 돌아온 외인구단원들이 있는 서부구단에 의해 유성구단이 완전히 박살나자 확연히 드러난다. 외인구단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마동탁이 감독을 무시하고 선수 기용조차 자신의 독단으로 밀어붙이자 열받은 박광도 감독은 모든 것을 마동탁의 지시대로 한 뒤, 그날 경기에서도 완전히 박살난 마동탁을 비웃으며[3] 다른 선수들에게 다시는 마동탁을 편애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사과한다.
이후 도전자의 정신으로 외인구단과 싸우지만 계속 박살나고, 최후의 수단으로 후기리그의 나머지 경기를 포기하고 한국시리즈를 대비하기 위해서 마동탁 포함 모든 팀원들과 함께유성에서 가장 뛰어난 9명을 모아 2달동안 외인구단과 똑같은 훈련방식으로 훈련하는 속성 코스까지 준비했다...어이없이 감독과 주력선수들이 한국시리즈 하나 때문에 2달동안 팀을 비우고 남은 시즌 승부를 포기하는 상황이 연출...팬들이 페트병과 라면을 던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이런 팀이 그래도 전기리그 우승팀이라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전후기리그제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적나라한 에피소드...게다가 이런 무성의한 팀이 한국시리즈 때는 특정구단 까기자의 책 한권으로 전국민이 응원하는 국민구단으로까지 격상된다...
다만 이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은 당시 유성구단의 2군만으로도 충분히 상위권은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지만 역시 현실에선 이러다간 패트병 맞는다.(...)
하지만 팬들을 무시하고 완전히 남은 시즌을 내놓고 포기하면서 까지 준비한 한국시리즈를 와서도 3차전까지 계속 박살(...) 게다가 1차전에서는 (야구 규정상 출전자 명단에 들어가 있을) 배도협의 존재조차 망각하면서 상대팀의 출전선수 명단조차 확인하지 않는다. (만약 확인 했으면 대타 배도협의 콜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선수빨이라고 해도 어떻게 한국시리즈를 2연패하고 3연패에 도전하는 팀의 감독이 됐는지 의문이다.[4][5]
초반부의 음모로 감독 자리에 오른 이후엔 별 다른 포스를 주지 못하고 경기 내에서도 마동탁에 밀려 별 다른 작전 지시나 활약 등이 보이지 않는 감독. 하지만 마동탁의 유성 입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게 팀의 한국시리즈 2연패로 연결됐으니 그런 점에서는 유성구단 입장에서는 나름 공로자이면서 유능한 감독이라고 해야하려나...마치 과거 누구를 감독으로 앉히든 우승할 수 있다라고 공언 받았던 허재, 강동희 시절의 KIA 농구팀이 생각난다.[6]
2. KBS 청소년 드라마 학교 2의 등장인물
연기자는 고 박광정.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학교의 대본에 등장(그리고 학교에 따라 2학년 교과서에도 '학교'가 수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하기 때문에 10년이 한참 지난 지금도 얼굴이 제법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박광정 씨 사망 소식에 인터넷에서는 '박광도 씨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1] 유성그룹 회장의 딸.[2] 하지만 손병호 감독은 면목상의 총감독을 거부하고 외인구단에 매진하게 된다.[3] 이 때의 비아냥 성 대사가 압권이다. 10점차로 지고 있고 9회 2아웃 상황에 마침 돌아온 마동탁의 타선에서 부탁한다, 마동탁! 너만 믿는다! 그냥 홈런을 쳐서도 안 돼! 무슨 수를 쓰든 10점짜리 홈런을 치라고....! 자넨 할 수 있을 거야! 천재니까! 으하핫...[4] 외인구단 본문에서 배도협은 엔트리에서 말소된적은 없다고 언급되어있다. 2군으로 진작 보낸건 기사화가 되었지만 형식상으론 1년 내내 1군에 있었던셈. 2군으로 내려간 직후 한경기도 뛰지않고 잠적했기때문에 규정상으로도 문제는 없다.[5] 위와 같은 시각은 오늘날의 상식에 입각한 것일 뿐이고, 이 만화가 그려진 게 1983년이라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의 상식으로 당시를 판단하면 곤란한 것이, 당시에는 2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한국프로야구에 2군 리그가 도입된 게 1990년이다. 지금이야 2군 시스템이 잘 짜여 있지만, 그때는 2군 가라고 하면 "나 은퇴하라는 거지?"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다. 2군 감독 이런 건 당연히 없고, 2군 인원 자체가 9명이 안 되니 아예 연습경기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프로야구 원년에는 상당수 팀의 선수단 규모가 25명이 안 되었고(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프로 원년에 해태 타이거즈의 선수단 인원은 시즌 중 20명까지 늘긴 했지만 창단 당시에는 14명이었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23명이었다), 프로 원년에는 단 한 팀도 2군을 운영하지 않았다. 이 만화가 그려지던 1983년 당시에도 2군은 없었고, 하반기가 되어서야 삼미와 OB가 2군을 만들었으며, 2군 경기는 치러지지도 않었다(1984년이 되어서야 두 팀끼리만 2군 정기전을 하는데, 그때도 선수가 모자라서 코치가 뛰거나, 심하게는 기록원이 교체선수로 뛰기도 했다). 심지어 롯데 자이언츠와 해태 타이거즈는 1988년까지도 2군이 없었다. 즉 명단 안에 있는 선수들의 실력차가 프로 수준부터 사회인야구 수준까지 다양하다 보니 명단에 넣어 놓고 몇십 경기를 안 써도 지금처럼 이해가 안 되던 시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화는 그러한 당대의 상황을 바탕으로 그려졌다.[6] 사족으로 KIA왕조의 후기 감독이었던 최인선은 프로 원년은 파이널에서 허재를 아예 빼버리는 강수를 두고도 우승했고, SK가서도 서장훈, 현주엽 공존이 안되자 현주엽을 보내버리고 조상현을 받아와서 우승시킨 만만치 않은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