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무길(朴武吉) |
본관 | 함양 박씨 |
생몰 | 1910년 8월 11일 ~ 1977년 9월 29일 |
출생지 |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창평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1]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무길은 1910년 8월 11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현 창평면) 창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하던 1927년 4월에 이동선(李東宣), 하의철 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에 가입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괄시하던 일본인 교유(敎諭) 에다(江田)를 타교로 쫓아내는 데 앞장섰다. 이후 1928년 3월에 있을 졸업을 앞두고 2학년생 최상호(崔相鎬), 김기주, 강달모(姜達模)를 후계자로 선정하고 교내조직의 확대에 주력했다.1928년 2월, 박무길은 최규창, 문승수(文升洙) 등 각 학교 학생지도자 12인과 함께 광주군 서방면 두암리에 사는 지용수(池龍洙)의 집에 모여 졸업 후 항일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앞으로 교직 등 사회에 나아가서도 성진회의 사업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그해 3월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박무길은 보통학교 훈도로 재직하면서 광주사범학교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경찰은 사건의 배후에 성진회가 있다고 판단하고 성진회를 이끌었던 그를 체포했다.
하의철은 체포 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살다가 8.15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된 후 서울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1977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하의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3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