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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08 13:56:22

박민영(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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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민영2.jpg
성명 박민영(朴珉英)
러시아식 이름 박 니키포르 알렉산드로비치
생몰 1904년 2월 9일 ~ 1938년 5월 9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 삼직리
사망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생애

박민영은 1904년 2월 9일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읍 삼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로 이주했고, 1920년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1921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공부했고, 1924~1924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5년 7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그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공산주의 활동을 펼쳤다. 1926년 1월,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비서부에 배속되었고, 2월에는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철수와 함께 국제 혁명자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경성부 제1구 제7야체이카 책임을 맡았다.

1926년 6월, 그는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6.10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에 참여했지만 6월 6일 동료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고, 일제 경찰은 그를 본 사건의 주요 인물 17명에 포함시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겨 취조받게 했다. 이후 그는 1928년 2월 13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9년 9월 16일에 출옥했다. 이후 1929년 11월 서울에서 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해 연락부를 담당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 무렵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면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1930년 2월 초 김단야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했다. 그러나 1938년 3월 13일 반혁명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5월 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3. 기타

1957년 4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는 박민영을 복권시켰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