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사도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 |||
}}}}}}}}}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광해군의 왕녀 박징원의 처 | 朴澂遠의 妻 | |
출생 | 1619년(광해군 11년) 6월 23일 |
사망 | 1664년(현종 5년) 11월 1일 (향년 46세) |
부왕 | 광해군 |
생모 | 폐귀인 윤씨 |
자녀 | 슬하 2남 3녀 장녀 - 박일애(朴一愛, 1645 ~ ?) 차녀 - 박이애(朴二愛, 1649 ~ ?) 3녀 - 박삼애 (朴三愛, 1650 ~ ?) 장남 - 박태구(朴泰龜, 1654 ~ ?) 차남 - 박성구(朴聖龜, 1656 ~ ?) |
[clearfix]
1. 개요
조선 제15대왕 광해군과 폐귀인 윤씨의 딸. 광해군의 유일한 딸이자 서출자식으로 인조반정 후 박징원에게 시집을 갔다.2. 생애
1619년 6월 23일, 당시 정2품 소의였던 윤씨에게서 태어났다.[1]광해군이 당시로서도 아주 늦은 나이인 44세에 얻은 늦둥이 딸이자 고명딸로 온 왕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낸다.[2]
그러나 1623년, 5살이었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 옹주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폐위되어 귀양을 가고 어머니는 사형을 당하고, 그녀는 외삼촌의 집에서 자랐다.
그 후, 인조에게 재산을 받으며 지내다[3][4] 1643년에 광해군의 3년상을 마치고나서야 박징원(1625 ~ 1690)과 혼인을 할 수 있었는데 나이가 25살이었다.[5]
박징윈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는데, 처음에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만 연이어 셋을 낳는 바람에 박징원이 첩을 들여 아들을 보았다.
광해군의 유일한 혈육[6]인지라 광해군의 제사는 옹주의 후손들이 주관하게 되었고 1717년, 민진후가 옹주의 후손들을 녹용해야한다고 건의하자 숙종이 이를 허락하였다.[7]
1664년 11월 1일에 사망하였다.[8][9] 그녀가 사망한 뒤, 박징원은 전주 이씨와 재혼하였다.
3. 대중매체
- 보쌈-운명을 훔치다- 권유리
박징원의 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이름은 이수경(水鏡). 드라마 상에서는 광해군 재위시절 이미 성년이 되어 "화인"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1] 《울진 나곡리 왕녀아기씨태실비(王女阿只氏胎室碑)》[2] 그녀가 태어나기 전까지 광해군 슬하에 딸은 없었으나 폐세자의 후궁이 낳은 서손녀와 폐세자빈이 낳은 적손녀가 있었다. 적손녀는 일찍 죽고 서손녀는 뒷날 의성김씨 김문거에게 시집을 간다.[3] "폐인 지의 딸과 광해의 궁인이 낳은 딸이 장성할 때까지 해조에서 요미(料米)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2년 3월 26일 경진 1번째기사》[4] 쌀 10석과 콩 5석 및 각종 찬물(饌物)을 광해군의 딸에게 주어 제수(祭需)를 갖추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인조 19년 9월 17일 경인 3번째기사》[5] 해조에 명하여 광해군의 딸에게 혼수(婚需)를 주게 하였는데 바로 폐숙의 윤씨(廢淑儀 尹氏)의 소생이다. 광해가 쫓겨난 뒤 그의 딸이 외삼촌집에 의지해 있으면서 나이가 20세가 되어도 감히 혼사를 의논하지 못하였었다. 광해가 죽은 뒤에 상이 광해의 본궁(本宮)에 살게 하고 전택(田宅)과 노비를 넉넉히 주어 광해의 제사를 받들게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상기(喪期)가 끝났으므로 이 명을 내린 것이다. -《인조 21년 4월 18일 신사 1번째기사》[6] 폐세자 이지는 일찍 죽었을 뿐더러 이지의 자식으로는 적녀 1명, 서녀 2명이 있었는데 적녀는 아기때 죽고 서녀는 1명만 장성하였다.[7] 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광해주의 제사를 봉행(奉行)하여 온 사람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민진후(閔鎭厚)가 임금에게 건백(建白)하기를, "연산주(燕山主)의 황음(荒淫)과 무도(無度)함은 이전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가 드문데도 그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을 특별히 녹용(錄用)하였으니, 인후(仁厚)한 성덕(聖德)이 천고에 탁월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광해주(光海主)의 외손(外孫)으로서 제사를 봉행하여 온 사람에게는 아직껏 녹용(錄用)하는 거조가 없었다 하니, 이는 필시 우연히 살피지 못했던 소치일 것입니다. 마땅히 똑같이 녹용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해조(該曹)에 분부(分付)하여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숙종 43년 7월 4일 병진 3번째기사》[8] 광해군의 딸이 졸하였다.【광해는 곧 폐주(廢主)이다.】상이 호조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넉넉히 주게 하였다. -《현종 5년(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11월 1일 )무자)》[9] 묘비에는 10월 29일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