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인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2. 생애
김국후의 책에 따르면 1905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소련 이름은 박 일라리온 드미트리예비치(Пак Илларион Дмитриевич)이다. 1928년 전연방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지역 농촌위원장, 구역집행위원장으로 사업하였고 1945년 북한에 파견되었다.1946년 7월, 소련 국적을 포기하고 북한 공민증을 신청했다고 하는데 김열 문서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퍼포먼스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1946년 8월, 1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초대 농민부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11월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나 농민부장은 리유민으로 교체되었다. 1950년 2월에야 북한 국적을 취득하였다. 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6.25 발발 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농림성 부상을 지냈다.
1955년 즈음에 자강도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 12월 1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와 인민정권을 강화하며 농촌경리를 발전시키는 사업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50세 기념 로력훈장을 받았는데, 이를 보면 1905년생이 확실하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내무성 부상을 지내다가 소련으로 가까스로 망명한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56년 9월 전원회의 이후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이 복권된 것을 곧이곧대로 도당 전체에 전달했다가 출당, 숙청되었다고 한다. 그가 김일성에게 비판적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1955년 3월 31일, 1955년 4월 전원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소련 대사관 참사 페트로프 및 1등 서기관 뱌코프와의 대화에서 김일성의 우상숭배를 비판하면서 김일성이 공적을 과장하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김일성이 무리한 공업화를 추진하였다가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북한에 대기근이 발생한 것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 회의록을 보면 박창식은 리주연과 함께 당중앙검사위원회에서 소환되어 당중앙위원회로 이동하였다. 1958년 3월 19일, 자강도 당위원장 김관섭과 함께 소련 대사 푸자노프와 면담을 가지기도 했으며 김일성에게 비판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사업이 잘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후에 뚜렷한 활동은 추적되지 않는다. 김국후의 책에 따르면 처형된 것으로 적혀 있지만 관련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서동만의 책에서도 행방불명자로 분류하고 있고 조선대백과사전이나 애국렬사릉 안장자 명단에도 없는 것을 봐서는 고운 말년을 보내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참고문헌
- 김국후, 평영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파주: 한울아카데미, 2013).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조수룡(2017), 전후 북한에서의 소련계 숙청과 국적 문제(1954~1958), 동북아역사논총 56.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의 일지 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관 직원들의 일지와 면담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