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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0:28:03

박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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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제30보병사단장
박희모
朴熹模 | Park Hee-mo
파일:박희모.jpg
출생 1933년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상주시
사망 2020년 2월 2일 (향년 87세)
임관 갑종간부후보생 (9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1년 7월 29일 ~ 1985년
최종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군 보직 합동참모본부

1. 개요2. 생애3. 12.12 군사반란4. 반란 이후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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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1933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학생시절에 6.25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보성중학교 5학년이었다.[1] 입대 사유는 부모님이 있는 상주에 피난을 가다가 자원입대를 독려하는 방송을 듣고 자원입대를 했다고한다.

박희모는 1951년 7월 29일, 갑종간부후보생 9기로 입교했다. 1952년 1월 29일, 육군 소위로 임관 후 소대장으로 배정받은 곳은 제11보병사단 제9연대 3대대였다. 당시 지금의 통일전망대 근처에 있던 곳이라서 포격전과 생포전을 반복했다고한다.

이후 휴전까지 죽을 고비를 3번이나 경험했다고한다.

3. 12.12 군사반란

박희모는 6.25때 대단한 성과를 보였지만 의외로 12.12 군사반란 가담자이다.

당시 계급은 소장이었으며 직급은 제30보병사단장이었다.

처음부터 반란군에 가담한건 아니며 진압군 측에 섰다가 배신했는데, 제1공수특전여단[2]제9보병사단[3]이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수도경비사령부 관할 한강다리를 넘지못해서 수경사 관할이 아닌 유일한 한강다리인 행주대교로 진입할려하자,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박희모에게 "30사단 관할인 한강다리를 통제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한다. 박희모는 이 요청은 육군본부 측에서도 받았기에 행주대교를 통제하여 반란군들을 진압하려고 하며 진압군에 가담한다.

하지만 박희모의 전화 내용을 감청한 보안사 측은 박희모에게 "부대 동원해봤자, 30사단이 질 것이 뻔하니까 부대원 사지로 몰지말고 통제 철회하십시오" 라고 전하여, 박희모는 행주대교 통제를 철회하고 결국 반란군들과 합류한다.[4] 박희모는 반란군측 요청으로 3군사령부 예하, 제26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의 진입을 막기위해 제30사단 제90연대[5]를 고려대학교 인근에 배치하는 반란행위를 한다.

4. 반란 이후

반란 이후 박희모는 예편당하지 않고, 계속 진급을 하여 1984년 중장 진급을 한다. 이상규 장군과 같이 전두환에게 보직신고를 하였다. 박희모는 합동참모본부장을 역임하고, 1985년 예편당했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때 산업기지개발공사 이사장을 지냈다.

2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6.25 전쟁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맡고,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도 했다. 2020년 2월 2일, 87세로 사망했다.

5. 대중매체에서



[1] 당시 중학교는 6년제로 해놓는 학교도 있었다[2] 여단장은 박희도 준장[3] 사단장은 노태우 소장[4] 최초로 육군본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사례이다[5] 연대장은 송응섭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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