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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11:54:42

방화중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7년
황해도 안악군
사망 1940년 12월 11일 (향년 63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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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7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그해 11월 11일 안창호 등이 조직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1]에 가입해 1905년 1월부터 1905년 3월까지 회계 겸 학무로 일했다. 1905년 4월 5일 상항친목회가 공립협회(共立協會)로 확대 개편되자 공립협회 총회 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의 사무를 맡게 되었고, 상항지방회 회계 겸 학무를 겸임해 1907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 11월 22일에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가 창간되자, 편집인으로 취임해 1907년 3월까지 신문사 사무를 주관했고, 모필(毛筆:짐승의 털로 맨 붓)로 전 신문지면을 제작했다. 1907년 2월에는 공립협회 회원으로서 《태극학보(太極學報)》에 의연금 2원을 기부했다.

1907년 10월에는 로스앤젤레스로 활동 지역을 옮겨 나성지방회(羅城地方會)[2]에 가입했고, 1908년 2월부터 1909년 1월까지 나성지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08년 8월에는 로스앤젤레스 부근 클레어몬트시(Claremont)에서 학생양성소를 개설하자 이에 참여했고, 1908년 9월부터 학생양성소 총무에 선임되어 양성소 사무를 총괄했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의 합성협회(合成協會)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등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이 통합해 국민회(國民會)를 결성하자, 여기에 가입했다. 이 즈음 멕시코 유카탄에 이민 왔던 일본인들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같은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을 자신들의 지배 하에 두려고 자주 찾아와 분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이 시기 멕시코의 조선인들이 국민회에 자신들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방화중은 1909년 4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황사용(黃思溶)과 함께 견묵위원(遣墨委員)[3]에 선임된 뒤 멕시코에 파견되었고,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메리다지방회 창립에 큰 기여를 했다. 그 뒤 미국으로 돌아와 1909년 7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외교원에 선출되었다. 1910년 1월에는 북미지방총회 구제원에 선출되었고, 4월에는 북미지방총회 학무에 선임되었다.

1910년 5월 10일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된 뒤 1911년 4월 북미지방총회 학무에 재선임되었고, 8월에는 중앙총회 학무원 겸 서기 대리에 선임되었다. 1916년 2월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구제원을 거쳐 1916년 4월 대한인국민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1918년 11월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파견되어 이승만 등 10여 명의 인사들과 함께 소약국동맹회 및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조선인 대표자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1928년 3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발기인으로서 창간에 참여했고, 1940년 12월 11일 별세했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상항(桑港)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자 이름이다.[2] 나성(羅城)은 로스앤젤레스의 한자이름이다.[3] 멕시코를 한자로 묵국(墨國), 묵서가(墨西哥) 등으로 음역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