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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5:57:58

배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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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4C516D,#ddd> 활동 한인애국단 · 훙커우 공원 의거
가계 부인 배용순 · 손녀 윤주경 · 종손 윤주빈 · 본관 파평 윤씨
기타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 윤봉길로 · 효창공원 · 윤봉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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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683649476508.jpg
출생 1907년 8월 15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사망 1988년 7월 10일 (향년 8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본관 성주 배씨
묘소 충청남도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경내
가족 윤봉길(남편)
윤종(장남), 윤경(차남),
윤안순(장녀), 윤담(삼남)
윤주경(손녀), 윤주웅(손자)
윤주빈(시종손)[1], 윤행복(증손)
종교 천주교(세례명: 안나)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독립유공자 윤봉길의 부인.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 받았다. 1988년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1907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동학 교도 배성선의 딸로 태어나 1922년, 15세에 자신보다 1살 어린 동향 청년 윤봉길과 결혼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들 윤경과 딸 윤안순은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남편의 망명 당시 첫째 아들 윤종은 고작 세 살이었으며, 셋째 아들 윤담은 뱃속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부친이 숨진후 태어나[2] 살아 있던 아들 둘 중에 셋째 아들 윤담은 아홉 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남편 윤봉길이 일제에 의해 순국한 후에는 일본 제국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시부모님을 모시며 서로 의지해 광복의 날이 올때까지 묵묵히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광복 후인 1946년 일본에서 돌아온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확인하고서도 6·25 전쟁이 끝나고 귀향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혹시 저 무리에 남편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거리를 바라볼 정도로 남편을 그리워 했다고 전해진다.

1963년 정부의 독립운동가 재조명 사업이 시작되자 그동안 지내던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정부에 양도하고 서울로 상경해 장남 윤종 내외와 함께 노년을 보냈다.

1977년에는 시댁인 파평 윤씨 대종회로부터 그간의 효행을 인정받아 효부상을 수여받았다.

1982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받았고 1984년 장남 윤종이 57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며느리, 손주들과 함께 말년을 보내고 1988년 7월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3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공원에서 사회장으로 영결식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후록에 안장되었다.

3. 기타



[1]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편지를 낭독했다.[2] 사실 윤봉길이 사형당한 건 윤담이 2세였을 때지만 윤봉길은 망명 후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유복자다. 비슷한 사례로는 안창호의 막내아들 안필영이 있다. 다만 그는 윤담과 달리 어머니 이혜련 외에도 큰형 안필립 등 보호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