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
1431년 |
1. 돌아온 기사도의 시대 (1415~1422)
1.1.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5)1.2. 아쟁쿠르 전투 (1415)1.3. 2차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6)1.4. 2차 캉 포위전 (1417)1.5. 파리 포위전 (1417)1.6. 파리 학살 (1418)1.7. 루앙 포위전 (1418)1.8. 부르고뉴 암살 (1419)1.9. 트루아 조약 (1420)1.10. 보제 전투 (1421)1.11. 드뢰 포위전 (1421)1.12. 모 포위전 (1422)1.13. 헨리 5세의 죽음 (1422)
2. 부르주 왕국 (1423~1428)2.1. 르 크로투아 포위전 (1423)2.2. 크라방 전투 (1423)2.3.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1423)2.4. 낭트 회담 (1424)2.5. 베르뇌유 전투 (1424)2.6. 몽 포위전 (1425)2.7. 르망 포위전 (1425)2.8. 생잠 포위전 (1426)2.9. 퐁토르송 포위전 (1427)2.10. 몽타르지 포위전 (1427)2.11. 르망 습격 (1428)2.12. 보장시 포위전 (1428)
3.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clearfix]
1. 돌아온 기사도의 시대 (1415~1422)
"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즐기지. 이들은 에드워드 왕과 웨일즈 공의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전리품으로 돈더미에 앉기 위해 대담하게 싸움터에 뛰어들 거야. 우리에게 진짜 왕이 있다면, 프랑스인들에게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 싸우려는 왕이 있다면, 그는 함께 해협을 건너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10만 명의 궁수와 6천 명의 중장병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잉글랜드에는 그런 왕이 없다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1.1.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5)
자세한 내용은 아르플뢰르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15년 3월 10일, 헨리 5세는 의회에서 프랑스 침공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 공격 목표가 가스코뉴인지 북부 프랑스인지는 의원들에게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4월, 모두의 관심이 잉글랜드에 집중된 사이, 왕세자 루이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파리 시와 주요 정부 직위들을 장악했다. 아르마냑파 지도부가 믈룅 성에서 대책 회의를 하는 동안 왕세자 혼자 몰래 빠져나와 파리로 돌아왔고,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한 것이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고 왕세자의 측근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아르마냑파를 숙청한 왕세자는 아내이자 부르고뉴 공작의 딸인 마르그리트를 냉대하고 파리 시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자신이 부르고뉴파의 통제에서도 벗어났음을 알렸다. 모욕을 당한 부르고뉴 공작은 비록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했지만 정치적 양보 없이는 왕세자의 통치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6월, 프랑스의 외교 사절단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헨리 5세는 가스코뉴의 주권을 요구했지만 사절단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고, 결국 헨리는 왕세자 루이의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다.
8월 초, 헨리 스크롭과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의 역모가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된 뒤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당했다. 고작 며칠 뒤인 8월 11일 원정군이 솔렌트에서 출항한다.
8월 14일, 셰프앙코에 상륙한 헨리는 곧바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뒤, 센강 하구와 레자르드강이 교차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소도시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왕세자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을 견제하느라 파리에서 멀리 떠날 수 없었고, 잉글랜드군은 도시를 봉쇄한 채 방어선을 조금씩 점령해갔다.
9월 22일, 아르플뢰르 주둔군은 결국 항복한다. 이로써 프랑스는 전략적으로든 위신에서든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잉글랜드군도 질병과 전투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1.2. 아쟁쿠르 전투 (1415)
자세한 내용은 아쟁쿠르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헨리 5세는 육로를 통해 칼레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우선 잉글랜드군의 힘을 과시하고 프랑스 왕의 위신을 떨어뜨리려는 전략적 수단이었다. 또한, 방어가 약한 아르플뢰르에서 프랑스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거리의 육로 행군은 함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 유리하기도 했다.
1415년 10월 8일,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에서 행군을 시작했다. 헨리는 처음에는 증조부인 에드워드 3세가 한 것처럼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통해 솜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샤를 1세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목을 미리 선점했다. 잉글랜드군은 청야전술로 황폐화된 강변의 마을들을 따라 4일을 더 행군했지만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고, 남쪽으로 행군 방향을 틀어서 프랑스 수비군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다음 그 짧은 틈을 노려 도하 지점을 찾는다는 도박 같은 작전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수비군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24일, 강을 건너느라 낭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4일간의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이 마주한 것은 칼레로 향하는 좁은 계곡 너머의 도로와 평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뚜기 무리 같은'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군이 칼레로 향하는 길목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잉글랜드군에는 전투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계획 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편견과 달리 달브레와 부시코는 전투 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배치된 기동부대들을 하마 맨앳암즈 중심의 야전군으로 재편한 채 잉글랜드군을 맞이했다. 후위에 배치된 800~1200기의 정예 기병들이 잉글랜드 궁수들에게 기습적으로 돌격하는 것으로 전투를 시작하고, 약 4천명의 쇠뇌수들이 제압 사격을 퍼붓는 동안 주력인 중보병대가 잉글랜드군 대열에 안전하게 접근하며, 그 사이에 소수의 분견대가 진영을 우회해서 포위함으로써 잉글랜드군을 한 번의 전투로 섬멸하는 것이 당초에 입안된 작전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잉글랜드군이 먼저 방어 진영을 해체하고 장궁의 사거리 안으로 진격해서 프랑스군 진영에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기병 말뚝을 뽑아내고 다시 설치하는 사이 잉글랜드 궁수들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지만 정작 그 궁수들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된 프랑스 기병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브르타뉴의 기욤의 연대기는 롬바르디아와 가스코뉴 출신 기병들이 궁수들의 위협 사격에 겁을 먹고 돌격을 거부했다고 비난한다. 반면에 질 르 부비에의 연대기는 기병대의 지휘관인 클리네 드 브라방과 루이 드 부르봉이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가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기병들이 대부분 불가에 앉아있거나 말을 돌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기병대가 뒤늦게나마 예정대로 공격을 개시했지만, 진창 위에서 1천 기에 달하는 기병들이 대열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절반 가량인 400기만이 출격했다. 결국 기병들은 장궁병들이 정면에서 퍼붓는 사격과 대기병 말뚝을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패주한다.
이어서 프랑스 보병대가 진격했지만, 당초에 계획된 쇠뇌수들의 지원사격은 없었다. 와브랭에 따르면 전장이 좁아서 맨앳암즈와 궁수들을 동시에 투입할 공간이 없었고,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하마 맨앳암즈 대열의 선두에 선 귀족들이 궁수들의 지원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은 정면 사격에 취약한 급소인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면갑을 내렸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얇은 면갑이 화살에 관통당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쏟아지는 화살비와 아군 방향으로 패주하는 기병들,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 등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잉글랜드군 대열에 이르러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의 얇은 선형진을 6피트에서 12피트 정도 밀어붙였다.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잉글랜드 군종사제들이 그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울부짖듯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맨앳암즈들의 얇은 대열은 기적적으로 공격을 버텨냈고, 양익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2배 이상 두꺼운 프랑스군 대열을 역으로 밀어내거나 돌파해서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헨리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사타구니를 검으로 찔리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을 정도로 치열한 백병전이었다. 화살이 떨어진 궁수들도 검, 단검, 도끼, 말뚝 고정용 나무망치 등을 들고 백병전에 참가했고, 유일한 이점이었던 숫자에서 비롯된 응집력을 잃은 프랑스군은 일방적으로 밀려나며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쟁쿠르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나고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11월 23일, 헨리 5세는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왔다.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에드워드 3세 시대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 대한 의회와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랭커스터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종식시켰다.
한편 아쟁쿠르 전투에서 지도층의 상당수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면서 아르마냑파는 약화되었다. 기회를 포착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이에 왕세자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부르고뉴군은 멈추지 않았다. 부르고뉴군을 막기 위해 유능한 군인이지만 독선적이라는 평을 받는 인물인 아르마냑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부르고뉴파에 동조한다는 의심만으로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베르나르의 강경한 대응에 부르고뉴군은 결국 퇴각했지만, 아르마냑파는 파리 시민들의 증오를 샀다.
12월 18일, 왕세자 루이가 이질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형에 비해 정치적 재능과 경험이 부족하고 장인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의 통제를 받는 동생 장이 새로운 왕세자가 되었다.
1.3. 2차 아르플뢰르 포위전 (1416)
1416년 1월, 아르마냑파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아르플뢰르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과 함대를 동시에 소집했다. 이를 위한 군사 작전의 준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세를 부과하고 소금세를 2배로 인상했다.
프랑스군에 포위된 아르플뢰르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전의 포위 공격으로 인해 도시의 방어 시설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주둔군은 현지에서 자원을 징발하고 약탈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급품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3월에는 약탈 부대가 포위군의 매복 공격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발몽 전투).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헨리 5세는 구원군을 보내 포위를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파리에서는 부르고뉴파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었다. 약 500명의 용의자가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공포감이 퍼졌다. 이에 아르플뢰르를 포위공격 하고 있었던 아르마냑 백작이 일시적으로 휴전을 맺고 파리로 돌아가면서 잉글랜드군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맨앳암즈 1,000명 이상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온 아르마냑 백작은 체포된 용의자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공개 처형했으며, 부르고뉴파의 근거지로 지목된 파리의 도축업 조합의 특권을 폐지하고 정육점 거리를 강제 철거했다. 이로 인해 아르마냑파와 파리 시민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5월, 독일 왕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가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했다. 극도로 호전적이며 평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아르마냑 백작은 지기스문트의 제안을 무시했지만, 이자보 왕비는 지기스문트를 지지하며 자신의 사촌이자 왕세자 장의 장인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을 대표로 파견했다.
그렇게 시작된 협상에서 헨리 5세는 브레티니 조약의 완전한 복원과 아르플뢰르의 양도를 요구했다. 프랑스 대표들은 파리 추밀원과의 협의 없이 이러한 조건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협상은 일시 중단되었다. 헨리 5세의 제안을 전달받은 아르마냑파 지도부는 노골적인 거부 대신 협상을 질질 끌면서 지원군 모집을 방해하는 동시에 포위 공격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다시 주민세를 부과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는 협상이 속임수라고 판단하고, 8월 14일 아르플뢰르 구원을 위한 함대를 출항시켰으며, 같은 날 저녁 아르플뢰르 인근 해안에 도착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접근하자 프랑스 함대는 슬로이스 해전과 같이 좁은 해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요격에 나섰다. 치열한 해전 끝에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낸 후 프랑스 함대가 후퇴했다. 그렇게 해상 봉쇄가 풀리고, 아르마냑 백작이 이끄는 육군도 퇴각하면서 아르플뢰르 포위전은 잉글랜드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9월, 왕세자 장이 파리로 출발했다. 이자보 왕비와 바이에른 공작은 부르고뉴파와의 평화 노선을 추구했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맞서 단결하고 국왕에게만 충성을 바칠 것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왕세자 장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부르고뉴 공작도 이에 호응하여 잉글랜드와의 중립 조약을 포기했다. 그러나 아르마냑 백작의 강한 반대로 협상은 지연되었다.
1.4. 2차 캉 포위전 (1417)
자세한 내용은 2차 캉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는 처음엔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왔지만, 도중에 헨리 5세에게 설득되어 갑자기 아르마냑파와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선언했다. 헨리 5세는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3세의 선례에 따라 독일 황제와 저지대, 즉 부르고뉴파와 연합해 북부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이 이자보 왕비와 바이에른 공작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1417년 2월, 브르타뉴 공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르마냑파가 다시 파리를 장악하면서 부르고뉴 공작과의 평화 협상이 중단되었다. 바이에른 공작은 협상을 재개하지 않으면 왕세자 장을 에노 백령으로 다시 데려가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에 아르마냑 백작은 바이에른 공작을 기습적으로 체포하려 했지만 바이에른 공작은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4월 5일, 왕세자 장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면서 잉글랜드의 침략에 맞서 프랑스를 통합하고자 했던 지난 1년의 노력은 전부 허사가 되었다.
이자보 왕비는 아르마냑파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군사를 소집했지만, 아르마냑 백작의 신속한 대응 때문에 실패하고 투르 성채에 감금되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아르마냑파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자신을 부패에 맞서는 개혁가로 묘사하면서 정부를 장악한 간신들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명분은 북부 프랑스 전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랭스, 트루아, 오세르 등 많은 도시 공동체가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왕실 관료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7월, 부르고뉴 공작은 또다시 군사를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다. 주요 도시들에서 저항은커녕 오히려 환영을 받으며 부르고뉴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헨리 5세 역시 이 기회를 노려 노르망디 침공을 개시한다.
8월 1일, 맨앳암즈 3000명과 궁수 9000명이 포함된 약 16000명 규모의 잉글랜드군이 센강 하구에 상륙했다. 당장 부르고뉴 공작을 막기에 급급한 파리 정부가 노르망디로 구원군을 보낼 가망은 없었으므로 상륙 지점 인근 도시와 요새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바로 항복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군은 내륙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15일 노르망디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인 캉을 포위했다. 잉글랜드군은 대포로 성벽을 뚫은 뒤 9월 4일 도시 내부에 진입해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9월 19일, 결국 아성에서 농성하던 주둔군마저 항복하면서 도시가 점령당했다.
1.5. 파리 포위전 (1417)
1417년 8월 26일, 부르고뉴군이 보베에 집결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소금세를 제외한 모든 전쟁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언한 뒤, 센강과 우아즈강의 요충지들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파리를 포위했다. 그리고 투르에 감금된 이자보 왕비를 구출해 아르마냑파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아르마냑파는 센강 상류의 요충지 코르베유를 지켜냈지만, 곧 파리의 주요 곡물 공급원 중 하나인 보스 지방의 요충지인 샤르트르와 에탕프가 함락당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프랑스 남부에도 지원을 호소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세금 경감 약속 때문에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편 잉글랜드군이 캉을 점령한 뒤, 바이외와 리지외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어린 알랑송 공작의 어머니 마리 드 브르타뉴는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강경히 맞섰고, 4000여 명의 병력을 소집해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요새와 도시들에 배치했다. 그러나 고작 2주 안에 동프롱과 팔레즈를 제외하고 전부 함락당했다.
이후 헨리 5세는 노르망디에서 정복한 영토를 안정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민간인에 대한 폭력을 금지하는 칙령을 군대에 다시 선포했고, 과도한 세금의 폐지를 약속하며 노르망디인들을 회유했다. 고위 지방관은 잉글랜드인으로 대체되었지만 하급 행정부는 프랑스의 제도들과 인사를 그대로 유지했다. 생드니 수도원 연대기의 저자는 노르망디가 빠르게 정복된 이유는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오랜 내전으로 입은 피해와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지만, 이렇듯 지혜롭고 공정한 통치자로 이름난 헨리 5세의 평판도 한몫했다고 언급한다.
1.6. 파리 학살 (1418)
1418년 1월, 아르마냑 백작이 에탕프와 몽테리를 탈환하면서 파리 시의 봉쇄가 풀렸다. 하지만 남은 전력을 총동원한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상리스 탈환에 실패하면서 아르마냑군의 사기는 다시 추락했다.
한편 노르망디에서는 팔레즈가 결국 잉글랜드에 점령당했고, 반년 가까이 지속된 정부의 무대응에 완전히 사기가 꺾인 요새와 도시들이 줄줄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계속 아무런 방해 없이 에브뢰를 점령한 뒤 루앙 공략을 준비한다.
5월,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중재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 공작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아르마냑파의 지도층 대부분은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부르고뉴 공작을 사면하고 평화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지만, 아르마냑 백작과 일부 지도층의 강력한 반대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5월 29일 새벽, 아르마냑 정부에 불만을 품은 파리 시민들의 협조로 부르고뉴군 분견대 수백 명이 파리 시내에 진입했다. 이들은 거리에서 '부르고뉴와 평화'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의 지지를 구하는 한편, 오텔 생폴을 습격해 샤를 6세를 확보했다. 하지만 왕세자 샤를은 탄기 뒤 샤텔과 함께 탈출해 바스티유 요새로 도망쳤다.
갈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결국 부르고뉴파가 파리 시를 장악했다. 파리 주교를 포함한 아르마냑파 지도층 일부는 부르고뉴파로 전향해서 목숨을 건졌지만 아르마냑 백작을 비롯한 나머지는 폭도들에게 붙잡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아르마냑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성을 잃은 폭도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포함해 아르마냑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붙잡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날 무고한 희생자를 포함해서 약 2000명의 파리 거주자가 부르고뉴 지지자들의 보복에 희생되었다.
1.7. 루앙 포위전 (1418)
자세한 내용은 루앙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18년 7월 초, 잉글랜드군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성벽과 석조 다리를 가진 도시 퐁드라르슈를 포위했다.
7월 14일, 부르고뉴 공작이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퐁드라르슈의 구원 요청을 전달받은 부르고뉴 공작은 곧 가겠다고 답변했지만, 아르마냑파 잔당들이 왕세자 샤를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버티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10월 경, 잉글랜드군의 루앙 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파리 대학의 교수들은 지금이라도 구원군을 보낼 것을 촉구하며, 루앙 하나만 지켜도 잉글랜드가 노르망디에서 어부지리로 쌓은 위태로운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루앙을 잃으면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잃으리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쫓겨난 아르마냑파든 아르마냑파 잔당들에게 반포위된 부르고뉴파든 다른 곳으로 병력을 돌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두 파벌 모두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는 있었기 때문에, 9월 16일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잉글랜드에 맞서 연합한다는 내용의 평화 조약이 공식적으로 비준됐지만 며칠도 못 가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12월 26일, 왕세자 샤를은 스스로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섭정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아르마냑과 왕세자 파벌은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정부와 결별했다.
이듬해인 1419년 1월 19일, 루앙 시는 결국 잉글랜드에 항복한다.
1.8. 부르고뉴 암살 (1419)
1419년 3월, 스코틀랜드가 왕세자 샤를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1402년 험블턴 힐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로 신식 갑옷을 수입하고 장궁병을 도입하고 군율을 확립하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 상당한 강군으로 거듭나 있었다.
한편 루앙이 함락된 뒤에도 부르고뉴파와 왕세자파는 자신들이 처한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침략자인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것은 평판이 추락하고 지지세력이 분열될 위험이 있으므로 그다지 고려할 만한 선택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상대 파벌과 타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와 단지 협상을 하는 것은 상대 파벌에 대한 위협 수단으로서 너무나 유용했다. 5월, 왕세자파와 부르고뉴파는 3개월의 휴전을 맺고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가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뜸을 들이면서 협상이 예정보다 지연되었다.
7월 11일, 마침내 왕세자파의 양보로 사면, 관직 배정,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푸이이에서 왕세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부르고뉴 공작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망쳤다. 클래런스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내전으로 황폐화돼 있었던 파리 시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왕국의 수도를 보호하지 못한 부르고뉴 공작의 명성 또한 추락했다.
왕세자파는 이자보 왕비와 동맹을 맺고 샤를 6세까지 확보한 부르고뉴 공작에 비해 명분 면에서 열세에 있었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푸이이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하지만 부르고뉴파를 제압하지 못하는 이상 이전처럼 교착 상태가 계속될 뿐이었고, 잉글랜드의 위협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감당 못할 일을 벌였음을 알게 된 왕세자파의 지도부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9월 10일, 왕세자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한다는 구실로 부르고뉴 공작을 회의에 초대했다. 그리고 탄기 뒤 샤텔과 다른 암살자들이 몽트뢰유 다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을 습격해 살해했다.
하지만 왕세자파의 기대와 달리 부르고뉴파는 분열되지 않았다. 왕세자 샤를의 어머니인 이자보 왕비는 내통자라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부르고뉴파와 협력을 강화했고, 파벌 간의 타협과 정부의 통합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도시 공동체들은 헨리 5세와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했다. 이제는 프랑스 정복도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 헨리 5세는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동군연합을 제안했고, 도시 대표단은 헨리 5세의 솔직한 말투와 그의 군대의 규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0월, 잉글랜드군이 묄랑 다리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부르고뉴파 주둔군은 신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게 파리 시민들이 잉글랜드군에 항복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헨리 5세와 신속하게 합의할 것을 촉구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처음엔 신중한 태도로 협상을 시작했지만 헨리 5세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은 헨리 5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1.9. 트루아 조약 (1420)
몽트뢰유 다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이 암살된 후, 브르타뉴 공작은 처음에는 왕세자 샤를의 편을 들었지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이 현실화되자 부르고뉴 공작으로 편을 바꾸려 했다.
그런 이유로 1420년 2월, 왕세자파는 브르타뉴의 이탈을 막기 위해 브르타뉴 공작을 납치해 샹토소 요새에 감금했다.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부인 잔 드 프랑스는 신속히 군사를 소집해 공작령 내의 왕세자파 지지 세력을 제압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감금된 샹토소 요새를 포위한다.
5월 21일, 트루아 대성당에서 헨리 5세를 샤를 6세의 후계자이자 섭정으로 삼는 내용의 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헨리 5세와 발루아의 카트린의 약혼이 이루어졌고 부르고뉴 공작을 비롯한 프랑스인들은 미래의 프랑스 왕이 될 헨리 5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얼마 뒤 잉글랜드군이 파리 시에 입성하고 고위 관직의 일부가 잉글랜드인으로 대체된다.
헨리 5세는 곧바로 센강과 마른강의 요충지들에 위치한 왕세자파 요새들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6월 11일, 잉글랜드군이 상스를 점령했고, 7월에는 몽트뢰유를 점령한 뒤 믈룅을 포위했다.
7월 5일, 결국 샹토소 요새 주둔군이 공작부인에게 항복하고 브르타뉴 공작을 석방했다. 브르타뉴의 왕세자파 귀족들은 모두 영지를 몰수당한 뒤 추방되었고, 브르타뉴 공작은 그렇게 강화된 권력으로 잉글랜드와 동맹 협상을 시작한다.
11월 17일, 믈룅이 4개월 간의 포위공격 끝에 점령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분노한 헨리 5세는 항복한 주둔군 중 많은 수를 처형하거나 투옥했다.
12월, 파리 삼부회에서 샤를 6세는 트루아 조약이 자신의 의지이자 국가의 의지라고 선언했다. 그밖에 왕세자 샤를을 포함한 8명이 부르고뉴 공작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고, 전비 마련을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1.10. 보제 전투 (1421)
자세한 내용은 보제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1년 2월 14일, 헨리 5세는 다시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런던에 돌아왔다. 이후 헨리는 2개월 동안 잉글랜드 전역의 주요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과 그것을 위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력 있게 연설하는 동시에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대중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한편, 헨리 5세의 총독으로서 프랑스에 남아 있던 클래런스 공작은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앙주 지방으로 원정을 나갔다. 이에 스코틀랜드 지원군과 소수의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왕세자파 군대 6000여 명이 요격에 나섰다. 3월 14일, 클래런스 공작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행군하던 중 보제에서 왕세자파 군대와 마주쳤다. 수적으로 크게 열세인 상황에서 클래런스 공작은 헌팅던 백작 등 노련한 지휘관들의 후퇴 권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개시했고, 클래런스 공작 자신을 비롯해 병력의 2/3이 전사하고 생존자들이 대부분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한다.
보제 전투는 4개월에 걸친 믈룅 포위전에 이어, 잉글랜드군은 무적이 아니며 프랑스인들이 파벌로 분열되고 사기가 꺾였을지언정 프랑스의 국가적 역량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많은 프랑스 귀족과 도시들이 왕세자파로 전향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다시 왕세자파로 편을 바꿨고, 5월 왕세자파 삼부회는 상당한 액수인 80만 리브르의 전쟁세를 승인했다. 이에 힘입어 왕세자파 군대는 보스 지방을 공격해 상당한 영토를 탈환한다.
1.11. 드뢰 포위전 (1421)
1421년 6월 11일, 보제 전투의 소식을 들은 헨리 5세는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칼레에 상륙했다. 처음의 계획은 피카르디에 남아있는 왕세자파 잔당들을 진압하고 지역을 안정화하는 것이었으나, 곧 왕세자 샤를이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샤르트르로 진군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이 망트에 도착하자, 왕세자파는 샤르트르의 포위를 풀고 방돔으로 후퇴해 브르타뉴군과 합류한다.
8월 20일, 잉글랜드군은 약 한 달간의 포위공격 끝에 드뢰를 점령했다. 헨리 5세는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방돔으로 진군했지만 왕세자파의 군대가 12000명으로 두 배 이상 많았고, 노련한 지휘관인 버컨 백작이 잉글랜드군을 요격하러 나오지 않고 진영을 지키자 별수 없이 동쪽으로 후퇴한다.
잉글랜드군이 동쪽으로 향하자 브르타뉴군은 브르타뉴 방면으로 철수했고, 스코틀랜드와 프랑스군 일부는 오를레앙을 방어하기 위해 동쪽으로, 나머지 대부분은 남쪽의 가스코뉴 전선으로 진군했다. 프랑스군의 재배치를 확인한 헨리 5세는 강행군으로 루아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 중인 왕세자군 주력을 기습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루아르강을 따라 동쪽으로 후퇴한다.
한편 8월 29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왕세자파의 지원군이 피카르디 서부에서 행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요격에 나섰다. 지원군은 르 크로투아 인근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강이 불어나는 바람에 솜강의 여울목을 건너지 못하고 부르고뉴군에 따라잡혔다. 1000여 명의 부르고뉴 기병들과 비슷한 숫자의 왕세자군의 전투가 벌어졌고, 왕세자군은 병력의 약 절반이 전사하고 주요 지휘관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생존자가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승리한 부르고뉴군 역시 군사작전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별다른 이득이나 명성을 얻지 못하고 퇴각한다.
1.12. 모 포위전 (1422)
자세한 내용은 모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1년 9월 말,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던 잉글랜드군은 욘 강의 요충지 빌뇌브를 포위공격해서 5일 만에 점령했다. 그리고 마른 강의 요충지이자 강력한 방어시설과 수비대를 갖춘 도시 모를 포위했다.
하지만 주둔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했고, 포위군은 악천후, 질병, 탈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급여 기록에 따르면 크리스마스까지 잉글랜드군은 전체 병력의 1/6을 잃었다. 특히 헨리 5세의 사촌인 젊은 기사 존 콘월이 포격으로 사망하고, 외아들의 잔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존 콘월 경이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사건으로 포위군의 사기가 추락했다. 존 콘월은 1412년 클래런스 공작의 원정부터 시작해 프랑스에서 진행된 모든 군사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명성 높은 지휘관이었다.
12월 6일, 윈저 성에서 미래의 헨리 6세가 탄생했다. 크리스마스 무렵 소식을 접한 헨리 5세는 크게 기뻐하지 않고 특유의 금욕적인 반응을 보였다.
1422년 5월, 잉글랜드군의 주요 지휘관 여럿이 전사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모 시와 요새가 점령되었다. 마른 강의 수운을 추가로 확보하면서 파리 시의 식량 공급이 안정화되었고, 지역에서 가장 정예한 주둔군의 전멸과 가장 강력한 요새의 함락은 다른 왕세자파 요새 주둔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모가 함락된 이후 왕세자파는 북부 프랑스에서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벌이지 못했다. 보제 전투 이후 왕세자파로 돌아섰던 브르타뉴 공작도 잉글랜드의 힘을 인식하고 다시 잉글랜드로 편을 바꿨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보제 전투의 패배, 솜 강에서의 무리한 강행군, 그리고 모 포위전으로 주력군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는 명목상으로는 왕세자 샤를 대신 헨리 5세를 지지했지만 사실상 중립이었고 브르타뉴는 대놓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확고한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르고뉴는 북부 프랑스 도시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힘이 빠졌다. 결국 헨리 5세는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1.13. 헨리 5세의 죽음 (1422)
1422년 6월 25일, 탄기 뒤 샤텔이 지휘하는 왕세자군이 루아르강의 요충지인 라 샤리테를 점령하고 코스네를 포위했다.
7월 7일, 헨리 5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벵센으로 옮겨졌다. 그는 가마에 탄 채로라도 코스네를 구하기 위한 군대를 지휘하려 했지만, 코르베유까지 행군한 다음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과 삼촌인 엑서터 공작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접근하자 왕세자군은 곧바로 포위를 풀고 회군한다.
8월 31일, 바지선과 가마에 실린 채 뱅센으로 돌아온 헨리 5세는 결국 신하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그는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를 잉글랜드의 호국경이자 어린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했고, 베드퍼드 공작에게는 프랑스에서의 군사, 외교, 행정을 맡겼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아쟁쿠르 전투와 모 포위전에서 붙잡은 프랑스 포로들을 아들인 헨리 6세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석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왕세자파가 우연히 내부에서 붕괴되지 않는 한 전쟁이 협상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지만, 그 협상 조건에서 노르망디만은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했고 30일, 왕세자 샤를이 뮈엉 성에서 열린 검소한 즉위식에서 샤를 7세로 선포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카스티야, 그리고 교황 마르티노 5세 역시 샤를 7세의 왕권을 인정했지만, 잉글랜드인들은 여전히 그를 도팽이라 불렀고 심지어 잔다르크를 포함한 많은 프랑스인들도 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 그렇게 여겼다.
2. 부르주 왕국 (1423~1428)
친구들아, 뭐가 남았어,
우리 도팽에게, 참 고귀한 그분께?
오를레앙, 보장시,
노트르담 드 클레리, 그리고
방돔, 방돔!
프랑스 동요, 방돔의 종
우리 도팽에게, 참 고귀한 그분께?
오를레앙, 보장시,
노트르담 드 클레리, 그리고
방돔, 방돔!
프랑스 동요, 방돔의 종
2.1. 르 크로투아 포위전 (1423)
헨리 5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의 섭정으로 임명된 베드퍼드 공작 존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형 헨리를 닮았다는 평판을 듣는 인물이었다. 즉 신실하고 금욕적인 성격이었고 유능한 행정가이자 정치인이자 군사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형과 달리 아쟁쿠르 전투 같은 전설적인 위업을 세운 기사로서의 명성을 가지지 못했다.
그를 형보다 만만한 인물로 여긴 프랑스인 관료들은 샤를 6세 시기의 법과 관습을 고수하며 잉글랜드 정복자들을 위한 새로운 법을 승인하는 것을 꺼렸다. 파리고등법원은 샤를 6세가 사망한 직후 어린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인정했지만 베드퍼드 공작의 섭정 권한은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 법에 따르면 미성년 국왕의 정부는 섭정이 아니라 왕족과 고관들이 포함된 의회로 구성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베드퍼드 공작이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파리 시의 관료들 앞에서 맹세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합의가 이루어진다.
부르고뉴와의 동맹 역시 당장 파기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왕세자 샤를은 파리 삼부회에서 무법자로 선언되고 상속권을 박탈당했지만 프랑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그의 왕권을 지지하고 있었고,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패배하는 편에 서느니 아버지의 원수와 타협하는 길을 선택할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역대 부르고뉴 공작들이 북부 프랑스 도시들의 지지를 얻고 파리 시와 정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간신들로부터 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샤를 6세가 마침내 사망하면서 효력이 다했다. 15세기 잉글랜드 직물 산업의 부상으로 잉글랜드 도시들과 저지대 도시들 간에 경쟁 관계가 싹트면서 부르고뉴와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다.
베드퍼드 공작의 동생이자 잉글랜드의 호국경인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와 부르고뉴 공작 간의 개인적인 갈등 역시 불안 요소였다. 1423년 1월, 글로스터 공작은 에노 백작부인 자클린과 갑작스럽게 결혼했다. 자클린은 원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사촌인 브라반트 공작 장 4세의 아내였지만 그녀가 홀란트와 질란트의 상속권을 놓고 요한 3세와 벌이고 있었던 분쟁에서 남편이 그녀의 동의 없이 양보를 한 일로 크게 다툰 뒤 결혼 무효를 선언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해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5세로서는 저지대의 상속권으로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오히려 프랑스 점령지 유지에 필수적인 부르고뉴 공작과의 동맹 관계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지만, 기사도적인 군주로서의 명성 또는 개인적인 동정심 때문에 자클린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헨리 5세가 죽자마자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이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센강의 요충지 묄랑을 기습해 점령했다. 하지만 지원 부대와 전비 마련이 예정보다 지체되었고, 잉글랜드군은 3월 1일 묄랑 시를 탈환한 뒤 여세를 몰아서 몽테리와 에탕프 등 파리 인근의 요충지들을 점령한다.
4월 17일, 아미앵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잉글랜드, 부르고뉴, 브르타뉴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베드퍼드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의 여동생 안과 결혼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과 브르타뉴 공작 모두 샤를 7세와 비밀리에 협상을 계속했다.
같은 시기, 랠프 버틀러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솜강 하구의 요충지 르 크로투아를 포위했다. 하지만 주둔군의 격렬한 저항에 포위공격은 몇 달째 진전이 없었다.
5월 초, 프랑스군이 센강의 요충지인 노장을 포위했다. 이곳은 파리 시의 식량 공급을 통제할 수 있는 수운 중심지이자 랭스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5월 말, 파리로 돌아온 베드퍼드 공작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노장으로 진군했다. 곧 노장의 포위를 풀고 몽테귀용 성을 제외한 인근의 모든 요새를 탈환했지만, 몽테귀용 주둔군의 격렬한 저항에 잉글랜드군의 발목이 잡힌 사이 프랑스군이 이브리를 기습해 점령하고 보스 지방에서 파리 시로의 식량 공급을 방해했다. 이렇게 되자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르 크로투아 포위군에 대한 지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존 파스톨프를 보내 파리 북동부의 주요 프랑스군 주둔지인 파시를 점령하게 했고 자신은 직접 오르세를 점령한다.
2.2. 크라방 전투 (1423)
자세한 내용은 크라방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3년 6월 22일, 몽테귀용의 포위를 풀고 랭스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버컨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6월 26일경, 버컨 백작의 군대가 오세르 인근에 도착했을 때, 크라방의 수비대장인 잉베르가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크라방은 고작 며칠 전 부르고뉴군에 점령되었으나, 잉베르는 버컨 백작을 설득하기 위해 부하들 중 일부가 크라방의 아성에서 저항하고 있고 나머지는 도시 안에 포로로 잡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크라방에 도착한 버컨 백작은 곧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지만, 도시 성벽이 낮고 허술하며 방어용 대포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포위 공격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도시는 예상보다 잘 버텼지만 한 달도 못 되어 함락 직전에 몰린다.
한편 잉글랜드군은 가용한 모든 야전 병력이 르 크로투아와 몽테귀용과 파리 인근에 묶여 있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어쩔 수 없이 몽테귀용 포위군 일부를 분리해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지휘하에 파견했다. 이들은 7월 30일 오세르에 도착해 부르고뉴군과 합류했다.
8월 1일 아침, 잉글랜드 부르고뉴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크라방 시 앞에서 욘 강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정오 무렵 잉글랜드군이 강 건너편의 프랑스군 대열에 대포 사격을 가한 뒤 기습적으로 화살을 퍼부으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솔즈베리 백작이 직접 선봉대를 이끌고 다리를 건넜고, 백병전으로 적진을 밀어붙였다. 그동안 강 상류에서도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장궁병들의 엄호를 받으며 도하를 마친 뒤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마지막으로 전세가 유리하게 기운 것을 확인한 크라방의 부르고뉴 주둔군 수백 명이 출격해 프랑스군의 후방을 공격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크라방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전체 병력의 1/3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지면서 사실상 전멸했고, 버컨 백작을 비롯해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프랑스군은 이후 반년 이상 전면적인 공세를 시도하지 못했고, 따라서 잉글랜드군은 노르망디 주둔군을 감축해 르 크로투아와 몽테귀용의 포위공격을 강화하는 등 전략적 이득을 누렸다.
하지만 부르주에서 샤를 7세와 그의 고문들은 전투의 소식을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게 받아들였다. 잉글랜드는 지금까지 확장된 전선마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전쟁의 성패는 부르고뉴와 브르타뉴와의 협상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 교착 상태가 계속될 경우 이들이 최종적으로 어느 편을 선택할 지는 너무나 분명했다.
2.3.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1423)
자세한 내용은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3년 9월 7일, 라 뷔시에르의 프랑스 주둔군이 항복하는 척 접근한 뒤 기습을 가해 부르고뉴군 원수 장 드 툴롱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소식은 부르고뉴의 국경 지역에 공황을 일으켰다. 부르고뉴 공작은 급히 파리를 떠나 트루아로 향했고, 그곳에서 지휘관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결국 장 드 툴롱종의 동생 앙투안이 원수 대행으로 임명되었고, 부르고뉴 전역에 소집령이 내려졌으며, 잉글랜드에도 지원을 요청해 명성 높은 지휘관인 윌리엄 글래스데일이 솔즈베리 백작의 대리인으로서 파견되었다. 글래스데일은 1417년 헨리 5세의 노르망디 침공에 궁수로 참전해 솔즈베리 백작의 집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의 동생인 존 드 라 폴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몽생미셸을 포위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명령에 따르지 않고 앙주 지방으로 진군해 기마약탈을 벌였다. 그러나 수많은 포로와 소떼와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던 중, 9월 26일 새벽 라 브로시니에르 마을에서 오말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다.
잉글랜드군은 황급히 말에서 내려서 대기병 말뚝을 박고 참호를 파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 측면으로 우회한 프랑스 기병대가 진영에 들이닥쳤고 정면에서는 하마한 맨앳암즈들이 도보로 진군해 왔다. 7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문자 그대로 전멸한다.
오말 백작은 여세를 몰아서 아브랑슈를 포위하지만, 베드퍼드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이브리 포위공격을 포기하고 진군해오자 재빨리 후퇴한다.
11월, 라 이르가 300여 명의 지원군과 함께 기즈에 도착했고 12월 13일, 기즈의 수비대장인 포통 드 생트레유는 솜 강의 요충지인 앙을 기습해 점령했다. 부르고뉴군은 곧 앙을 탈환했지만, 이를 위해 기즈 포위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23일경, 부르고뉴군이 작년에 빼앗긴 루아르강의 요충지 라 샤리테를 기습해 탈환했다.
2.4. 낭트 회담 (1424)
1424년 1월 7일,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콩피에뉴와 크레이를 기습해 점령했다.
2월, 몽테귀용이 마침내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시기,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족 조앤 보퍼트와 결혼했다. 그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와 7년 휴전을 맺었지만, 프랑스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했고 이미 준비된 대규모 지원군이 프랑스로 출발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전선이 안정화되면서 인력과 자원에 여유가 생겼고, 프랑스에 도착한 지원군은 베르뇌유에서 전멸하니 결과적으로 그를 풀어준 것은 잉글랜드에 이득이 되었다.
2월 말, 더글러스 백작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라로셸에 상륙했다.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거리를 행진한 뒤, 샤를 7세는 더글러스 백작에게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족에게만 수여되는 작위인 투렌 공작위를 수여하고 그를 프랑스 전역에서 지휘권을 가진 국왕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3월 3일, 르 크로투아가 마침내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4월 중순, 베드퍼드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콩피에뉴와 크레이를 탈환했다. 이후 솔즈베리 백작이 상당한 규모의 야전군과 포병 부대를 이끌고 샹파뉴로 향했고, 프랑스군이 주둔한 소규모 요새들을 점령하면서 또다시 기즈 포위공격을 준비했다.
5월, 샤를 7세의 장모인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의 중재로 낭트에서 브르타뉴와 부르고뉴와 프랑스 대표 간의 회담이 열렸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주요 동맹인 브르타뉴와 부르고뉴는 그를 버리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샤를 7세는 12000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침공을 준비 중이며, 잉글랜드 군대는 모두 북부 프랑스의 넓은 전선에 흩어져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2.5. 베르뇌유 전투 (1424)
자세한 내용은 베르뇌유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6월 22일, 잉글랜드군이 다시 이브리를 포위했다. 스코틀랜드 지원군의 도착과 낭트 회담으로 자신감을 얻은 샤를 7세는 주력군을 보내 이브리의 포위를 풀기로 결심한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도 프랑스 주력군과 야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예비 병력을 모두 이브리와 베르농 인근에 소집했다.
8월 14일, 베드퍼드 공작은 총 8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적의 접근이 예상되는 이브리 남쪽 고지대에 진을 쳤다.
다음날인 15일 아침, 이브리 인근에 도착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베드퍼드 공작의 진지를 정찰한 다음 이곳에서 싸우면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결론을 내리고, 뒤처진 이탈리아군의 도착을 기다릴 겸 잉글랜드군을 유인하기 위해 이브리 서쪽에 있는 주요 잉글랜드군 주둔지인 베르뇌유로 진격했다. 베드퍼드 공작도 프랑스군을 거리를 두고 추격해 에브뢰에 도착한다.
그날 저녁 베르뇌유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스코틀랜드인 수백 명을 잉글랜드인 포로처럼 변장시키고는, 도시에 사절단을 보내 이브리 인근에서 잉글랜드군을 크게 이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속아넘어간 주민들이 성문을 열면서 도시와 성채가 점령되었다.
16일 아침, 프랑스군의 상황을 들은 베드퍼드 공작은 군대를 이끌고 베르뇌유로 향했다. 곧 결전이 벌어질 것임을 예감한 그는 행군 도중 부대들을 방문해 그들이 정의롭고 가치 있는 대의를 위해 국가, 고향, 부모, 자녀, 아내의 품을 떠나 주권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잉글랜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오말 백작 등 프랑스인 지휘관들은 잉글랜드군과 결전을 벌이는 것을 반대했지만 더글러스 백작과 버컨 백작은 아군이 병력, 사기, 지형에서 모두 유리하다며 야전을 고집했다.
17일 오후, 유리한 위치에 방어 진형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군을 향해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양 측면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기병대가 돌격했고, 궁수 부대를 짓밟고 맨앳암즈 전열을 돌파해 잉글랜드의 후방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기병 중 일부는 도망치는 잉글랜드군을 보고 자신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후방의 짐마차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잉글랜드군은 베드퍼드 공작의 깃발을 중심으로 재집결했고, 이런 위기를 대비해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예비대 궁수들이 패잔병을 추격하거나 짐마차를 약탈하러 가지 않고 남은 기병들을 향해 화살을 쏟아부었다. 이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기병들은 아군 진영으로 후퇴했고, 마침 공격을 개시한 프랑스군 하마 맨앳암즈들은 후퇴하는 아군 기병들 때문에 진형이 흐트러진 채 잉글랜드 맨앳암즈들과 백병전을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전멸했다. 전체 병력의 60%에 달하는 7262명이 전사했고, 그중 도보로 싸운 하마 맨앳암즈와 궁수대의 전사자 비율은 80%에 달했다. 버컨 백작, 더글러스 백작과 그의 아들 제임스 더글러스, 오말 백작과 나르본 자작 등 대부분의 지휘관이 전사했고, 알랑송 공작은 운이 좋게도 살아남아 포로로 잡혔다.
베르뇌유 전투에서의 승리로 프랑스의 야전 전력을 소멸시킨 뒤, 베드퍼드 공작은 우선 북부 프랑스의 프랑스군 요새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결국 기즈와 비트리의 주둔군은 각각 내년 3월과 4월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약속한다.
다음 목표는 메인 지방이었다. 1424년 9월 12일,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몽생미셸을 포위하는 동안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몽을 점령했고, 다시 르망으로 진군해 도시 주변의 요충지들을 장악하며 포위공격을 준비했다.
11월 27일,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아내인 에노 백작부인 자클린과 함께 에노 백령의 수도인 몽에 입성했다. 다음 날, 에노 백령의 삼부회는 자클린의 전 남편인 브라반트 공작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자클린과 그녀의 현 남편인 글로스터 공작을 영주로 인정하기로 의결한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사촌을 돕기 위해 군사를 소집했다.
11월 30일, 마콩에서 다시 브르타뉴와 부르고뉴와 프랑스 대표 간의 회담이 열렸다.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아버지의 암살 건에 대하여 샤를 7세가 어려서 나쁜 조언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하며, 그런 조언을 한 신하들을 해임해야 한다고 요구를 밝혔다. 브르타뉴 공작 역시 같은 의견이었지만 더 직설적으로, 아르마냑파가 궁정에서 축출되지 않는 한 브르타뉴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결국 아르마냑파와 완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장 루베 등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진다.
2.6. 몽 포위전 (1425)
지난 세기 내내 평화로웠던 에노 백령과 브라반트 공국의 국경 지대에서는 이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 습격대들이 번갈아가며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지옥이 펼쳐졌다. 심약한 인물이었던 브라반트 공작 요한은 이러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1425년 1월, 브라반트 공국의 삼부회는 그의 동생이자 유능하고 경험 많은 군인인 생폴 백작에게 군사 지휘권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같은 시기, 홀란트와 질란트의 통치자이자 자클린의 정적인 바이에른의 요한이 자클린의 제부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를 상속인으로 지명했었다. 법적으로 바이에른의 요한은 자클린의 전 남편에게 행정권을 위임받은 섭정에 불과했고 홀란트와 질란트의 합법적인 영주는 자클린이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의 전 남편이자 자신의 동맹인 브라반트 공작 요한을 영주로 선포한다.
2월, 시농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3월 11일, 생폴 백작이 동부 국경의 요충지 브렌을 점령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지지한 도시 유력자들을 처형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설 때문에 군사작전은 그대로 중단되었고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전쟁이 중단된 동안 글로스터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과 편지로 열심히 논쟁을 벌이다가 결투 날짜까지 잡는다.
3월 말, 글로스터 공작은 갑작스럽게 에노 백령을 떠나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는 추밀원에 브라반트 공작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연히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베드퍼드 공작의 중재로 결투는 취소되었다.
4월, 장 루베의 반대 파벌인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 아르튀르 드 리슈몽, 그리고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사악한 반역자들'로부터 샤를 7세를 구출하겠다며 군사를 소집했다.
5월 중순, 글로스터 공작이 없는 사이 브라반트군이 몽을 포위했다. 몽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강경히 맞섰지만 결국 6월 13일 항복한다. 글로스터 공작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처형되고 자클린은 부르고뉴 공작의 '보호' 아래 헨트에 감금되었다.
6월 초, 부르주 인근에서 장 루베와 샤를 7세의 군대가 리슈몽과 욜란다의 군대와 대치했다. 아르마냑파 관료들은 비록 무능하고 폭력적이며 그동안의 악행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악명이 넘쳤지만 샤를 7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왔다.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의 충성을 얻고 부르고뉴 공작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아르마냑파를 숙청할 수밖에 없었다. 욜란다의 설득에 넘어간 샤를 7세는 부르주로 돌아와 귀족들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하고는 장 루베를 해임한다.
2.7. 르망 포위전 (1425)
1425년 7월 20일, 솔즈베리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르망을 포위했다. 포병들이 2주 동안 3000파운드 이상의 화약을 소비하며 포격을 쏟아부었고, 8월 2일 도시는 결국 항복한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요충지의 요새들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시작했다.
9월 2일 새벽, 헨트 시에 감금돼 있었던 자클린이 남장을 하고 탈출해 홀란트의 주요 도시인 하우다에 도착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대구파'의 반대 세력인 홀란트의 지주 귀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자클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신서를 하기 시작했다.
10월 초, 소뮈르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샤를 7세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전까지의 협상 조건을 재확인한 뒤, 브르타뉴 공작은 샤를 7세에게 신하로서 신서를 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버지의 원수인 아르마냑파가 숙청됨으로써 그와 샤를 7세의 화해의 유일한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에 격노하며 2년 전 아미앵에서 맺은 조약에 따라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브르타뉴 공작을 적으로 취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브르타뉴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한다.
10월 중순경,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소규모 프랑스군이 르망을 기습하러 갔지만 인근의 작은 마을 생줄리앙에서 잉글랜드 부대 하나와 마주친 뒤 도망쳤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마옌 시를 포위했다. 6주 동안의 치열한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협상 끝에 주둔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이 이루어진다.
10월 22일, 부르고뉴 공작의 신속한 대응으로 대구파 도시들에서 대규모 민병대가 소집되어 하우다로 진격했지만, 자클린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학살당하고 부대 깃발을 전부 빼앗긴다. 사기가 오른 자클린 지지 세력이 대구파 도시들을 습격하면서 자클린의 탈출 사건은 본격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11월 초, 프랑스군이 라페르테를 기습해 점령했다.
2.8. 생잠 포위전 (1426)
자세한 내용은 생잠 요새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6년 1월, 서퍽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기병 500명이 브르타뉴를 침공해 렌 시 인근까지 기마약탈을 벌였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소집한다.
1월 13일,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자클린의 군대와 글로스터 공작이 잉글랜드에서 보낸 지원군이 뒤늦게 요격에 나섰다. 전초전에서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부르고뉴 쇠뇌수들을 압도했지만, 숫자가 더 많은 부르고뉴 맨앳암즈들의 돌격에 잉글랜드 맨앳암즈 전열이 돌파당하면서 전투는 부르고뉴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2월 2일, 솔즈베리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라페르테를 포위했다.
2월 중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브르타뉴군이 퐁토르송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생잠을 포위했다.
3월 6일, 생잠의 성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도중 리슈몽이 아브랑슈 인근에 파견했었던 브르타뉴 기병대가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브르타뉴군은 이를 잉글랜드의 지원군으로 오해하고는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고, 생잠 주둔군이 성문을 열고 출격하면서 대학살이 벌어졌다. 브르타뉴군은 전멸했고, 서퍽 백작이 남은 병력을 모아서 무방비 상태인 브르타뉴를 침공하자 브르타뉴 공작은 4500프랑을 배상금으로 내고 굴욕적인 휴전을 맺는다.
4월 초, 잉글랜드군이 라페르테를 탈환했다.
같은 시기,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브르타뉴 공작의 상서인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시농으로 끌고 갔다. 리슈몽은 생잠에서의 패전의 책임을 말레트르와에게 돌리며, 그가 잉글랜드와 내통하면서 전비를 횡령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단순한 책임회피가 아니라 브르타뉴의 이탈을 막기 위한 인질로서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6월, 자클린의 군대가 대구파의 주요 도시인 하를럼을 포위한 뒤, 플랑드르에서 파견된 구원군을 전멸시켰다. 부르고뉴 공작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전황이 역전되어 하를럼 포위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자클린의 파벌이 수세에 몰린다.
7월 말, 브르타뉴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에게 또다시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인들이 글로스터 공작을 위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교하게 위조된 문서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 지역을 침공해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벌이기 시작하자 절망에 빠진 브르타뉴 공작은 다시 잉글랜드에 휴전을 제안한다.
12월, 워릭 백작은 브르타뉴 공작의 휴전 제안을 거부하고, 샤를 7세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의 답변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었지만, 부르고뉴 공작의 고문들은 제시된 증거들이 위조문서임을 간파하고 작성자를 찾아내서 고문해 자백을 받는다.
2.9. 퐁토르송 포위전 (1427)
1427년 2월 8일, 샤를 7세의 총신인 피에르 2세 드 지악이 욜란다와 리슈몽의 파벌에 의해 납치되었다. 그는 고문 끝에 첫 번째 아내를 살해하고 세금을 횡령한 혐의를 인정한 뒤 모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살해당했다. 지악과 마찬가지로 오베르뉴의 소귀족 출신인 시종무관 장 베르네가 그를 대신해 시종장으로 임명된다. 하지만 베르네 역시 샤를 7세의 총애를 독점하며 다른 신하들을 견제했고, 리슈몽은 곧 '베르네가 지악보다 더 나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2월 말, 워릭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퐁토르송을 포위했다.
4월 17일, 자클린의 전남편인 브라반트 공작 요한이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작은 에노, 홀란트, 질란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명분을 상실했다. 그러나 부르고뉴의 법률가들은 글로스터 공작과의 재혼이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간통임을 자클린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통치자의 자격이 없다고 우기면서,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영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법적인 근거는 거의 없었지만 부르고뉴의 막강한 권력에 위압된 에노 백령의 삼부회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영주로 인정한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퐁토르송을 구원하기 위해 몽생미셸 동쪽 해안 도로에서 잉글랜드군 식량 수송대를 매복 공격했지만 오히려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이에 사기가 꺾인 퐁토르송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잉글랜드군이 퐁토르송을 탈환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베드퍼드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5월 초,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라발을 점령하면서 잉글랜드의 메인 정복이 거의 완료되었다.
2.10. 몽타르지 포위전 (1427)
자세한 내용은 몽타르지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6월 말, 리슈몽의 부하들이 결국 푸아티에 인근에서 장 베르네를 습격해 살해했다. 하지만 베르네의 후임인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는 이후 6년 동안 정부를 장악하며 리슈몽의 숙적이 될 운명이었다.
7월 15일, 워릭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몽타르지를 포위했다. 이에 리슈몽은 가용한 모든 병력을 자르고에 소집한다. 하지만 그는 왕국의 마지막 전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대한 부담감에 짓눌려 출정 직전 계획을 변경했고, 이에 격분한 샤를 7세는 리슈몽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오를레앙의 사생아' 장 드 뒤누아를 대신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9월 4일, 결국 프랑스군이 자르고에서 출정했다. 다음날 아침 오를레앙의 사생아와 라 이르의 지휘하에 프랑스군 기병대가 숲을 통과하여 몽타르지를 포위한 잉글랜드 진영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 분견대가 몽두블로를 점령하고 방돔 포위공격을 위해 그곳에 옮겨진 대포를 전부 노획하면서 잉글랜드의 작전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다. 훗날 샤를 7세는 몽타르지 전투를 프랑스군이 거둔 최고의 승리이자 잉글랜드에 대한 반격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몽타르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오를레앙의 사생아와 라 이르는 프랑스 전역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반면 잔뜩 겁에 질린 채 작전을 반대한 리슈몽의 군사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고, 그는 이때부터 샤를 7세의 정부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같은 시기, 자클린은 결국 부르고뉴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그녀의 남편인 글로스터 공작이 자신의 숙적이자 장차 공국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그와 이혼하면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부르고뉴와의 동맹에 대한 베드퍼드 공작과 잉글랜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알지 못한 자클린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기대하며 이 제안을 거부한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를 다시 침공하지만 자클린 파벌의 강경한 저항에 어려움을 겪는다.
10월,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귀족들을 결집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시농을 점령한 뒤, 간신인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몽타르지 전투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은 반란군이 뭐라고 떠들든 영향을 받지 않고 메인과 보스 지방에서 공세를 시작해 겨울 동안 최소 9개가 넘는 도시와 성채를 탈환한다.
11월, 브르타뉴 출신 군인 질 드 레와 자크 드 디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작년에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된 메인 지방의 요충지 르루드를 탈환했다.
2.11. 르망 습격 (1428)
1428년 1월 20일,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라페르테를 기습해 탈환했다.
3월 3일, 잉글랜드 상원은 결국 자클린을 구하기 위해 홀란트로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글로스터 공작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글로스터 공작은 빠르게 포기하고 자클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인정한 뒤 내연녀인 앨리너 카범과 재혼한다.
이 일로 자클린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녀의 강인한 의지와 비참한 운명은 많은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런던 시의 여성 대표단이 의회에 출석해 자클린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글로스터 공작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지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실질적인 도움은 되지 않았고, 자클린은 결국 모든 영지의 행정권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게 양도하며 앞으로 그의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영주권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의 델프트 조약에 서명한다.
같은 시기, 샤를 7세가 리슈몽의 반란군으로부터 시농을 탈환한다.
5월 중순, 반란군이 부르주를 점령한다.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부르주 시민들은 반란군이 도착하자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5월 25일,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르망을 기습했다. 주민들의 호응으로 도시 성문이 열렸지만 성채의 잉글랜드 주둔군은 알랑송에 머무르고 있는 탈보트에게 전령을 보낼 수 있었고, 28일 새벽, 강행군 끝에 르망에 도착한 탈보트의 부대가 민가에서 잠을 자고 있는 프랑스군을 기습했다. 라 이르와 부하들은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도시 밖으로 도망친다.
7월 초, 막상 샤를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에 도착하자 겁을 먹은 반란군은 라 트레무아유를 해임하라는 요구마저 철회한다. 대신 그들은 푸아티에에서 삼부회를 소집해 모든 국민들이 정부의 운영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고, 샤를 7세는 이를 받아들인다. 7월 17일, 반란군은 국왕의 사면을 받고 일단 해산되었다.
2.12. 보장시 포위전 (1428)
8월 중순, 솔즈베리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노장을 점령했다. 이후 3주 동안 잉글랜드군은 여러 사단으로 나뉘어 보스 지방의 도시와 요새 40여 개를 점령한다.
9월 8일, 솔즈베리 백작은 보스 지방에서의 군사작전을 마치고 앙주로 향하는 척하다가 오를레앙을 기습했으나,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이를 미리 예상하고 막아냈다. 솔즈베리 백작은 차선책으로 루아르강의 수운을 장악해 오를레앙으로의 물자 수송을 방해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잉글랜드군은 멍을 하루만에 점령하고 다음 날 보장시를 포위한다.
같은 시기, 시농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리슈몽은 불출석했지만 그의 전 반란 동료들은 그를 버리고 국왕의 소집에 응했다. 오를레앙 방어를 위해 50만 프랑의 전쟁세가 승인되었고 장 드 뒤누아가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9월 25일,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보장시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0월 초, 서퍽 백작의 동생인 존 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자르고를 점령하면서 오를레앙 봉쇄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
10월 12일, 잉글랜드군이 다시 오를레앙을 공격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이번에도 속전속결로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고, 도시 남쪽 다리 끝을 지키는 요새 레 투렐을 점령한 뒤 이를 거점으로 다리를 돌파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한다.
오를레앙 방어군은 레 투렐을 지키기 위해 교외의 마을과 수도원을 철거한 뒤 요새 입구 앞에 임시 방벽을 세웠다. 솔즈베리 백작은 불타고 무너진 수도원의 잔해 위에 지휘본부를 세우고 참호를 파고 대포를 배치해 요새화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격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이 임시 방벽을 직접 공격하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땅굴이 방벽 아래까지 도달하자 방어군은 방벽을 버리고 레 투렐로 퇴각한다. 하지만 대포 사격으로 성벽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어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리 가운데에 다시 임시 방벽을 쌓기 시작했다.
10월 24일, 잉글랜드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레 투렐을 점령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측근인 윌리엄 글래스데일을 레 투렐의 수비대장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저녁, 솔즈베리 백작은 도시를 정찰하기 위해 탑의 꼭대기층에 올라갔다가 방어군이 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11월 3일, 솔즈베리 백작이 결국 사망하고 서퍽 백작이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베드퍼드 공작과 서퍽 백작은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오를레앙을 봉쇄하기 위해 전선 곳곳의 주둔지에서 추가 병력을 긁어모으며, 부르고뉴 공작에게도 지원을 요청한다. 부르고뉴 공작은 처음에는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11월 말 갑자기 군사 소집을 취소한다. 결과적으로 오를레앙을 포위한 잉글랜드군의 규모는 약 5000명으로, 도시를 봉쇄하고 보급을 차단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지만 방어군이 출격해서 프랑스의 운명을 건 결전을 벌이기에도 부담이 되는 숫자였다. 그리고 엄폐물을 없애기 위해 철거된 교외 마을들에서 도시로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식량이 부족해졌다.
3.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
여기저기서 흔히 보고되는 것처럼, 자신을 장느 라 퓌셀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는 거짓 예언자로서, 신의 섭리와 자신의 성별에 반하여 두 해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며 이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우리의 주적에게 가서 그의 당파에 속한 성직자, 귀족, 평민들과 함께 자신이 주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여러 번 주장하고, 오만하게도 성 미카엘과 천국의 많은 천사와 성인들, 그리고 성 카타리나와 성 마가렛과 자주 개인적이고 명백한 교제를 했다고 자랑했다. 또한 마치 기사와 향사들처럼 갑옷을 입고, 전투 깃발을 세우고, 매우 큰 악의와 자만과 오만으로 가장 고귀하고 우수한 프랑스 왕의 문장기를 요구하고 얻어내 많은 전투와 포위전에서 그것을 직접 휘둘렀고...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전장에 나가 군인들을 이끌고 큰 부대를 지휘하여 살상을 하고 광범위한 소요와 혼란을 일으켰으며, 그들을 위증과 반역과 거짓되고 미신적인 믿음으로 선동했고,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방해하고 죽음의 전쟁을 다시 일으켰으며, 많은 이들에게 성스러운 여성으로 숭배받고 존경받는 것을 즐겼고, 그밖에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저주받은 일들을 저질렀으며, 이는 많은 곳에서 거의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불쾌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1431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포고문
1431년 6월 잉글랜드 정부의 포고문
3.1. 루브레 전투 (1429)
자세한 내용은 루브레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9년 1월 말, 동레미의 농민 소녀 잔 다르크가 보쿨뢰르 요새의 수비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와 세 번째 만남을 가졌지만 여전히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뒤, 소녀 예언자의 등장에 흥미를 느낀 로렌 공작 샤를이 잔에게 안전통행증을 발급하고 그녀를 직접 만난다. 공작은 어린 소녀가 프랑스를 구원하리라는 오래된 예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잔의 모험을 응원하며 말 한 필과 여비를 주었다. 강력한 후원자의 등장에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도 생각이 바뀌었는지 잔을 위해 추천서를 써주었으며, 장검과 말 한 필을 더 사주고 호위대까지 제공했다.
2월 9일,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보급대가 파리에서 출발했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첩보를 통해 이를 알아냈고, 오를레앙과 블루아에서 총 3500여 명의 병력이 출격해 요격에 나섰다.
2월 12일 오후, 라 이르가 지휘하는 오를레앙 출격부대가 루브레 마을 남쪽 평원에서 잉글랜드 보급대와 대치했다. 라 이르는 곧 도착할 예정인 블루아 부대를 기다렸다. 올바른 결정이었지만 이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짐수레를 묶어 임시 방벽을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조바심을 느낀 프랑스 병사들은 수레 방벽 바깥에 배치된 잉글랜드 궁수들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궁수들이 방벽 안으로 후퇴하자, 스코틀랜드 부대의 지휘관인 존 스튜어트가 라 이르의 명령을 무시하고 스코틀랜드 맨앳암즈들에게 도보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맨앳암즈들이 말을 탄 채 황급히 뒤따랐지만 모두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블루아 부대는 이미 전투가 끝난 것을 보고 후퇴했고, 잉글랜드 보급부대는 5일 뒤 오를레앙 포위군 진영에 무사히 도착한다. 우세한 전력을 가졌으면서도 야전에서 패배하고 작전도 실패한 프랑스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2월 13일, 잔 다르크 일행이 보쿨뢰르에서 시농으로 위험한 여행을 떠났다. 잔은 보쿨뢰르 시 주민들과 호위병들의 조언에 따라 머리를 자르고 남자 옷을 입었다. 잔의 예언과 여행에 대한 소식은 오를레앙과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전해졌고,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일행이 시농에 도착하기 전부터 샤를 7세의 추밀원에서는 그녀가 진짜 예언자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를 놓고 이미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2월 말, 잔 다르크 일행이 시농에 도착했다. 300명의 궁정인으로 가득 찬 홀 안에서 샤를 7세는 잔과 첫 만남을 가졌다. 샤를 7세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며 궁정에 머무르게 했다. 그곳에서 잔은 점성술과 미신에 관심이 많은 알랑송 공작, 샤를 7세의 고해사제 제라르 마셰 등 대귀족과 고관들을 친구로 사귀고 함께 식사를 했다.
3월 초, 잔은 귀족 여성들에게 신체 검사를 받은 뒤 제라르 마셰를 비롯한 궁정 사제들과 면담했다. 그들은 그녀가 정통 교리를 믿고, 독실하고, 침착하고, 자제심 있고, 순결하다고 평가했으며, 그녀의 대답이 교육받지 못한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명확하고 적절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녀를 더 철저히 조사하기 위해 푸아티에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이후 잔은 푸아티에로 가서 1418년 파리 함락 이후 그곳에 망명해 있었던 파리 대학 신학자들의 엄격한 조사를 받는다.
같은 시기, 오를레앙 북서부 잉글랜드 포위군 진영의 방벽과 참호와 포대가 강화되었고, 동쪽 강둑의 생루 교회 폐허에도 새로운 요새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식량 사정이 더 악화되었다.
3.2. 오를레앙 포위전 (1429)
자세한 내용은 오를레앙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9년 4월 27일, 장 드 부삭과 질 드 레가 지휘하는 프랑스 보급부대가 블루아에서 출발했다. 루아르강 남쪽에서 강을 따라 행군해 상류에서 바지선을 띄워 오를레앙으로 보급품을 보낸다는 계획이었다. 잔 다르크는 도시 북서쪽의 포위군 지휘본부를 직접 공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지휘관들은 그녀에게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원래 계획대로 행군을 계속했다.
4월 28일 밤, 보급부대 지휘관들이 오를레앙 인근 강변에서 수비대장 장 드 뒤누아를 만났다. 그제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잔 다르크는 화를 냈지만, 뒤누아는 자신보다 현명한 군인들이 조언하고 동의한 계획이라며 그녀를 달랬다.
다음날 아침, 잔 다르크가 수레 500여 대 분량의 보급품과 200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강을 건넜다. 30년 뒤 장 드 뒤누아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아침 강풍이 불어서 바지선이 상류까지 올라올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잔이 기도를 드리자 바람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오를레앙 방어군이 출격해 생루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묶어놓는 동안 잔 다르크와 지원군이 동쪽 성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했고, 장 드 부삭과 질 드 레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블루아로 돌아갔다.
그날 밤, 소문이 자자한 '오를레앙의 처녀'의 도착에 오를레앙 주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보급품을 호송하는 것이 작전의 전부였고 대부분의 부대가 블루아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곧 알려지면서 주민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5월 1일, 장 드 뒤누아는 황급히 블루아로 가서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지휘관들과 회담했다. 그는 당장 포위군 진영을 공격해서 오를레앙을 해방하지 않으면 주민들이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5월 4일 아침, 뒤누아는 블루아에서 포병대가 포함된 상당한 규모의 지원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에 도착했다. 라 이르와 잔 다르크가 이끄는 기병 500기의 엄호하에 지원군은 무사히 도시에 입성한다.
그날 정오 무렵, 1500명의 방어군이 출격해 생루의 포위군 진영을 기습했다. 잔 다르크는 이 작전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고, 숙소에서 쉬고 있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듣고서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잔이 시종과 집주인의 도움으로 갑옷을 입고 깃발을 든 채 생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의 반격에 후퇴하는 중이었다. 잔은 도망치는 프랑스군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집결시켜 공격을 재개했다. 몇 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생루를 점령한다.
5월 6일 새벽,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선발대가 바지선을 타고 몰래 강을 건너 생장르블랑의 포위군 진영을 점령했다. 곧이어 라 이르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후속부대가 합류해 레 투렐 근처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점령했다. 잔은 이 전투에서 마름쇠를 밟아서 발에 부상을 입었고, 지휘관들의 설득 끝에 오를레앙으로 돌아갔다. 라 이르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그날 회의 끝에, 이대로 레 투렐을 공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며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당분간은 주민들의 사기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날인 5월 7일 아침, 잔 다르크가 수도원 요새로 돌아와 당장 레 투렐을 공격하자고 지휘관들을 설득했다. 결국 그녀의 바램대로 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잔은 사다리를 타고 방벽을 오르다가 목에 쇠뇌 화살을 맞고 후송되었다. 잔 다르크의 깃발이 후방으로 물러나자 프랑스군의 사기가 꺾였고, 지휘관들은 포병대의 증원을 기다리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명령한다.
그러나 그때 잔 다르크의 호위병인 장 돌롱이 그녀의 깃발을 들고 전방으로 돌격했고, 다시 사기가 오른 프랑스군이 방벽을 공격했다. 이때 또 다른 프랑스군이 남쪽 성문에서 출격해 끊어진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서 레 투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잉글랜드군은 방벽을 버리고 레 투렐로 후퇴하려 했지만, 포격에 의해 손상된 도개교가 무너져내리면서 레 투렐의 수비대장 윌리엄 글래스데일과 그의 부관 윌리엄 몰린스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이 강에 빠져 익사했다. 곧이어 프랑스군이 요새 안으로 밀려들며 수비대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레 투렐이 탈환됨으로써 오를레앙 시의 봉쇄가 풀렸다. 결국 서퍽 백작과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더 이상 도시를 점령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포위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인 5월 8일 아침, 잉글랜드군은 포위 진영을 불태운 뒤 오를레앙 북쪽 평야에 집결했다. 이에 프랑스군도 전부 성벽 밖으로 나와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지만 감히 먼저 공격에 나서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체면을 살린 뒤 멍으로 후퇴한다.
3.3. 파테 전투 (1429)
자세한 내용은 파테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9년 6월 초, 약 5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셀에 집결했다. 공식적으로 지휘관은 알랑송 공작이었고, 잔 다르크에게는 지휘권이 없었지만 샤를 7세는 알랑송 공작에게 항상 그녀의 조언에 따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6월 11일 오후, 알랑송 공작과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치열한 전투 끝에 자르고 시의 교외를 점령했다. 다음날 아침 포격과 함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4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이 도시 성벽을 점령하고 서퍽 백작과 그의 동생 존을 포로로 잡는다.
6월 15일,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은 멍을 손쉽게 점령하고 보장시로 향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또다시 야전에서의 승리로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존 파스톨프의 지휘하에 장빌에 집결시켰다.
다음날인 6월 16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 1000여 명이 보장시 인근에서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알랑송 공작은 이미 샤를 7세에 리슈몽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잔 다르크의 설득에 결국 받아들였다. 잔은 리슈몽을 용서하고 그가 샤를 7세와 화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다.
그날 저녁, 장빌에 모인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당장 보장시를 구원하러 가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존 파스톨프는 파리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장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탈보트의 주장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6월 17일 오후, 잉글랜드군 3500명이 멍을 포위했다. 알랑송 공작과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보장시를 공격하는 것보다 멍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보장시의 잉글랜드 주둔군을 후방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에 사절을 보내 파스톨프의 군대가 구원을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에 속아넘어간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보장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6월 18일, 보장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곧바로 장빌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작전이 이미 실패했는데도 두 배나 되는 프랑스군과 결전을 벌이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포와 보급품 때문에 행군 속도가 느려졌고, 생시지몽과 파타이 마을 사이의 도로에서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기병대가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참호를 파거나 전열을 갖출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후위의 잉글랜드군은 길가의 도랑과 덤불숲에 의지해 돌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공격이 개시된 지 고작 몇 분 만에 대열이 무너지고 탈보트가 포로로 잡힌다. 이런 상황에서도 파스톨프는 전위 부대를 집결시켜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가 파테 마을 방향으로 황급히 말을 달리는 것을 본 병사들은 지휘관마저 도망치고 있다고 오해하고 전의를 상실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추격전 끝에 2200여 명이 전사하고 주요 지휘관들을 포함해 5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파스톨프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장빌의 주둔군은 비겁한 도망자인 그를 도시 안에 들여보내길 거부했고, 베드퍼드 공작도 처음에는 격노하며 그를 가터 기사단에서 추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파스톨프는 이후로도 대중의 기억 속에서 파테 전투의 도망자로 남게 되었다. 파스톨프가 도시 성문에서 쫓겨나고 얼마 되지 않아 장빌의 주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에 항복한다.
3.4. 트루아 포위전 (1429)
자세한 내용은 랭스 행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9년 6월 24일, 7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지앵에 집결했다.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큰 손실을 입고 파테 전투에서 전멸한 잉글랜드 야전군은 노르망디의 도시와 요새들에서 주둔군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감축하면서 긁어모은 병력이었고, 이제 교황의 분노를 사면서 취소한 후스파 십자군과 잉글랜드 본국에서 새롭게 모집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가용 병력이 없었다.
그러나 당장 랭스로 진군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의 주장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우선 오를레앙 포위군에 병력을 지원하기를 거부하는 등 다시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있는 부르고뉴 공작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대해 잔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반박했고, 여러 전투에서 그녀가 일으킨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 예언을 믿었다.
하지만 그전에 랭스에 도착하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루아르 강에서 랭스까지 가려면 수많은 강과 개울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수천 명이 먹을 식량은커녕 랭스를 점령하는 데 필요한 대포조차 충분히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잔은 샹파뉴의 도시들은 감히 주님의 뜻에 맞서려 하지 않을 것이라 예언했고, 샤를 7세는 결국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6월 29일, 프랑스군이 지앵에서 출정해 오셰르로 진군했다. 부르고뉴 공작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샤를 7세는 오셰르를 무력으로 점령하지 않고 도시에서 보급품을 공급받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는다.
7월 5일 아침, 프랑스군이 트루아를 포위했다. 귀족 가문과 부유한 상인들로 구성된 과두제 시 정부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충성했지만 대다수의 일반 시민들은 오를레앙의 처녀가 일으킨 기적들에 대한 소문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잔 다르크가 제안한 작전에 따라 프랑스군이 마치 도시를 공격할 것처럼 참호를 파고 해자를 메우자 겁에 질린 주민들은 시 당국과 전문 군인들의 통제를 무시하고 교회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트루아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그들은 노골적으로 주민들 편을 들었고, 7월 10일 아침, 결국 여론의 압력에 시 정부가 항복하면서 트루아 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7월 14일, 프랑스군이 샬롱에 무혈입성했다. 잔 다르크의 예언대로 트루아에서 또다시 기적이 일어나자 샹파뉴의 도시들은 감히 프랑스 왕과 예언자에게 맞서지 못하고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랭스 진군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을 강화할 수 있다는 샤를 7세와 고문들의 우려 또한 현실이 되었다. 아르투르에 머무르고 있었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황급히 파리로 돌아와 베드퍼드 공작과 회담을 가진 뒤, 부르고뉴 가문이 파리 시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동원해 모든 저명한 시민들에게 베드퍼드 공작 앞에서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청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이 샬롱에서 출정해 랭스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랭스의 시민들은 대회의를 소집해, 수비대장에게 만약 그들이 저항하기로 결정한다면 부르고뉴 공작이나 베드퍼드 공작이 구원군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비대장이 6주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답하자 시민들은 곧바로 대표단을 보내 샤를 7세에게 항복한다.
7월 17일 일요일 아침,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화려하게 치러졌다. 얼마 뒤 랑, 수아송, 프로뱅 등 주요 도시들에서 주민들이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프랑스군은 이 도시들의 무기고에서 대포와 화약을 충분히 보급한 뒤 서쪽으로 진군했다.
3.5. 파리 포위전 (1429)
자세한 내용은 1차 파리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29년 7월 23일, 샤를 7세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수아송에 입성했다.
그러나 7월 말, 잉글랜드 본국과 부르고뉴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파리에 5000여 명의 야전군이 집결했다. 이에 베르뇌유 전투의 악몽이 되살아난 프랑스 지휘관들은 파리 공략을 포기하고 루아르 강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8월 2일, 프랑스군이 프로뱅에 입성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프랑스군이 브레에서 센강을 건널 것이라 예상하고 분견대를 보내 퇴로를 차단한 뒤 믈룅으로 향한다. 이에 프랑스군은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진군했다.
8월 5일 아침, 프랑스군이 낭지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중기병 전력에서 우위에 있는 프랑스군이 유리한 평탄한 지형이기 때문에 베드퍼드 공작은 맞서 싸우러 나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군이 허세를 부리고 있으며 여전히 센강을 건너서 후퇴할 계획이라고 짐작하고는 몽트뢰유로 남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정반대인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고,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갔다.
8월 11일, 프랑스군이 크레피를 점령했다. 다음날 아침 프랑스군은 도로를 따라 파리로 진군한다.
8월 15일 아침,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상리스 인근에서 대치했다. 격렬한 전초전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양측 모두 상대편 진영을 공격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고, 프랑스군은 해질 무렵 크레피로, 잉글랜드군은 다음날 아침 파리로 퇴각했다. 하지만 이는 베드퍼드 공작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프랑스군이 무방비 상태가 된 일드프랑스 북부와 보베지로 진격하자 주요 도시인 보베, 콩피에뉴, 상리스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다.
같은 시기,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노르망디를 기습적으로 침공해 콩슈와 에브뢰를 점령했다. 노르망디 동부와 피카르디에서도 지역 귀족들이 주도한 의병이 일어나 오말과 에트레파니를 점령하고 루앙 일대를 약탈하며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8월 말, 마른 강의 요충지인 라니 시가 샤를 7세에게 항복했다. 한때는 무적처럼 보였던 잉글랜드의 지배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본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7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샤를 7세와 외교 고문들은 이에 환호하며 부르고뉴 공작과 휴전을 체결했지만, 알랑송 공작과 잔 다르크는 국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한다.
9월 8일, 프랑스군이 파리 시를 공격했다. 잔 다르크는 다른 도시들에서 그랬듯 파리 시민들이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를 기대했지만, 1418년 파리 학살 이래로 파리 시에 남아있는 유력자들에게 있어 왕세자 샤를은 증오스런 아르마냑파의 수장에 불과했다. 항복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조롱과 모욕만 돌아오자 잔 다르크는 직접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파리 시의 성벽은 너무 튼튼해서 포격에도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고, 해자는 너무 깊고 넓었다. 잔은 해자를 넘으려 하다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잔 다르크가 후송된 뒤에도 프랑스군은 포기하지 않았고, 해자가 좁고 성벽의 각도가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합한 마르셰 오 포르소의 성벽을 찾아내 집중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격퇴되었고, 500여 명의 전사자와 수많은 부상자만 남기고 생드니로 퇴각한다.
다음날 아침,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생드니에서 배다리를 건설하고 센강을 건너서 파리 시 남쪽의 낡고 약한 성벽을 공격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한다. 위험한 임무였지만 잔 다르크의 명성에 많은 병사들이 자원했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은 회의 끝에 파리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작전을 중단하라고 두 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반발했지만, 왕명으로 배다리가 강제 철거되자 어쩔 수 없이 샤를 7세를 따라 루아르 강으로 철수한다.
3.6. 루비에 습격 (1429)
파리와 일드프랑스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 시와 샤르트르, 믈룅, 상스 등 주요 도시들의 행정권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위임하고 루앙으로 정부를 이전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작은 북부 프랑스의 대도시들의 수입을 거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이 다시 강화되었다.
1429년 9월 25일, 프랑스군이 마옌강의 요충지 라발을 기습해 점령했다.
11월 6일, 헨리 6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에트레파니를 탈환했다. 프랑스군이 베르뇌유를 점령하지만 잉글랜드군이 한 달 만에 탈환한다.
12월 8일, 라 이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센강 하류의 요충지 루비에를 기습해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서 보몽, 베르네, 샤토가야르를 추가로 점령했고, 이로써 루앙과 파리 사이의 수운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샤를 7세는 라 이르를 루비에의 총독으로 임명한다.
12월 12일, 잉글랜드 하원은 왕실의 간청에 따라 약 9만 파운드에 달하는 2회분의 전쟁세를 승인했다.
3.7. 믈룅 시민 봉기 (1430)
1월 초, 상스의 시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월 말, 보제 전투에서 전사한 클래런스 공작의 사생아이자 헨리 6세의 사촌인 존 클래런스 경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토시를 포위했다.
3월 중순,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생드니를 기습해 파리 시의 부르고뉴 주둔군을 격파하고 지휘관 필리프 드 사뵈즈를 포로로 잡았다.
같은 시기, 파리 시에서 샤를 7세 지지자들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돼 15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파리 고등법원의 고위 관료들과 서기를 포함해 6명이 처형되었다.
이후 요충지의 도시와 요새 주둔군에는 오직 잉글랜드인만이 복무해야 하며 현지인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내용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저명한 지휘관인 존 파스톨프마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의 지배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는지 프랑스의 토지를 청산하고 잉글랜드의 토지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3월 말,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토가야르를 포위했다.
4월 23일 아침, 헨리 6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기 위해 칼레에 상륙했다. 워릭 백작이 이끄는 국왕군 5000명을 포함해 수많은 관료들과 시종들이 그와 동행했다.
4월 말, 센강의 요충지 믈룅의 시민들이 잉글랜드 주둔군을 쫓아내고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8. 슈와시 습격 (1430)
자세한 내용은 콩피에뉴 공방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430년 5월 7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는 결국 베드퍼드 공작의 강요에 못 이겨 콩피에뉴를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부르고뉴군은 우선 와즈 강의 요충지 슈와시를 포위하고 포격을 퍼부었다. 포격을 저지하기 위한 출격대마저 격퇴당하자 수비대장은 한밤중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다.
5월 13일, 잔 다르크가 이끄는 1000여 명의 지원군이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5월 15일 새벽, 잔 다르크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출격대가 누와용을 기습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다음날 슈와시가 부르고뉴군에 항복한다.
5월 18일, 잔 다르크는 수아송에서 엔 강을 건너 슈와시를 북쪽에서 기습하려 했다. 하지만 수아송의 수비대장 기샤르 부르넬은 부르고뉴군과 항복 협상을 진행중이었고, 프랑스군의 입성을 거부한다. 이에 대부분의 프랑스 병사들이 콩피에뉴 방어를 포기하고 상리스로 퇴각했다.
5월 20일,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포위했다.
5월 23일 저녁, 잔 다르크가 이끄는 500여 명의 기병대가 출격해 보도 드 느와예가 지휘하는 포위군 진영을 기습했다. 부르고뉴군은 갑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지만 서둘러 무기를 챙겨서 완강히 저항했고, 클레르와에 주둔해 있던 부대가 교외를 가로질러 지원을 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세 차례나 돌격했지만 끝내 부르고뉴군 진영을 돌파하지 못했고, 다른 포위군 진영들에서도 지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뒤늦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출격대는 도시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는 부하들이 강제로 끌고가기 전까지 후퇴를 거부하는 바람에 뒤처졌다. 추격해오는 부르고뉴군이 도시 성문을 점령할 것을 우려한 콩피에뉴의 수비대장 기욤 드 플라비는 결국 잔 다르크가 들어오기 전에 성문을 닫고 도개교를 올렸다. 잔 다르크는 남자 형제인 피에르와 충성스러운 호위병 장 돌롱과 함께 포로로 잡혀서 보뤼유 성으로 끌려간다.
3.9. 콩피에뉴 포위전 (1430)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날인 1430년 5월 24일,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 다리의 방어탑을 공격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격퇴당했다.
이후 두 달 동안 포위군은 다리와 방어탑에 포격을 퍼부으며 참호와 땅굴을 파기 시작했고, 이에 방어군이 맞땅굴을 파면서 지하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6월 11일, 오라녜 공 장 3세 드 샬롱알레의 아들인 루이 2세 드 샬롱알레의 지휘하에 도피네 지방을 침공한 부르고뉴-사보이아-오라녜 공국 연합군 4,000명이 안통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의 지휘를 받는 프랑스군 1,600명의 매복에 당해 전멸했다.(안통 전투) 이 소식을 들은 리에주 시민들이 부르고뉴 공작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
7월 말, 콩피에뉴 다리의 방어탑이 마침내 부르고뉴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다리가 포격으로 끊어진 바람에 주둔군은 도시 안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부르고뉴군은 방어탑에 포대를 설치하고 도시 성벽과 그 안의 민가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350채에 달하는 건물이 파괴되었고 몇몇 구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8월 중순, 브라반트 공작 필리프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다른 친족들을 제압하고 브라반트 공국을 장악하기 위해 콩피에뉴 포위군 진영을 떠나 메헬렌으로 향했다.
9월 중순, 끝내 콩피에뉴의 성벽을 돌파하지 못한 부르고뉴군은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도시를 봉쇄해 굶겨 죽이기로 결정했다.
10월 25일 아침, 방돔 백작이 이끄는 1200여 명의 프랑스 기병대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콩피에뉴 인근에 도착했다. 1000명이 남쪽에서 포위군 진영을 공격할 것처럼 가장해 시간을 끄는 동안,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분견대 200명이 몰래 콩피에뉴 숲을 통과해 동쪽 성문 앞의 부르고뉴군 진영을 기습했다. 도시 방어군이 때맞춰 출격해 진영을 포위했고, 부르고뉴군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잡혔다. 기세가 오른 방어군은 곧바로 서쪽 성문으로 출격해 잉글랜드군 진영 하나를 점령하고 불태운다. 밤이 되자 나머지 기병 1000명도 대치를 풀고 야음을 틈타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다음날 아침,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포위 진영을 불태우고 수많은 보급품과 대포를 남겨둔 채 누와용으로 퇴각했다. 이렇게 해서 콩피에뉴 포위전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11월 20일, 잉글랜드군 600여 명이 부쇼아르 마을 인근에서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매복에 당해 전멸했다.
12월 13일,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장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부르고뉴군 2500명을 야전에서 격파하고 센강 상류의 요충지인 샤프 시를 점령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북부 전체가 프랑스군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12월 23일, 잔 다르크가 루앙으로 끌려가 루앙 성의 감옥에 갇혔다.
3.10. 잔 다르크 화형 (1431)
파일:Joan_of_arc_burning_at_stake.jpg1431년 1월 25일, 잔 다르크의 첫 번째 후원자인 로렌 공작 샤를이 사망했다. 사위이자 후계자인 앙주의 르네는 부르고뉴 공작이 언제나 그랬듯 트집을 잡아서 상속권을 빼앗으려 할 것이라 예상하고, 더 강한 세력의 보호를 받기 위해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3월, 베드퍼드 공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라니를 포위공격하지만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했다. 결국 베드퍼드 공작은 랭스에서의 대관식을 포기하고 파리에서라도 대관식을 올리기로 결정한다.
4월, 4000명 이상의 잉글랜드군이 루비에를 포위했다. 라 이르는 구원군을 모집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갔다가 운 나쁘게도 정찰대와 마주쳐 포로로 잡혔다. 라 이르의 동생인 아마독이 낙담한 부하들을 격려하며 포위 공격에 맞섰다.
5월 중순, 앙주의 르네,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장이 지휘하는 6000여 명의 프랑스 기병대가 부르고뉴 공국을 침공해 보데몽 성을 포위했다.
5월 24일, 잔 다르크는 결국 생트웽 수도원 경내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그동안의 이단적인 주장들을 철회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교회법에 따르면 참회한 이단자에 대한 처벌은 최대가 무기징역이었기 때문에 화형이 취소되었다.
5월 28일, 잔 다르크가 다시 남성복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잔은 간수들이 강제로 여자 옷을 빼앗고 남자 옷을 입혔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러 증언들 중 법정의 공식 기록에서 채택된 설명은 간수들이 자신을 강간할까 두려워서 스스로 남자 옷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잔은 가장 무거운 형벌인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런 환경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생트웽 수도원 경내에서 했었던 참회 선언을 취소한다.
5월 30일, 루앙의 시장 광장에서 잔 다르크의 화형이 집행되었다.
3.11. 루비에 포위전 (1431)
1431년 6월 초, 잉글랜드군이 샤토가야르를 탈환했다.
7월 2일, 보데몽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부르고뉴군 4000여 명이 뷜녜빌 인근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숫적 우세로 자신감을 가진 앙주의 르네는 맨앳암즈들을 하마시키고 도보로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정예병 위주로 모집된 부르고뉴군 전열은 공격을 간단히 격퇴했고, 프랑스군은 추격전 끝에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패를 당한다. 바르바장은 전사했고 앙주의 르네는 포로로 잡혀서 부르고뉴 공작에게 끌려갔다.
7월, 잉글랜드군이 오말을 탈환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루앙 일대가 충분히 안전해졌다고 판단했고, 7월 29일 헨리 6세가 루앙에 입성한다.
8월, 장 드 부삭과 포통 드 생트레유가 지휘하는 상당한 규모의 프랑스군이 루비에를 구원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워릭 백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베 시 인근의 집결 장소를 기습해 프랑스군이 참패하고 포통 드 생트레유가 포로로 잡힌다.
10월 22일, 결국 루비에 방어군이 항복하면서 루비에 시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2월 2일, 헨리 6세가 파리 시에 입성했다.
12월 16일, 헨리 6세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잉글랜드인들에게 파리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행사는 엉망으로 치러졌다.
파리 주교가 집전해야 하는 미사를 헨리 보퍼트 추기경이 대신 집전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국왕의 손에 쥐어줘야 하는 검은 잉글랜드인인 스태퍼드 백작이 대신 건넸다. 국왕이 성찬주를 마신 뒤 대성당에 보관되어야 하는 금잔을 시종이 그냥 가져가 버렸다. 프랑스 대귀족 6명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잉글랜드 귀족들이 대신 배치되었다. 연회에서 상석에 앉아야 하는 파리 시의 유력자들과 고등법원 관료들, 파리 대학 대표들은 평범한 상인들과 함께 말석을 배정받아 나흘 전에 요리된 딱딱한 고기를 먹었다. 의식에 참석한 빈민들에 대한 자선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죄수들에 대한 사면과 세금 면제도 없었다. 어린 국왕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짧게 연설했다.
크리스마스 직후, 헨리 6세와 수행단은 파리 시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대관식이 프랑스 전통이 아닌 잉글랜드 대관식 절차대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졌고 동군연합의 환상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