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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39:57

밸리 포지의 교훈

파일:washington_valley_forge.jpg
<colbgcolor=#C0C0FF><colcolor=#000> 미국 독립 전쟁 중 일부
일시 1777년-1778년 겨울
원인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의 군수 가격통제 실패

1. 개요2. 상세3. 폐해4. 원인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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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inter at Valley Forge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 발생했던 일화. 가격통제의 한계이자 화폐 신용도 관리 실패 사례, 더 나아가선 불안정했던 대륙회의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또한 민간의 경제 활동은 국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반드시 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로 꼽힌다. 쉽게 말하자면 경제에는 애국심이 없다는 것.

2. 상세

1770년대 미국 독립을 위해 영국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가맹 주들의 비협조에 어떻게든 전비 조달을 하기위해 ‘컨티넨탈 화폐’를 남발한다. 멀쩡히 금융 활동이 이뤄지는 정상 국가도 통화를 남발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데 징세 권한도, 화폐의 가치를 보장할 현물이나 신용도 없는 대륙회의가 발행한 화폐는 당연히 가치가 추락했다. 이에 최전선에 나가 있는 조지 워싱턴의 대륙군의 보급은 더욱 힘들어지고 말았다.

당시 워싱턴 장군과 병사들은 영국군을 필라델피아에 묶어두고 펜실베이니아를 지키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밸리 포지(Valley Forge)를 택했는데, 상황은 워싱턴에게 그리 좋지 못했다. 엄동설한의 날씨 속에 피복 및 장구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가격이 치솟았고, 식량조차 떨어져가는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는 '물가통제법'을 제정하는데, 요약하면 상인들로 하여금 대륙군이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정해진 값싼 가격에 판매하라는 내용이었다. 즉, 애국심으로 손해를 감내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데 일조하라는 의도였겠지만 이는 머잖아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3. 폐해

우선 어떤 상인들도 이런 가격에 팔 생각이 없었기에 대륙군에게 판매를 거부했다. 빡친 주 의회는 강제로 징발할 수 있도록 법안을 수정했지만 상인들도 아예 물건 자체를 없애 버리거나 심지어 영국군에게 파는 식으로 저항했다.

그렇다고 법안에 순응해 싸게 팔아도 보조금이나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에 손실분을 메우고자 통제법 리스트에 묶이지 않은 품목들을 그만큼 더 올렸으며, 이렇게 주 의회와 민간 사이의 대립이 격해지자 사이에 낀 조지 워싱턴은 서한까지 보내 제발 쓸데없는 탁상공론 그만두고 현실적인 대책을 만들어달라고 까지 하였다. 결국 1777년부터 1778년 2월까지 수많은 대륙군 병사들이 굶주림, 질병, 추위로 죽어간 다음에서야 주 의회는 '물가통제법'을 실패한 정책, 악법으로 인정하고 1778년 6월에 폐지하기에 이른다.

4. 원인

밸리 포지의 가격 통제가 불러온 끔찍한 참사로, 민간 경제에서는 오직 돈의 논리만 작용하며 그 이외의 어떤 것도 먹혀들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대륙회의가 징세권이 없어 예산확보가 안되는 와중에 나온 컨티넨탈 화폐는 군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에서 재화는 액면가를 지정해둔다고 그 가치가 자동으로 붙는게 아니다. 덤으로 일부 식민지 주에선 금이나 은을 바탕으로 자체 화폐까지 만들면서 중앙 정부의 화폐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후 컨티넨탈 화폐의 가치는 휴짓조각 수준으로 떨어졌고 '믿은놈이 멍청이'를 증명해버린다.[1]

즉, 물가통제법이 없었다 할지라도 물건을 가진 상인 입장에서는 거래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2] 거기에 한술 더 떠 가격마저 형편없이 책정해버린 것이다. 이러니 애국심만으로 공급이 원활하게 돌아갈리가 없었다. 애초에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미국은 독립 지지파와 독립 반대파가 나뉘어 있어, 일치단결한 심정으로 독립을 원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애국심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고[3], 설령 애국심이 투철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억지 정책은 명백히 전쟁 비용을 민간에 전가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대륙의회가 딱히 시민들에게 해준것도 없는 상황에서 삥부터 뜯으려는데 처음부터 없난 애국심이 생겨날리 없으니, 신정부의 신용을 날려버린 대실수를 한 셈. 하다못해 전후에 보상해주겠다는 약속도 없이 그냥 "닥치고 내놔!"라는 식이었으니 "응 싫어!"가 나올 수밖에.

쉽게 말해 승전 이전의 대륙의회는 딱히 국가도 아니고 동네 호족들끼리 모인 군벌이었고, 딱히 찬반투표도 없이 독립전쟁을 일으킨 집단이었다. 상인이건 농민이건 경제주체들은 영국인으로 태어났거나 보스턴 주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등의 정체성을 가졌으니 미국이라는 집단에게 '태어난 조국'이라는 애국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벌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려서 '독립전쟁'을 한답시고 군표를 찍어냈는데, 발행주체(대륙의회)의 신용은 시원찮고 딱히 담보도 없지만 그냥 믿고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는 셈이었다(실제로 믿은 상인들은 파산했다). 이러니 거래가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물론 이러한 말도 안되는 법 이면에는 대륙회의가 중앙정부 주제에 군수물자 확보를 민간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태어나지도 못한 정부였으며, 당연히 징세권도 없고 각 식민지주의 기부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였던 점도 한몫 한다. 많은 국가들이 저효율을 감수하고서라도 최소한 자국의 필수 군수물자 정도는 국가가 직접 생산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다.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민간에 보급을 위탁한다면 이 사례만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대륙회의 설립 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이런 화폐 경제 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미비한 곳이었다. 미국 독립 전쟁이 터진 근본적인 원인인 세금 문제도, 이렇게 화폐 경제 시스템이 부족한 곳에서 영국이 화폐로 징세하려다 터진 것이다.

대륙회의가 차라리 과거 금본위 화폐처럼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보장이 있거나 징세권을 바탕으로 이 돈이 가치가 있으리라는 신용이 쌓여있었다면 당연히 주 의회도 이러한 억지 법안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상식적으로 이제 막 개척되고 있는 식민지에 영국이 대량의 금을 보관할 이유도 없었고, 영국 입장에선 '반역'이나 다름없는 독립전쟁 준비를 하면서 화폐 경제를 구축할 정도의 많은 금을 모으는 것도 불가능했다. 13식민지가 풍요로운 건 사실이지만 현물은 많아도 현금은 부족했던 것이다.

애시당초 세금 걷을 능력이 없는 정부가 상인들에겐 삥을 뜯겠다고 나서봤자 조세저항을 진압할 능력도, 대신할 당근을 건내줄 능력도 없었다. 결국 이 법으로 인해 민간 시장에서까지 생필품 공급이 사라지고 일부 상인들은 영국군에게 군수물자를 팔기까지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정책 하나 잘못 짜서 홈에서 싸우는 아군과 국민은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데 물자가 적군에게 가버리는 상황까지 만들어버린 것이다.

5. 여담

문제의 컨티넨탈 화폐의 경우 나중에 액면가의 1/100로 회수를 했는데, 이 때 화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후손들이 21세기 화폐 수집가들에게 액면가의 수십배 가치로 팔거나 계속 보유중이다.

전쟁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다른 사례들이 증명해주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적에게 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밸리 포지에서의 교훈이 잘 알려준다. 붕괴된 경제 상황은 아군에게 손실을 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군에게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것.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주머니를 쥔 쪽이 아무래도 돈을 쓰는 쪽보다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고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
또한 화폐 발행 주체의 견실함이 화폐 가치에 끼치는 영향도 알 수 있는데, 미국 남북전쟁기의 화폐 그린백은 북부가 일시적으로 금이 부족했을지언정 중앙 정부가 징세권을 지니고, 해당 화폐의 환전이 법으로 보장되었고, 남부 국력상 북부가 지더라도 사라지지 않으리란 어느정도의 신뢰를 기반으로 1994년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현대에는 전쟁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전시 경제 체제의 건전성이 중요해졌다. 밸리 포지의 교훈이 있은 이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같이 전쟁의 위험이 있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에게 경제제재를 가하는 일이 종종 생겨났는데 이는 그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전쟁에서 경제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아진 것도 있지만 이 사건의 교훈이 보여주듯 경제를 옥죄는 것만으로도 전쟁 억지력이 크게 올라간다는 점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의 촉발점이 된 미국의 대일본 수출 제재나 북미관계가 안좋아질 때마다 언급되었던 대북제재, 미국-이란 관계에서 언급되는 미국의 이란 경제 제재 같은 것들이 다 이러한 이유다.

중국과 월스트리트간의 밀월관계 역시 이를 잘 보여준다. 기사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침략국 러시아에 대해 서방 자유국가들이 경제 제재를 건 것도 전시 경제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이유다. 실제로 제재가 이루어지자 루블화 가치 하락과 러시아 신용 등급 폭락 등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하지만 러시아는 식량과 자원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소련시절부터 제조업 강국이어서 결국 일시적인 효과에 그치고 러시아의 전쟁 수행능력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밸리 포지의 교훈처럼 행동하면 외환의 죄에 따라 형법 2장 96조, 97조에 따라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외환의 죄 항목 참조.[4]

6. 관련 문서


[1] 1779년까지 무려 2억 달러가 넘는 금액의 컨티넨탈 화폐가 뿌려졌다.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도 위조지폐를 마구 찍어냈기 때문에 발행초 컨티넨탈 화폐와 1:1이던 은과의 시중 교환가격은 1:168 수준으로 폭락했다.[2] 전쟁 결과에 따라 똥값은 커녕 반역 행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군표보단 차라리 다른 지역화폐나 물자가 유리하다. 물건을 가진 상인 입장에서는 물건의 가치가 큰 차이 없이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 물건을 팔지 않고 보관해두는 것이 이득이다. 애초에 내로라하는 열강도 전쟁같은 위기상황에는 국가의 존속을 보장받을 수 없기에 화폐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당시 미국은 아예 태어나지조차 못한 국가였다.[3] 이는 미국의 독립전쟁은 한국의 독립운동과는 애초에 그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애초부터 한 나라도 아니었고 민족도 다른 일본에게 강점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고 미국의 독립전쟁은 본국으로부터의 분리 운동 성격이 짙었다. 당시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원주민을 제외하면) 대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 출신이 태반이었으며, 애초에 영국이 개척한 식민지로 시작한 만큼 본국에 대한 거부감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독립 반대파 입장에서는 애국은 영국을 향한 것이며 독립군은 그저 반란군에 불과했다.[4] 한국의 법이 구 일본제국 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