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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2:25

버닝(한국 영화)/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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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인물과 전개에 대한 해석1.2. 각 상징적 요소들에 대한 해석1.3. 이데올로기적 해석

1. 개요

분노, 청춘, 미스터리 등이 주요 골자로 논의되는 영화지만 해석들은 저마다 갈린다. 특정한 메시지 대신 일종의 관점을 던지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결말을 어느 하나로 결론 짓는 것이 의미 없기도 하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주인공이 자신만의 답을 냈지만 그 답이 맞는 것인지조차 모호한 것처럼,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름의 해석을 했을지라도 그 해석조차 확신을 할 수 없으며 종래엔 세상과 영화 자체가 미스터리임을 인식하게 한다. 관객들이 각자의 서사대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다양함이 다시 작품의 서사를 쌓아 나간다. 때문에 본작을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부 평론가 및 관객들은 영화 속의 메타포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의미하다고 보기도 한다.[1] 따라서 각 상징들을 해석하기보다 시각적 이미지 자체로만 보는 걸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1.1. 인물과 전개에 대한 해석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해미를 힘든 현실 속에서도 각자의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보통 청년에 가깝다고 보는 생각들이 있다. 해미는 카드빚을 지며 힘들게 살지만 돈을 모아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공부하면서 누구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구하려 한다. 전종서는 모든 게 다 좋아지고 있어도 거기에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지만 현실에 순응하고 있기에는 너무 우울할 수밖에 없다면서, 해미의 삶과 현실을 결부시켰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유를 두고 벤을 의심하기 때문에, 해미가 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관점이 첫 번째로 있다. 하지만 순전히 종수의 관점일뿐,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몇 가지 단서들을 두고 해미의 행방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결정적이라 생각되는 해미의 시계의 경우, 영화 속에서는 매우 흔한 물건으로 암시되고, 해미가 떠나기 전 벤에게 주고 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해미가 종수를 떠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해미는 종수의 집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마치 '그레이트 헝거'가 된 것처럼 춤을 추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기를 말하면서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벤의 대사를 보아 해미는 종수를 각별하게 여겼고, (사실이라면) 어릴 적에는 우물에 갇혀 있을 때 종수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 해미는, 노을씬 이후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종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됐다. 또 다르게는 해미가 자살했을 거라 보는 견해도 있고, 빚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것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인데, 이런 해미가 발 디딜 곳이 없어졌다는 것은 이상이 좌절됐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미를 잠적하게 한 원인을 세상 그 자체라고 크게 볼 수도 있다. 슬퍼하며 우는 해미를 보며 신기해 할 뿐이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며, 흥미있어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영화 속 벤이기도 하지만, 해미와 종수와 같은 이들을 둘러싼 잔인한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중에서 해미의 서사를 기억해주고 진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해미는 더욱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종수는 해미를 제대로 기억 못 하지만 이해하(려)는 인물이었으나, 벤이라는 모호한 세상과 맞닥뜨린 후 해미를 떠나보냈다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혼돈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전개에 대해서는 몇가지 얘기들이 있다. 유아인은, 대부분 판단하고 정의내리고 싶어하는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서 내놓아진 정답에 의구심을 품을 만한 시대를 비유한다고 말하면서, 때문에 명확한 메시지를 주는 것보다 세상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라 봤다. 이창동은, 부유한 벤이 겉으로 보기엔 잘못이 없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 역시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벤의 삶과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종수와 해미 같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이 의도치않게 또다른 누군가에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벤은 종수와 해미를 대접하고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행동과 말을 그저 재미있는 것으로 삼거나 지루하게 여겨 종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창동은 다른 인터뷰에서 일상의 작은 것들이 때로는 의심, 두려움, 막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답이 분명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 미스터리가 분노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의 모습처럼, 세상은 겉보기에 세련되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벤이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종수가 살고 있는 파주까지 찾아갈 만큼 애정이 있었고, 종수가 벤의 집에 찾아왔을 때 베이스를 느끼라고 했던 것은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종수가 자기 이야기 같다고 말한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종수에 의해 죽음을 맞을 때 마치 종수를 끌어안는 듯한 모습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벤이 죽을 때까지도 해미와 종수를 자신에게 흥미있는 존재로만 여겼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종수가 벤을 어설프게 추격할 때 벤이 모르는 척 한 것도 자신을 찾아오고 따라오는 종수가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서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을 거란 의견이다.[5] 벤이 죽기 전 집에서 파티를 즐길 때, 지루한 듯 보이다가 자신을 관찰하는 종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면에서도 대비를 느낄 수도 있다. 연애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벤이 종수에게 매우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은 무리가 없다.
또한 벤을 어느 캐릭터로 보지 않고 종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의인화로 보기도 한다. 종수에게 벤은 수수께끼 같은 세상 그 자체이며 그를 쫓다 끝내 죽이는 건 혼란스러운 세상을 탐색하다 옳든 틀리든 자기의 결론을 내리고 새롭게 시작함을 의미한다는 것. 진실이 무엇이 됐든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니 아무리 부조리가 만연한다 해도 종수는 뭐라도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시작은 해미의 행방과 비닐하우스 탐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기 보다, 답을 이미 정해놓은 채로 단서를 탐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면 희망적이다.
영화가 끝나고 종수처럼 미스터리에 빠진 관객들은 영화 안에 떨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가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비어있는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메타포와 상징을 파고 들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건지 파헤친다. 이것은 극중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탐색하고 벤을 미행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다가가려는 태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종수처럼 자신만의 해석본을 내놓는다. 종수가 고양이, 해미의 시계, 벤의 태도 등을 조합해서 결론을 냈듯이, 관객들도 영화 안의 퍼즐을 조립해 이 영화가 무엇인지 결론을 낸다. 하지만 종수의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관객들의 결론도 어느 것이 맞다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렵다.
감독의 말처럼 사실은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나온다. 이런 불확실함은 영화를 넘어 현실 세계에 도처해 있다. 영화의 퍼즐을 맞춰나가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각자의 결론을 내고 종수처럼 소설이든 글이든 주장이든 각자의 해석과 판단을 표현한다.[7] 그러나 종수의 판단에 대해 확언할 수 없고, 관객들의 영화 해석본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각각의 판단, 믿음, 사상에 대한 시비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결국 관객들은 영화 속 종수처럼 미스터리를 체험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들의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애초부터 원했을 수 있다.

1.2. 각 상징적 요소들에 대한 해석

비닐하우스는 영화의 주요 테마인 '모호함', '불분명함'을 형상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는 언뜻 투명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안을 들여다 보려고 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극중에서 종수가 찾아다니는 비닐하우스들은 모두 텅 비어있어서,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고 본다 해도 종수에게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그토록 알아내고 싶어하지만 알 수 없고, 도처에 존재해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세상의 진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종수가 비닐하우스와 진실에 대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계속 실체를 찾아나가고 진실을 알려고 했기에 집착과 분노가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물 자체에 대해서는, 실재를 증언하는 유이한 인물인 해미와 엄마가 카드빚과 급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일종의 허영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우물을 인물들의 처지에 대입하면 어두컴컴한 곳에 갇힌 상황, 그럼에도 남산타워의 빛처럼 한 줄기 빛이 새어나오는 현실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종수는 우물의 존재를 믿으려 하고, 결국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얘기를 해주는 엄마의 말을 믿고[10] 비로소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내놓는다. 덧붙여 해미가 우물 속에서 구출을 원하고 있음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창동의 인터뷰[11]를 참고해 본다면, 오히려 해미는 구원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삶을 지탱해 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실제, 소설, 상상 등으로 갈리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미스터리를 풀고 자신만의 서사를 확정한 종수의 선택과 맞닿는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우물뿐만 아니라 종수가 쓰는 소설도 허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들이 이렇게 허구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12]을 생각한다면, 허영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방법 중 하나는 아닌지 질문이 남게 된다.

1.3. 이데올로기적 해석



[1] 메타포를 해석하느라 미스터리에 빠지기 때문에 실은 해석보다 이로 인한 체험이 의도됐다고 보거나, 메타포를 보는 것은 관성/프레임일 수 있다거나, 해석보다는 이미지로 봐야 한다거나, 극중 벤이 메타포 메이커라면 종수는 메타포 파괴자라고 생각하는 등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2] 이런 견해로 보면 엄마는 종수가 자기가 편한 대로 상상한 이미지이다. 아빠의 분노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태운 종수로서는, 처연하고 불쌍한 엄마의 이미지보다는 자기에게 돈달라는 엄마로 상상하는 게 훨 나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종수의 자기합리화.[3] 그 예로, 해미가 사라지고 난 뒤 종수가 알바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해석이 갈린다. 불합리한 상황에서 돌아서는 것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종수를 무기력한 인물로 보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호함을 해결하고 그 원인을 찾고자 밖으로 나간 것이라 생각하면 종수가 영화 전반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변했다고 본다.[4] 이때 종수는 메타포에 대해 답하지 않(못하)고 화장실에 간다.[5] 벤이 죽을 때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 두 해석을 적용해보면 서로 다르게 볼 수도 있다.[6] 그리고 해미는 고양이가 없다고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있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재밌네'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린다.[7] 이것들은 어쨌든 세상에 퍼져있는 조각들을 맞춰 해석해야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8] 일은 뭐 하냐는 질문에도 벤이 내놓은 대답은 그저 '놀아요' 수준의 대답이었다. 즉 벤은 현재 매일매일 직장 없이 자기 맘대로 놀고 다녀도 그 '노는 행위'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만한 재력이 존재하며, 지금 당장 뭔가에 절실히 매달리지 않아도, 혹은 경제적 결핍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9] 여담으로 한 방송에서 백은하가 이와 같은 해석을 내놓자, 함께 진행하던 조우종이 들어올 때는 내 돈 같지만 내 돈이 아닌 것처럼 잠깐 사이 빠져나가는 월급으로 비유했다.[10] 종수는 이전부터 우물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만나자마자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엄마의 말이라도 종수에게 중요한 것은 우물이 있다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다. 또한 달리 보면 엄마도 우물에 갇혀서 구출을 원하는 상황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11] "해미에게도 자신만의 서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서사가 있다. 만약 그 얘기가 해미에 의해 만들어진 얘기라면 왜 해미는 그런 얘기를 만들어서 품고 다닐까. 그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겠다."[12] 종수는 탄원서에도 약간의 허구를 담아 썼다.[13] 엔딩 크레딧에 '어린 종수'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 오정미에 따르면, 일부러 유아인과 닮은 아역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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