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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23:22:53

베르나르 드 세레스

이름 베르나르 드 세레스
Bernard de Serres
출생 1359년
프랑스 왕국 뉴 아키텐 지역 세레슬루에 아리반스
사망 1413년 2월 15일
프랑스 왕국 오베르뉴론알프스 지역 발프랑슈쉬르손
아버지 베르나르 드 라 살
직위 콘도티에로, 교황청 대장, 피렌체 총독, 나폴리 총독, 아스티 총독, 말라우센, 몰랑, 노베스 영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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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출신의 이탈리아 콘도티에로(Condottiero: 용병 부대 지휘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지에서 용병으로 활약하다가 아르마냑파에 가담해 부르고뉴파에 대적했으나 부르고뉴파 인사들에게 피살되었다.

2. 생애

1359년경 프랑스 왕국 뉴 아키텐 지역 세레슬루에 아리반스에서 베르나르 드 라 살사생아로 출생했다. 1379년 12월 말, 베르나르 드 라 살은 오페드, 모르나스, 카데루스의 영주로서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때 그는 자기 아들 베르나르를 교황에게 소개하고, 교황으로부터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받게 했다. 1381년 4월과 5월 동안 아버지의 전우인 레이몽 드 튀렌이 잉글랜드군 용병대장 피에르 푸코가 점령하고 있던 생샤망 성을 공략할 때 참여했다.

1381년 가을, 베르나르는 레이몽 드 튀렌의 군대와 함께 마르세유 함대에 몸을 싣고 칸 만으로 이동했다. 당시 칸 만에는 아버지 베르나르와 레이몽이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는 앙주 공작 루이 1세에 대적하는 카를로 3세의 추종자들이 테울쉬르메르 성을 세우고 버티고 있었다. 레이몽은 베르나르에게 테울쉬르메르 성 인근의 만들리외라나풀을 약탈하고 생피에르 성을 해체하도록 했다. 1381년 겨울, 레이몽은 부하들에게 카를로 추종자들의 군대가 흩어져 있는 배후지인 그라스로 이동했다. 그는 시앙느 계곡을 불태웠고, 카브리스를 접수했다. 카를로 3세 추종자들은 무안샤르투 성으로 피신해야 했다. 레이몽은 베르나르에게 불을 지르고 명령했고, 불길은 이틀 동안 성 주변을 태웠다.

이후 베르나르는 레이몽과 함께 아비뇽으로 돌아갔고, 레이몽의 종자 중 한 사람이 되어 알레스에 거주했고, 1382년 3월 10일 튀렌 자작령의 세르비에르 성주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22일, 레이몽과 함께 클레르몽페랑에 모인 오베르뉴 영지 회의에 참석했다. 1383년 3월, 전염병이 프로방스 일대에 퍼지자, 기욤 3세 로제 드 보포르와 아들 레이몽 드 튀렌은 플란데런으로 피신해 부르부르에서 열린 기사 대회에 참가했다. 이때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1383년 10월 24일 그들의 친척인 카니약 후작이 그들에게 보내는 그릴롱에서의 수입을 몰수했다. 레이몽은 나중에 돌아온 뒤 클레멘스 7세의 행동을 전해듣고 격분해 1385년 초 카를로 3세의 추종자들과 합세해 클레멘스 7세에 대적했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클레멘스 7세를 계속 따랐고, 카를로 3세 지지자들의 위협을 받던 프로방스와 콤타트 베네신 방어에 참여했다.

1387년 5월 아버지 베르나르와 합세해 비테르보로 진군해 그곳에서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에 반기를 든 주민들과 합세하려 했지만, 로마 총독 프란체스코 디 바코가 폭동을 이미 진압했다는 게 전해지자 아버지 베르나르는 볼세나로 철수했고, 아들 베르나르는 오르비에토를 거쳐 카니노로 이동했다. 1392년 4월 라벤나 추기경이자 클레멘스 7세의 특사인 필레오 다 프라다, 니콜라 파르네세와 함께 볼세나에 입성하여 페치아 다 몬탈피나가 방어하고있던 리파 성을 기병 170명과 보병 150명으로 공격해 공략한 뒤 아비뇽 교황청 깃발을 계양했다. 1394년 9월 1일, 베르나르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말라우센 영주로 선임되었다.

1395년 4월, 베르나르는 오르비에토에서 브란돌리노 브란돌리니와 세콜로 브로글리아와 함께 로마 교황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 그는 토스카넬라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카니노, 반뇨레조, 치비텔라 다글리아노를 점령했다. 그해 7월, 라치오에서 이솔라 파르네세 주민들에 의해 투옥되었던 아들 라누치오를 구축했다. 이때 오르비에토 주민들은 그의 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이솔라 파르네세 시의 일부 남성을 살해했다. 1396년 만토바의 영주인 프란체스코 곤자가에게 고용된 뒤 롬바르디아에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군대와 싸웠으며, 10월 피렌체의 요청에 따라 로마냐를 떠나 아레초와 시에나 지역으로 가서 그곳을 황페화했다.

이후 몬탈치노로 진격했다가, 시에나로부터 3,500플로린을 받는 대가로 몬탈치노를 약탈하지 않고 파사로 진군했다. 파사의 영주 야코포 다피아노가 파사를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제시된 금액이 너무 적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볼테라와 발 데사 계곡 사이에서 시에나 용병대장 귀도 다 코레조에게 요격당하자 퇴각했다. 이후 피렌체에게 고용된 그는 1397년 1월 피렌체를 위협하던 시에나 용병들을 몬티에리로 밀어냈고, 다음 달 발 디 니에볼레에서 기병 600명과 맨앳암즈 200명을 이끌고 산 미니아토에 입성해 그곳의 봉기를 진압했다. 그 후 적을 막기 위해 페시아로 이동해 적을 감시했지만, 시에나 용병대장 알베리코 다 바르바아노와 조반니 다 바르바아노가 그의 감시를 회피해 피렌체 성문에 도착해 열흘간 약탈을 자행하다가 피렌체 용병대장 파올로 오르시니, 비오르도, 체콜리노 데이 미켈로티에게 격파된 뒤 시에나로 퇴각했다.

1397년 5월 1,500명을 이끌고 시에누아에 진입해 도시 자체를 황폐화시켰으며, 발 델사 고개로 돌아와 100명의 보병과 석궁병을 챙기고 셀브 성을 공략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피렌체 시로부터 '토스카나의 대장' 칭호를 받았다. 1397년 6월, 피렌체 총독에 선임된 뒤 조반니 디 바르비아노에 맞서 진군하라는 피렌체 시의 지시에 따랐다. 그런데 도중에 용병대원 바르톨로메오 보카네라가 그의 권위를 무시하고 명령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군대의 단결력이 저하되었다. 베르나르는 이에 분노해 바르톨로메오를 참수했다. 그러나 여러 용병들은 용병대장이 그의 부하들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분란이 더욱 거세졌다. 피렌체 시는 급히 사태를 조사한 뒤 베르나르가 옳다고 선언했고, 베르나르는 7월 중순에 군대를 장악한 뒤 베르니오에서 조반니 디 바르비아노를 요격해 크게 격파해 시에나로 퇴각하도록 강요했다.

그해 9월, 베르나르는 마렘마 강을 건너 다시 시에나군을 물리쳤다. 이후 조반니 콜론나와 함께 2,5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발디르노를 거쳐 카시나를 통과한 뒤 캄포와 세사넬로를 공략하고 9일 동안 약탈을 자행했다. 1398년 3월 피사 지역으로 진입해 그라도의 산 피에로까지 진군하면서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러다가 귀환길에 오른 그는 피사에서 출격한 적군을 상대로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전투를 치른 끝에 격파하고 적병 100명을 생포했다. 그해 4월 시에나군이 산사비노와 카시나를 침입하자, 5월 보병 600명을 이끌고 시에나를 추격했다. 이후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자, 베르나르는 오르비에토로 이동해 그곳의 영주 지아넬로 토마첼리로부터 8,000두카트를 받았다. 그 해 6월 피렌체로 돌아와 부하들을 피렌체 관리들의 손에 맡겼다. 이들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휴전을 파기하고 피렌체를 침공할 것을 대비해 매월 2,300 플로린을 지급받는 조건으로 10개월간 근무했다.

1398년 7월, 베르나르는 나폴리 왕위를 놓고 라디슬라오와 전쟁 중이던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고용되어 페루자로 이동한 뒤 코라도 프로스페로와 4,000 기병과 함께 루이 2세에 가담했다. 이후 아퀼레이아의 많은 성을 공략했고, 루이 2세로부터 나폴리 총독에 선임되었다. 1399년 8월, 창병 300명과 보병 200명을 이끌고 움브리아의 치타 디 카스텔로로 이동한 뒤 피렌체 측과 접촉을 재개해, 평화시에는 200명의 창병과 1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 전쟁 시에는 300명의 창병과 2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 지휘관이라는 직함을 확인했다.

1399년 9월 코르바라로 가서 그곳의 지도자인 프란체스코 다 몬테마르테의 환대를 받았고, 며칠 후 베르나르의 용병대 중 90명이 코르바라를 떠나 피치노에 입성했지만, 파울로 오르시니의 기병 100명과 몬테마르테 출신 보병 100명의 공격에 밀려났고, 550플로린을 대가로 피치노를 떠나기로 했다. 1399년 가을 발렌티노를 접수하고 비스콘티를 추종하는 이들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뒀다. 1401년 9월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피스토이아로 입성해 리카르도 칸첼리에리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주민들을 도왔다. 이후 피렌체로 돌아와서 1391년 6월에 폰테 계곡에서 전사한 아버지 베르나르 드 라 살을 기리는 미사를 매년 거행하기 위해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도미니코 수도원에게 200플로린을 기부하기로 했다.

1402년 5월 240명의 창병과 2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비스콘티군의 위협을 받는 볼로냐 영주 조반니 벤티볼리오를 지원하기 위해 에밀리아로 파견되어 페르시체토의 산 조반니 앞에서 비스콘티군과 맞섰지만 불리해지자 도시에서 농성하기로 하고 성 주변의 교외 지역을 파괴하고 인근 하천의 방향을 바꿨으며, 시골에 불을 지폈다. 벤티볼리오는 야전을 벌이라고 요구했지만, 베르나르는 이를 거부하고 농성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피렌체에서도 출진하라고 지시하자, 그는 결국 벤티볼리오와 함께 출격해 비스콘티군과 맞섰다. 첫번째 전투 후 부하들이 전세가 불리하다며 도망치려 하자, 베르나르는 그중 한 명인 루도비코 가브리오토 칸텔리를 창으로 쳐 죽였다. 이에 반감을 품은 부하들은 그를 저버리고 비스콘티군에 가담했고, 결국 그는 전투에서 패해 생포된 후 파비아로 이송되었고 20,000 두카트의 몸값이 부과되었다. 그는 피렌체에 도움을 달라고 호소했지만, 피렌체는 오히려 그의 잘못된 전술적 선택으로 인해 패배했다며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환멸을 느낀 베르나르는 몸값을 지불한 뒤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1404년 1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고용된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제외한 누구와도 공작을 대신해 싸우겠다고 서약했다. 그해 10월 공작의 요청에 따라 에밀리아로 돌아와서 조반니 디 바르비아노와 다시 싸웠고, 이듬해 8월 프랑스로 돌아와서 멜룬에서 루이 1세 도를레앙의 군대에 합류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대결했다. 2년 후 프로방스에 이동한 뒤 앙주 공작 루이 2세로부터 노베스 시를 구입했으며, 우베즈의 전체 상부 계곡을 통제하는 물롱 성을 피에르 드 메부용으로부터 구입했다.

1407년 오를레앙 공작에 의해 아스티 총독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10월 피에몬테에서 반란군으로부터 밀라노 공작 잔 마리아 비스콘티를 지켜줬디. 1년 후 밀라노 총독 샤를 말라테스타를 도와 잔 마리아 비스콘티의 정책에 반대하는 포르테조비아 성주들과 휴전을 맺었다. 1409년 제노바 총독인 장 2세 르 맹그르와 함께 밀라노 공작에 반기를 든 파치노 카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1409년 5월, 오를레앙 공작이 1407년 11월 23일 파리에서 부르고뉴파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루이 드 몽주아를 아스티 총독에 추대하고 자신은 말라우센으로 물러났다.

1410년 4월, 베르나르는 블루아에서 새로운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과 합류하여 부르고뉴파와 맞섰다. 그해 11월 카우데벡 재작 장 플랜터로즈와 ㅎ마께 센 강 하류 일대를 조사했다. 1412년 1월 오를레앙에서 열린 공작 회의에 참석했으며, 2월 1일 샤를 1세 도를레앙으로부터 200 크라운을 수령했다. 1413년 2월 15일, 오베르뉴론알프스 지역 발프랑슈쉬르손에서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지지자들을 모집하던 중 부르고뉴파 인사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