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년 베이루트 미국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 1983 Beirut barracks bombings | ||
| 레바논 내전의 일부 | ||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발생일 | 1983년 10월 23일 오전 6시 22분[1] | |
| 발생 위치 | ||
| 레바논 베이루트 미국 해병대 막사 | ||
| 유형 | 폭탄 테러 | |
| 인명피해 | <colcolor=#fff><colbgcolor=#bc002d> 사망 | 307명[2] |
| 부상 | 150명 | |
1. 개요
1983년 10월 23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동시다발 자살폭탄 공격으로, 미군과 프랑스군을 목표로 한 현대사 최악의 대규모 테러 공격 중 하나이다. 이 공격으로 미군 241명과 프랑스군 58명, 민간인 6명, 그리고 테러범 2명 등 총 307명이 사망했다.2. 배경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은 ‘갈릴리의 평화’ 작전을 시작해 레바논을 침공했고, 이는 미국의 묵인과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미국이 이스라엘·마론파 민병대·바시르 제마엘 대통령을 지원하자 레바논의 무슬림·드루즈 공동체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파당적 마론파였던 바시르 제마일과 그와 밀접한 팔랑헤 민병대는 사브라-샤틸라 난민촌 학살사건을 포함해 무슬림·드루즈에 대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이는 레바논 시아파를 포함한 무슬림 사회에 미국과 다국적군(MNF)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이 때문에 MNF는 포격·저격·소화기 공격을 빈번히 받았으나 평시 교전수칙 때문에 미·프 병력은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할 수 있었다.1982년 이슬람 혁명 수비대는 베카 계곡에 기지를 만들고 헤즈볼라를 창설·지원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하자 이란은 보복을 경고했다. 1983년 9월 26일, NSA는 이란 정보부가 시리아 주재 대사에게 미 해병대에 ‘극적인 행동’을 지시한 전문을 도청했으나 이는 폭탄 테러 발생 3일 뒤인 10월 26일에야 해병대에 전달되었다. 한편 1983년 여름 이후 레바논 내전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드루즈·시아파 아말 민병대·LF·LAF 간 충돌이 격화되며 베이루트 공항과 미 해병대 기지는 반복적으로 포격을 받았다. 미국은 계속된 공격으로 대응사격과 해군 함포 지원을 시작했고, 9월 25일 휴전이 있었지만 10월 중순까지도 전투·저격·폭력은 이어져 긴장이 높아졌다. 10월 16일 아슈라 행사 중 이스라엘군과 시아파 군중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해 시아파와 이스라엘,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 악화가 심화되었다.
3. 전개
1983년 10월 23일 오전 6시 22분경, 19톤짜리 노란색 메르세데스 벤츠 화물트럭이 베이루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8 해병대 본부 막사를 목표로 한 이 트럭은 폭발물을 실은 자살폭탄 차량으로, 경계병들은 교전규칙(ROE) 때문에 신속히 대응할 수 없었다. 운전자는 경비초소와 울타리를 돌파하며 건물 로비로 돌진했고, 트럭에 실린 폭발물이 폭발하여 4층 건물이 붕괴되며 미군 241명 사망했다. 폭발력은 건물 기둥을 들어올리고 건물을 자체 붕괴시킬 정도였다. 약 10분 후, 6km 떨어진 서베이루트 라믈레트 알 바이다 지역의 프랑스 1공수대대 막사도 유사한 자살폭탄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군 병사들이 트럭을 사격해 차량을 멈췄지만, 폭발이 원격으로 이루어져 9층 건물이 무너지며 프랑스군도 58명이 사망했다.4. 결과
1983년 베이루트 막사 폭탄 테러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공격을 규탄하며 미군을 레바논에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밝혔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도 현장을 방문하며 “우리는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 부통령 조지 H.W. 부시는 폭격 현장을 시찰하며 미국은 테러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폭탄 공격과 관련된 이란 혁명수비대(IRGC) 훈련기지에 대한 공습을 계획했으나 국방부 장관 웨인버거의 반대로 실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러나 실질적 보복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국 내 국가안보팀 내부 의견 차이와 당시 이란 연루 증거의 불확실성이 주요 원인이었다. 공격 후 미군과 MNF는 계속 포격과 저격 공격에 시달렸고, USS 뉴저지 전함은 1983년 12월과 1984년 2월 베카 밸리와 숲 지역에서 드루즈·시리아군 목표를 포격했다. 미군 철수는 1984년 2월 26일 완료되었으며, 이후 다국적군도 2월 말까지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일부 병력은 해상과 주둔지 근처에 잔류했으나, 4월 21일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폭탄 테러가 미·프군 철수를 촉발했다는 일반적 해석과 달리, 연구에 따르면 1984년 레바논 국가군 붕괴가 철수의 주된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