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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10 23:12:44

벨베스/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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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바람개비

1. 장문 배경

실존의 세계에 매료되어 스스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하는 벨베스는 공허의 심장에서 전이된 시커먼 암 덩어리와도 같다. 그녀는 이 암 덩어리를 통해 룬테라 전역을 장악하고 자신의 뒤틀린 상상에 따라 다시 세계를 재건하길 원한다. 막대한 양의 새로운 경험과 기억, 개념을 갈구하는 벨베스는 도시와 그곳의 시민들을 집어삼킨 다음, 그 정보를 활용해 '연보랏빛 바다'라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게 한다. 공허조차도 벨베스의 탐욕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마치 원시의 바다처럼 확산하며 모든 존재를 자기 세계에 굴복시키거나 파괴한다.

비록 벨베스는 룬테라에 처음 나타났지만, 그 탄생은 천 년 동안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공허와 초기 현실 사이 알레르기 반응의 결과물이다. 때 묻지 않고 평온했던 무의 차원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면서 존재가 생겨났고, 강제로 개별화된 공허의 존재들이 충격과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영겁의 세월 동안 날뛰었다. 그들은 모든 걸 집어삼켜 소멸시키는 습성에 따라 '공허'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공허 내부의 존재들은 세계와 닿을 때마다 변했다. 한때 완벽했던 형태에서 쾌락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짐승으로 변이되었다.

그리고 공허 역시 함께 바뀌었다. 전투를 치르고 적을 급습할 때마다 공허의 굴 속 가장 어두운 곳에서 훨씬 사악한 존재가 자라났다. 건물과 햇빛, 최초의 인간 형태 수족이 무를 향해 뻗어갔다... 그것은 어느 곳에도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었다... 공허는 전에 없던 흉측한 형태를 취했다. 이윽고 균열을 열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과 프렐요드를 침략하려는 주시자들 덕분에 이 불경한 소멸의 공간은 점점 자라 옛 공허의 정반대되는 것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바로 바람과 갈망, 욕구였다.

머지 않아 그것은 지도자를 원했다. 모든 세상에 끔찍한 새 장을 열 존재가 필요했다. '인간' 세계에 간섭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리고, 문명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헛된 전쟁을 격렬하게 치르는 동안 그들의 감정과 기억을 수확할 지도자.

그 지도자의 이름은 벨베스였다. 집어삼켜진 항구 도시와 바다의 합쳐진 기억과 경험, 감정으로부터 태어난 무시무시한 여제 벨베스의 정신에는 수백만 년간의 지식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덕분에 그녀는 세상의 이치를 거의 다 알고 있으며, 이제 룬테라와 자신을 창조한 주시자의 영역을 파괴하려고 한다.

벨베스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자들에게 거짓말이나 질문을 하거나 진실을 호도하지 않는다. 단지 사물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공허의 성질 덕분에 승리가 거의 보장된 만큼,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벨베스를 불쾌하게 하는 자들은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인간형 신체와 신경 말단, 근육, 눈자루 등은 단순히 적응력이 뛰어난 듯 보이지만, 거대한 날개를 펼치면 무시무시한 본모습이 드러난다.

얄궂게도 고대 슈리마에는 이를 가리키는 용어가 있었다. 대강의 의미는 '망각의 신'이었다. 부족 신화에 따르면 무자비하지만 증오 없이 모든 것을 지우고, 그 자리를 자신으로 채운다고 한다. 그 이름을 따 '벨베스'라는 도시도 생겼으나, 수백 년이 지나면서 진짜 의미는 잊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 비롯된 한 생명체는 그 의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2. 바람개비[1]

파일:Bel'Veth_Kai'Sa_Pinwheel.jpg

"좋아." 카이사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 앞의 형상을 쳐다보았다. 형상은 그녀를 둘러싸고 사방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괴물이 거대한 날개를 펼쳐 카이사의 시야를 가렸다. 움직이는 인간의 팔들이 카이사의 머리를 벽 쪽으로 붙들고 있어 다른 곳을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괴물은 계속해서 몸집을 부풀려 자신의 거처인 악몽의 바다를 메우고 있었다. 성인 한 명의 크기였던 괴물의 빛나는 이빨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포식자의 눈 네 개가 차가운 시선으로 카이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굶주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크기로는 알 수가 없었다.

카이사는 인간 모습일 때가 더 맘에 들었다.

"좋아." 카이사가 다시 한번 말했다. 몸을 마비시키는 듯한 공포... 경외감에 얼어붙은 갑옷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생충과 같은 갑옷은 공허가 만들어낸 근원적인 생물 중 하나였다. 공포라는 것도 느낄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카이사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있지 않고서야 이것으로 끝일 것이다. 카이사는 최후의 수단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다. 벽 쪽으로 대포를 쏴버릴까, 아니면 이놈의 입 속으로 쏴버릴까... 주둥이가 맞나? 카이사는 괴물의 속도를 떠올렸다. 괴물의 몸집도 떠올려 보았다.

빠르고 거대하다. 압도적이다.

최후의 일격으로는 별 피해도 입히지 못할 테고 카이사에게도 치명적일 것이다. 그래도 뭔가 먹히겠지. 피해는 줄 수 있을 테니까.

"넌 내 본 자아를 불쾌하게 만드는구나." 괴물이 나직이 말했다. 이곳 전체를 울릴 만큼 우렁찬 괴물의 목소리에 기이한 구조물들이 휘청거렸다. 들쭉날쭉한 구멍에서는 수천 개의 공허 빨판이 쏟아져 나왔다. 굽이치며 속삭이고 비명을 내지르는 목소리였다. 화음이 쌓여 셀 수 없이 많은 목소리가 아리아를 불렀다.

카이사가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이 저곳으로 사라진 거였어.

공허는 한 시간도 안 되어 벨베스시였던 이곳을 폐허로 만들었다. 카이사는 때를 맞추지 못했고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미 사라졌다. 전부 다. 모두 다. 남아 있는 건 빛나는 거대한 분화구 같았다. 분화구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무언가로 변형되고 있는 부서진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조물은 얼어붙은 생물체 모양, 얼어붙은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장난감 마을을 짓고 있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바스타야는? 동물과 식물은? 파괴된 도시와 황량한 만 중심지에 있는 터널을 지나쳐 왔지만 누구의 흔적도 볼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몸통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엄청난 높이의 형형색색 촉수와 몸체의 끔찍한 공허 태생이 전부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허가 휩쓴 자리는 아름답진 않아도 보통 무언가 남아 있었다.

카이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가 도시인 거군." 울려 퍼지는 소리의 벽을 뚫고 카이사가 말을 내뱉었다. "벨베스가 너인 거야."

"그래." 벨베스가 부드럽게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그들의 목숨이 재료가 되어 내가 태어났지. 기억. 감정. 역사. 나 자체로 벨베스이자, 벨베스는 내가 붙인 이름이지."

벨베스는 거대한 몸집을 내세웠다. 황금빛 광선이 가오리 같은 형체 위로 부드럽게 빛을 비추었고, 죽어가는 세계의 고리처럼 공허의 바다에 떠오른 뒤틀린 태양을 둘러쌌다. 새로운 살점이 밀물과 함께 물결을 일으키며 숨을 들이쉬고, 정맥은 잠시 번쩍인 뒤 괴물의 피부 표면에서 떨어져 나갔다. 모든 정맥은 어째서인지 각기 살아 있었다. 모두가 한 집단의 개체 같았다. 수만 개의 공허 빨판이 멀리 있는 산의 정상을 도는 새처럼 그들의 여제 주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공허에 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소름 끼치고 흉측하며 아름다운 모습.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엄청난 광경에 충격을 받은 카이사는 자신을 벽에 붙들어 맨 팔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짓다니. 카이사는 갈 곳 잃은 공허의 손을 반사적으로 어깨에서 떼어냈다.불가능한 일이야.

공허 태생은 스스로의 이름을 짓지 않는다. 대부분 제르사이처럼 슈리마 역사에 등장하는 개념을 따라 이름을 갖게 된다. 모래 언덕에 널린 괴물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운이 좋은 이들에 의해 말이다. 공허 태생에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생각도, 인지 능력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름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살아 있는 세상에서 나온 공허 태생은 이름을 원하지조차 않는다.

그런데 왜 저 여제는?

"너와... 싸우겠어." 카이사는 마음을 먹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널 끝내주지."

"넌 그러지 못해." 벨베스의 수많은 목소리가 답했다. "내 가장 근원적인 형태에도 넌 맞서지 못하지. 내 존재가 생기기도 전, 너보다 먼저 이미 많은 이들이 공허에 맞서려 했다. 영웅이 되고자 했던 이들은 공허에 맞설 무기를 들고와 휘둘렀지. 하지만 모두 흡수되어 버렸다. 조금이나마 있던 잔해는 연보랏빛 바다의 소금이 되어 녹아버렸지. 생존자는 단둘. 그중 너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둘?"

"너와 네 아버지."

묵직한 것이 카이사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생각이 격렬하게 맴돌며 카이사는 공황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여제가 무엇이든 신뢰할 수는 없었다. 여제는 감정 없는 대량 학살을 의인화한 살아있는 괴생명체였다.

"거짓말하지 마." 카이사가 분에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거짓말하지 않아, 카이사." 여제가 말을 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 공허의 궁극적인 승리는 정해진 일이다. 거짓말도, 반쪽 진실도, 질문도 필요 없지. 생각을 열어. 내가 보여주지."

공간이 뒤틀렸다. 벨베스의 거대한 몸이 뒤틀리며 작고 알아보기 쉬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벨베스는 조용히 아래로 떠내려가더니 카이사 위로 나타났고 덩굴손과 눈자루는 인간의 머리 같이 분절된 타원형의 형태로 변했다. 벨베스의 두 얼굴이 카이사를 쳐다보더니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싸 위엄 있는 모습으로 부상했다.

카이사는 몸집이 커지는 것보다 줄어드는 게 더 역겹다고 생각했다. 매우 기괴한 모양과 소리를 내면서도 레비아탄의 위엄 같은 것이 부족했다.

"네가 살아 있는 이유는 내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을 한 여제의 목소리는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지금쯤 알아차렸어야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조금 전에 한 번의 공격으로 내달려야 했던 지면 위 20미터의 균열이 카이사의 눈에 들어왔다. 벨베스의 공격은 너무 빨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기조차 힘들었다. 여제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원래 크기의 이백 배 이상으로 몸집을 키웠다.

여제는 그녀를 둘러싼 '연보랏빛 바다'라 불리는 물결치는 생지옥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싸움을 걸 때가 아니었다.

카이사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몇 가지를 계산해 보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 진짜 상대가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다. 벨베스의 인간 얼굴이 흥미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카이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카이사는 자신의 패배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빠를까? 얼마나 빨리 반응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 생물의 군집... 이 세상 모든 지성을 합친 것에 대항하여 말이다... 숙련된 전술가라도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벨베스는 1초라는 시간 동안 과거를 지나온 모든 것, 옛 도시와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으로부터 훔친 기억 속에서 수억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룬테라가 세워진 이후 그녀에게 사로잡힌 모든 존재는 카이사가 눈도 깜빡하기 전에 감정이 분류되고, 해부되며, 끝없이 사로잡혀 이 괴물의 신경 의식을 들락날락 할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카이사가 수긍했다.

적이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 할 수 있는 답변 하나는 무엇이겠는가?

"넌 따를 것이다." 여제는 몸을 돌려 자신에게 길을 터주는 두터운 돌연변이 산호 사이를 떠다니며 말했다. 카이사는 잠시 멈추고 정원을 걷고 있는 인간처럼 유령 같은 팔다리에 꿰매어진 반 물체, 진줏빛 구조물이라는 혼돈의 집합체 사이를 조용히 유영하는 여제를 바라보았다.

그래. 공허의 기준으로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물어봐. 뭐든." 벨베스가 덧붙였다. 마지막 말에 카이사의 관심이 쏠렸다.

"그래. 먼저 첫 번째 질문은... 정체가 뭐지?" 갑옷의 긴장이 풀리고 움직일 수 있게 된 카이사는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물었다. 카이사는 펄럭이는 수많은 갈매기 날개와 합쳐진 부유하는 곰을 지나쳤다. 괴물이 자신의 무게에 눌려 고군분투하는 동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게 다 뭐냐고? 넌 공허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벨베스가 답했다. "내가 공허 그 자체다. 그리고 이게 우리의 모습이 될 거다."

카이사가 말을 더듬었다. "넌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존재라며. 도시라며. 그런데 도시가 되고 싶다고?"

"아니." 벨베스가 말했다. "공허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최초의 별이 텅 빈 이 세계 너머에서 빛나기 전부터 공허는 공허였지. 완벽한 하나의 개체로서 조용하게 말이야. 그러고 나서 소리가 생겨났지.

"현실은 그 속삭임에서 생겨났고 우릴 집어삼켰다. 그 영향으로 우린 왜곡되었지. 부서지고. 변화했지. 아무리 애를 써도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 나의 옛 주시자들은 존재를 침략하고 파괴하려 했지만, 그들은 그 존재에 동화되었지. 숭배를 갈망하고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고...

"그리고 순식간에 배신당했지..."

너무 강력하게... 완전하게 변하여... 버려지고 말았어. 그들에겐 말로 할 수 없는 증오만 가득했다. 가차 없이 모든 현실을 말살하려 했다."

벨베스는 거대한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이동했다. 카이사는 얼룩덜룩한 가짜 햇빛 너머 거대한 구멍을 보았다.

탈리야의 민족을 먹어치우고 벨베스를 파괴했으며 슈리마 남동쪽 도시를 집어삼킨 정체였다.

공허가 먹어 치우는 건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변태는 불완전했어." "이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변신을 시작하게 되었지. 난 도시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우리는 너희 전부가 되려는 거야."

절벽의 정점에 도달한 카이사는 숨을 헐떡였다. 카이사와 벨베스가 바라보는 건 도시가 아니었다. 공허의 산호는 뒤집힌 슈리마 양식 건물이 끝없이 펼쳐진 기괴한 융단 같았다. 공허의 빨판은 그들 사이에 무리 지어 있었고 어둠의 형상은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움직였다.

옳지 않았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무엇도 완성되지 않은 채였다. 필요로 하는 건...

"안 돼." 카이사는 자신에게 말하듯 저항했다. "공허는 모든 걸 지워버리고 싶어 하지. 그렇게는 존재할 수 없어. 이걸 끝내려면 넌... 모든 것이 필요해."

벨베스가 답했다. "맞아. 모든 게 필요해. 내가 공허이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 때까지 나는 네 세계를 먹어 삼킬 거다. 그렇게 난 존재할 거야. 날 막을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으니까."

여제는 일부러 싸늘하게 카이사를 쳐다보았다.

"공허의 딸아, 내가 제안하지. 나를 위해 네 세계는 끝이 나야 해. 하지만 옛 주시자들에게 나는 모욕이지. 창조가 그들을 불태우고 그들은 너와 나, 그리고 모든 걸 파괴할 거야.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들이 감옥을 벗어나도 그들의 물결은 깨지지 않을 거다. 종말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카이사는 인공 눈으로 벨베스를 쳐다보았다. 저항심이 그녀를 타고 퍼져나갔다. "모든 걸 휩쓸어버리겠다고. 내가 왜 그걸 도와야 하지?"

"주시자의 파멸을 위해 날 도와. 그럼 네 종족은 살려두지... 잠시지만. 한 달. 일 년. 어쩌면 더. 그때는 날 쓰러뜨릴 무기나 영웅이 있겠지. 그러진 못하겠지만... 시도는 할 수 있을 테니. 기회를 주지. 네게 주어지는 것 그 이상이야."

카이사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벨베스는 아래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렸고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이사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내가 널 여기서 끝내버리겠다면?"

벨베스가 말했다. "그럴 수 없어. 넌 의지도, 지식도, 힘도 부족해. 나만이 너의 구원이야."

카이사의 갑옷이 전율하듯 살아 움직였고, 공포에 떨듯 분출구를 가열했다. 카이사는 자신의 생각으로 통제해 보려 했지만 갑옷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아는 듯했다. 기회를 노리고자 카이사가 벨베스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아, 안 돼.

여제의 칼날 같은 날개 끝이 카이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카이사가 벗어나려 하자 여제는 카이사를 땅에서 들어 올렸다. 카이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발사해댔다. 여제에게 불타는 보라색 에너지 미사일이 쏟아지며, 작은 공허 태생을 반으로 찢어 놓은 광선이 그녀의 반투명한 피부를 뒤덮었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공허의 딸아. 주시자를 찾아 진실을 확인해. 그렇지 않으면 네 빛이 다른 모든 이들의 빛과 함께 꺼질 것이다. 이건 협박이 아니야. 이건 나의 약속이지."

벨베스가 손을 놓자 카이사는 벨베스의 기이한 바다 위 뒤틀린 하늘로 날아갔다. 쌍생의 연보랏빛 도시가 반짝였고 그 창문은 빛을 내는 생명체와 형태가 없는 끔찍한 것들로 미끈거렸다.

카이사가 공허 태생 터널 하나를 통과하여 눈부신 햇살 속으로 뛰어들자 여제는 몸을 돌려 자신의 결핍한 세계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카이사는 슈리마 남쪽의 사막을 지나 모래 언덕에 세게 내던져졌다. 몸이 고무공처럼 튀어 올랐다. 벨베스시의 빛나는 껍데기가 멀리서 조용히 타올랐다. 알아볼 수 있는 생명체 하나 없는 곳에서 새 생명이 움직이며 땅을 세우고, 모든 것 위에 퍼져나가 세상을 집어삼킬 암 덩어리가 생겨날 것이다.

현실 전체가 바람에 요동치는 것처럼 모든 광경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끔찍했다.


[1] 벨베스의 시네마틱인 그 모든 것의 미래에서 바로 이어지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