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모용선비와 부여 간에 벌어진 전쟁.2. 상세
단석괴의 등장 시기부터 부여는 선비와 계속 충돌하며 대립하고 있었는데, 서기 285년, 선비 모용부의 우두머리 모용외(285~333 재위)가 침공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도성이 함락되고 10,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의려왕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로써 국력은 크게 쇠락했다.[1]
3. 진무제, 부여에게 도움을 주다
부여가 모용선비부의 모용외에게 털린 사실을 알게된 중국의 황제 진무제는 평주의 호동이교위 선우영이 부여를 구하지 않았다고 파면시킨다.그리고, 군사를 보내 모용외를 격파하고 나라를 회복시켜주었으며,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중국으로 인신매매 당한 부여인들을 속환시키는 등 전통적인 중국의 동맹 부여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부여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2]
[1] 이때 의려왕의 자제들은 두만강 일대의 북옥저로 도피했는데, 그 중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서진의 보호를 받으며 돌아가 나라를 되찾았다(復)는 기록이 있다.[2] 한편 일부 무리는 북옥저에 정착하여 동부여가 되었고, 훗날 고구려 초기의 기록을 정비하는 과정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북부여랑 동부여가 섞이게 됐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또 다른 유민들이 백제로 흘러들어가 근초고왕이 즉위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285년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옥저 지역으로 도망한 부여 유민들이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설이 정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