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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괴 | 화련 | 괴두 | 보도근 | |
<rowcolor=#fff> 제5대 | ||||
가비능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선비 초대 대인 檀石槐 | 단석괴 | |
존호 | 대인(大人) |
휘 | 단석괴(檀石槐) |
부친 | 투록후(投鹿侯) |
모후 | 불명 |
생몰 | 137년 ~ 181년(향년 44세) |
재위 | 151년 ~ 1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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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세기에 등장한 선비족의 대군장. 선비족을 포함한 북방 여러 유목민족을 통일하여 선비족 최초의 유목 제국인 선비 제국을 세웠다.2. 생애
전설에 따르면, 단석괴의 어머니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며 떨어진 우박이 입속에 들어가 임신을 하였고 10달만에 단석괴를 낳았다.[1]용감하고 건장하면서 지략을 가져 부락민들이 모두 경외하고 복종했으며, 금지하는 법을 시행하면서 공정하게 처리해 이를 함부로 어기는 사람이 없었고 추대받아 '대인'이 되었다. 탄오산과 철구수 사이에 왕정을 건립하고, 군사가 강성해지자 동•서부의 대인들이 그에게 귀부했으며, 남쪽으로는 (후한의 북쪽) 변경 지역을 약탈하고, 북쪽으로는 정령[2]을 막았으며,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을 공격해 흉노의 옛 지역을 점거했고 요동을 정복하여 그 동•서의 길이 4,000여리나 되었다.[3]
환제 영수 2년(156년) 가을 7월에는 운중을 공격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후한을 공격했으며,[4] 그를 막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사신을 파견하고 인수를 가져와서 왕으로 책봉해 화친을 시도했다. 단석괴는 이를 거부하고 후한을 공격해 더욱 약탈했으며, 후한 영토를 유린하고 후한의 영토를 3부로 나누면서 각 부마다 대인을 두어 통치하게 했다.
영제 희평 6년(177년)에 후한에서 하육, 전안, 장민 등을 파견해 공격하자 3부의 대인들에게 각 무리를 거느리고 싸우게 해서 이들을 모두 격파했으며, 이후에도 후한을 계속 공격하다가 181년에 사망[5]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화련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화련의 역량은 부친 단석괴에 미치지 못한데다가 전사하여 선비 제국은 분열되고 쇠퇴하여 미완의 유목 제국으로 해체되었고, 답돈을 비롯한 오환족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으나 시대의 흐름 역시 그들에게 유리하지 못해서, 그 후 선비족은 조조의 오환족 토벌 이래 가비능 그리고 미래의 모용부, 탁발부, 우문부에게 그 역사적 역할을 넘겨주어야 했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전투기에서는 소패2 전투 편에서 이름만 언급된다. 여기저기 선비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웠지만[6] 그가 40대에 사망하자 선비족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흩어진 뒤 크게 3개의 세력으로 쪼개졌다고 나온다.[1] 하늘의 빛에 의해 회임하는 것이 고구려의 건국군주 고주몽과 유사하다.[2] 투르크의 선조 철륵의 다른 명칭이다.[3] 단석괴 생전에 선비족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범위로 보면 당시의 후한 영토보다 넓었던 북방제국이었다.[4] 후한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아서 후한 조정에서는 장환을 사흉노중랑장에 임명하여 선비족에게 대항했다.[5] 당시 기준으로 적지않게 산 것은 맞지만,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흔히 아는 《삼국지》의 배경 시대 후한말 삼국시대라는 군웅할거의 난세가 펼쳐지는 역사를 생각해보면 5년만 더 살았어도 후세에도 엄청난 인지도를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큰 걸물인 셈.[6] 이 건국 장면은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포스터를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