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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4 23:10:36

사바 네마니치



파일:밀레셰바 수도원의 성 사바 프레스코화.jpg

사바 1세 네마니치 (세르비아어: Свети Сава I Немањић, 1174년 ~ 1236년 1월 14일)

1. 개요2. 생애3. 업적4. 참고 문헌

1. 개요

세르비아의 왕족이자 동방 정교회 대주교,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이다. 세르비아에서는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성 사바(Свети Сава), 성 사바 1세(Свети Сава I)[1]라고도 한다.

2. 생애

1174년경 세르비아의 지배자인 스테판 네마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라스트코 네마니치(Растко Немањић)였으며, 어릴 적부터 신앙심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1190년 아버지 스테판 네마냐에 의해 자후믈례의 영주로 봉해졌다가[2] 1192년 아토스 산으로 출가하여[3] 사바라는 이름의 수도승이 되었다. 1197년에는 아버지인 성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수도 생활을 하던 네마냐를 초청해 아토스 산의 바토페디 수도원에 네마냐의 거처를 마련했다. 1198년에는 아버지 네마냐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승인을 받아 아토스 산의 힐란다르 수도원을 재건한 후 그곳에 거처를 정했다.

아토스 산에서 사바는 신학, 철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며 뛰어난 지식과 덕망을 쌓았다. 그는 아버지 스테판 네마냐가 퇴위한 후 세르비아로 돌아와 형 스테판 2세 네마니치를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 사바는 형 스테판 네마니치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아 대관식을 치른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곧 화해했으며, 1219년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니케아로 떠나 그곳에서 테오도로스 1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마누일의 승인을 받아 동방 정교회로부터 독립된 세르비아 대주교구를 설립하고 초대 대주교가 되었다.

대주교를 설립한 사바는 교회법과 세속법을 모아 주해를 붙인《크름치야》 (Крмчија)라는 법전을 편찬하였다. 이 법전은 동로마 제국의 법률 체계를 바탕으로 세르비아 교회의 필요성에 맞추어 구성되었는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가 원했던 교회와 세속권력의 일치에 반대하고 교회와 세속권력의 조화를 추구하던 사바의 입장이 담겨 있다.

사바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조직을 정비하고 교리를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힘써 많은 학교와 수도원을 세웠으며, 세르비아 문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성 사바는 1233년[4]에 대주교 자리를 아르세니예 1세 스레마츠(Арсеније I Сремац)에게 양위한 후 순례 여행을 떠났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의 묘지를 참배한 후 불가리아에 방문했는데, 불가리아의 수도 터르노보에 머물던 도중 병에 걸려 1236년 1월 14일 사망했다. 사바의 유해는 불가리아 벨리코 터르노보의 성 40인 순교자 교회(Св. Четиридесет мъченици)에 안치되었다가 그의 조카인 스테판 블라디슬라브가 불가리아 측과 협상하여 1237년에 세르비아로 운구한 후 밀레셰바 수도원(Манастир Милешева)에 안장했다.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이 성 사바의 유물을 소각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건립된 베오그라드의 성 사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3. 업적

사바는 세르비아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독립시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했으며, 수도원의 건립을 통해 교육과 문화를 발전시켜 세르비아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그는 뛰어난 외교 능력을 발휘하여 세르비아를 안정시키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성 사바가 저술한 스테판 네마냐의 생애를 다룬 전기인 《성 시메온 성자전》 (Житије Светог Симеона)은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사바는 세르비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 중 한 명이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세르비아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축일인 1월 27일은 세르비아의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4. 참고 문헌


[1] 성 사바 2세는 스테판 우로시 1세의 형제인 프레디슬라브(Предислав).[2] 네마냐의 형인 미로슬라브가 다스리고 있던 지역을 사바가 네마냐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받아 다스리게 된 것인데, 기록이 모호하다 보니 사바가 정말로 자후믈례의 통치권을 부여받았는지는 논란이 있다. 학계에서는 20세기 중반에 발견된 네마냐가 발행한 헌장을 근거로 네마냐가 1190년 미로슬라브를 쫓아냈고, 미로슬라브가 두브로브니크로 망명하자 사바를 자후믈례의 공작으로 임명했다는 견해와 미로슬라브와 네마냐 사이에 갈등은 없었고, 미로슬라브의 두브로브니크 망명도 미로슬라브가 네마냐의 동로마 제국 침공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이뤄진 것이며, 사바가 자후믈례를 통치한 적은 없다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3] 두샨 바타코비치의 《세르비아 역사》에는 사바가 1196년에 네마냐로 자후믈례를 영지로 받았다가 이후 큰형 부칸 2세 네마니치에게 자후믈례의 통치권을 위임했다고 나오는데, 세르비아어 위키의 정보와는 다른 것으로 보아 혼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세르비아 역사》에는 어째서인지 1234년에 양위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