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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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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96969><colcolor=#fff> AV 배우 프로필
파일:Sakura Sena.jpg
이름 세나 사쿠라
瀬名さくら / Sakura Sena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
생년월일 1975년 1월 31일([age(1975-01-31)]세)
신장 163cm, A형
체중 49.8kg
쓰리사이즈 101-58-86, (K컵)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출생 및 개인사3. 데뷔 및 AV 배우 활동기4. 본격적인 서구 포르노 활동5. 잠적, 그리고 사실상 은퇴6. 특징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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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라 세나는 일본 출신의 AV 여배우, 포르노 배우이자 모델이다.

일본 AV와 미국/캐나다 포르노, 즉 동서양의 업계 모두에서 활동한 배우이다. 일본 AV 산업에서의 작품 활동으로 배우 경력을 시작하였다.

2. 출생 및 개인사

사쿠라 세나는 1975년 1월 31일 일본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의 부모님[1]과 위로 1명의 오빠와 아래로 1명의 남동생이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만 정말 복잡한 가정환경이었다고.

성조숙증으로 인하여 이른 나이에 성적으로 조숙해졌다고 한다. 그녀가 음란물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13살 때 아버지가 모아둔 미국의 하드코어 포르노 비디오를 발견한 것이었고, 몰래 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 경험으로 인해 서양 남성들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의 또 다른 하드코어 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받아 진공청소기로 자위를 하는 행위도 해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진공청소기로 자위를 하면서 피부가 찢어지고 곳곳에 피가 뿌려졌는데 하필 그 때 할아버지가 방에 들어왔고,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청소기의 호스는 질에 박혀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러고는 나한테 전화가 왔다면서 당황한 모습으로 나가셨다. 당시에 너무 부끄러웠다.” 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접하게 된 미국의 하드코어 포르노로 인해 성적 취향 뿐만 아니라 업계의 하드코어 배우들이나 혹은 서양의 거유 포르노 스타들을 동경했다고 한다.[2] 확실히 그녀의 커리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4살에 첫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 경험을 통해서 친구의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지인들 등 여러 성인 남성들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성인 기구를 사용하는 방법도 배웠다고. 1년 뒤에 세나는 야쿠자 조직원들에게 납치당하여 야쿠자가 관리하는 가라오케와 러브호텔에 끌려가 집단 강간을 당했다. 방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조직원들이 있었으며, 그 곳에 있던 야쿠자 조직원들 모두에게 2시간 동안 펠라치오를 했다는 사건을 겪었다고 고백했다.[3]

항상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성향이 강해서, 획일적일 정도로 보편적인 흐름을 따라가는 또래 소녀들이 추구하는 것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스스로의 뚜렷한 주관에 따라서 그녀가 선택했던 첫 번째 목표는 바로 디자인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3. 데뷔 및 AV 배우 활동기

그녀가 19살이었던 1994년, 어느 사진 작가의 조언에 따라 누드 모델로 진지한 경력을 쌓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AV 업계에 데뷔하였다. AV 배우가 된 사쿠라 세나는 누드 화보 촬영 활동과 KUKI사[4]에서 후지와라 시호(藤原 史歩)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해금"이란 작품에서 청초함 속에 요염함을 지닌 뱀파이어 역으로 큰 평가를 얻는다. 한편 영화 '치한 전차' 등으로 코믹한 연기도 해내는 다재다능함을 보인다.

1년 뒤, 1995년 5월에 오사카 스트립 극장에서 스트리퍼로도 데뷔했으며, 이케지마 유카타 감독의 핑크 영화 <Molester’s Train: Molester Techniques(痴漢電車 痴漢のテクニック)>에도 출연하였고, 1995년 10월까지 S&M 잡지 Bishojo SM Sashinsu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단독 사진집이 출판됐다. 이 당시에 그녀는 즉시 스타덤에 올랐고, 일본 전역의 카바레 스타일 스트립 클럽들에서 활동하는 등 각박한 생활이 시작됐다.[5]

그 이후 거의 4년 가까이 스트립 극장에서 스트리퍼로 일하고 성인영화 배우로서 여러 편의 성인영화들에도 출연하였다. 또한 미사키 코란이란 이름으로 AV 작품들을 내거나 다른 명의로도 몇 편의 작품들에 출연했다.

1997년 겨울, 마릴린 먼로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은 사쿠라 세나는 "M 먼로처럼 전 세계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내건다.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이 산업에서 그저 단순한 AV 여배우로만 매몰되어 버릴 수 있다는 위기를 느끼고 다른 여배우와의 차별화를 시도하기 시작한다.

1998년 전후부터 회사의 영향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스스로가 직접 제작에 도전하기로 결심한 세나는, 평범한 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 소속사와 예명을 바꾸고(칸다 미호, 카가와 미키, 미사키 코란 등) 출연 편수도 늘고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고 4월달에 가슴 성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시도 중에도 그녀는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것을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1998년 말부터 해외 데뷔에 대한 의지가 명확해진 그녀는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향한 ​​계획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6] 결심을 확고히 하고자 일본에서의 활동이나 경력을 청산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1999년 초 팬들과 업계의 많은 관계자들로부터 아쉬움을 받으면서도 후지와라 시호로서의 활동과 경력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때까지 그녀(후지와라 시호 명의)의 출연 작품들은 총 70편.

한편으로 이 시기에 스트리퍼로도 활동하던 그녀가 무대에 올랐을 때 객석에서의 반응 중 "가짜 유방"이라는 야유의 반응이 있었는데, 속상한 마음 속에서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7]

1999년에 기존의 후지와라 시호 명의로 해온 활동들을 마친 사쿠라 세나는 잠시 AV 업계에서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전부터 서구권의 포르노 스타 스타일을 동경하고 있던 사쿠라는 해외 진출을 위해서, 그리고 가슴 성형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아다녔다. 해외 진출과 유방확대 수술에 대한 주변 지인들의 반대도 있었다고 하나 고심 끝에 유방을 거대하게 확장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사쿠라 세나는 가슴을 강화할 것을 결심하고, 400cc의 수술을 받았다. 이후에 일본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 플로리다로 가서 1,000cc 수술을 받아 매우 큰 32인치 G컵 사이즈로 만드는데 성공하고, 당시 일본 미디어에서는 그녀의 별명을 개조인간(사이보그)라고 하기도 했다고. 이 무렵 사쿠라 세나는 미국의 Score Magazine(거유 포르노 전문 잡지)에 일본인으로서 처음 누드 화보를 촬영하고 게재되었다.
"지금까지 저처럼 2번째로 "커밍 아웃(데뷔)"을 도전한 적이 있는 일본인 연기자는 아직까지 보기 드문 거 같아요. 동양인 최초로 스코어 매거진 데뷔 이후 플로리다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일본 미디어가 놀라울 정도로 열광했습니다! ‘전설적인 스코어 매거진에 일본 여성이 등장한 것은 처음입니다.’ 하면서 말이죠. 당시의 분위기는 정말 폭발적이었습니다. 언론의 반응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성원에 힘입어 저는 여러 장의 새로운 비디오 / DVD 발매와 수많은 잡지 촬영을 했습니다."
2004년도 인터뷰에서
귀국 후, 그녀는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같은 해 9월, Sakura Sena 명의로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참신한 시도였으며, AV 여배우가 직접 제작과 운영을 하는 활동에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다.

이듬해부터 2001년까지는 성인 비디오에 다시 데뷔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한다. 소설가 시마다 마사히코와 함께 화보 촬영을 하거나 소설의 모델 등 그녀의 평가는 AV 업계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갔지만, 항상 자신의 변화와 개선을 요구했던 그녀는 일본에서의 활동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2001년, 1년 뒤인 2002년에 발매할 Monster Body 라는 작품을 위해서 그녀는 외국인 출연자들과 함께 작업하기로 계약하였다.

2002년에 일본에 귀국해 세나 사쿠라의 명의로 AV 업계에 복귀했다. 포르노의 본고장 미국 특유의 스타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강조된 가슴'을 제대로 살려서 활약한다.

4. 본격적인 서구 포르노 활동

2003년, 사쿠라 세나는 독일계 캐나다인 남자친구와 사귀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5년 전에 사쿠라 세나가 스트리퍼로 활동했을 당시, 극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에 손님으로 들어온 캐나다인 남성과 서로 첫눈에 반해 바로 그날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후로 사쿠라 세나는 남편과 함께 2003년에 캐나다[8]로 이주하여 동거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AV에 복귀한 사쿠라 세나가 AV 여배우로서 2년간 전념하였으나 2004년 경부터 신작 발표가 끊어졌다. 남편이 될 남자친구와 함께 5월 29일에 캐나다로 출국하여 7년 동안 살게 됨으로써 사실상 AV 은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 캐나다인과의 캐나다 이주 때문에 AV 작품 활동을 못했던 것이지, AV 은퇴에 대한 언급이나 그 어떠한 실질적인 은퇴를 선언하진 않았기 때문에 애매하게 되었다. 실제로 사쿠라 세나가 2011년쯤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서 다시 AV 활동을 재개하고 싶고, 누드 미디어 관련 일들을 빨리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다.

2010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이혼을 하게 되었고, 굉장히 안 좋게 꼬여버린 모양이다. 캐나다인 남편과의 이혼과 양육권, 육아 문제들이었다. 소송 싸움까지 붙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사쿠라 세나는 - 2003년 이후로 2010년까지 쭉 지속적으로 자신의 인터넷 개인 웹 사이트나 여러 매체를 통해 캐나다와 미국에서 포르노 활동을 꾸준히 함으로써 많은 영상들을 찍었고 남겼지만 - 결국 여러 개인적인 악재들이 벌어져서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이어서 그 해 11월, 그녀의 웹 사이트의 서버는 끊기게 되었고 웹 사이트 등록은 2012년 9월 13일까지 만료되지 않았다. 그녀의 최신 근황은 개인 블로그와 트위터에 올라왔다 그리고 12월 9일, 그녀는 임신 14주차임을 밝힌다.

5. 잠적, 그리고 사실상 은퇴

사쿠라 세나는 캐나다에 이주하여 7년간 생활하고 있었지만, 남편과의 이혼 이후 2010년 5월에 일본에 귀국했다. 당시 치바현에서 거주했다.

“지난 6일에는 약 12년간 함께 한 캐나다인 전 남편과 협의이혼을 했습니다. 인생의 1/3을 함께 보냈고, '사쿠라 세나'라는 거유 포르노 스타가 될 계기를 제공해주었으나,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어쩔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 글을 쓴 시점에서 그녀는 임신 5개월이었다. 그런데 더 심각하게도 뱃속 아이의 아버지는 전남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둘째다. 첫째는 아들이고, 이미 당시 나이가 초등학생 고학년에서 중학생 쯤 되었다고 한다. 둘째는 딸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둘째의 아버지가 전남편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일단 전남편과의 불화를 의심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사쿠라 세나는 캐나다인의 전남편과 이혼하고 이혼한 어머니로서 2011년 당시 치바현에 거주했다고 한다. 사쿠라 세나는 2011년에 장녀를 무사히 출산하고 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7년 만에 일본으로 귀국하였기에 오랜 타지 생활로 인하여 익숙하지 않은 생활을 적응하면서, 두 아이의 육아는 상당한 곤욕을 치를 수 밖에 없다. 당시 사쿠라 세나가 꽤 고생하고 있는 모습은 당시 트위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미혼모로서 혼자 아들과 딸, 두 자녀를 감당하는 것은 대단히 고된 문제다. 또한 자녀 양육비 지급에 문제가 있다고 하니 문제가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딸이 전남편과의 사이에 생긴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류 상으로는 전남편의 아이라고 취급이 되어버려, 다양하게 꼬여 버린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자식들과 관련하여 다양한 개인적인 문제들이 많이 복잡하게 쌓여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외의 개인적인 문제들(예를 들어 당장의 수익에 관한 문제나 생활비부터 복잡했던 가족 관계 등) 때문에 차후에 포르노, AV 여배우로서 복귀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보인다...고 볼 수 있었으나 2011년 말 ~ 2012년 즈음에 개인 SNS를 통해서 "하루 빨리 일본 AV 활동이나 누드모델 등을 비롯한 성인 컨텐츠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복귀하길 바라고 있다"고 밝혔었다.

사쿠라 세나는 SNS 계정도, 블로그[9]도 가지고 있지만, 근황 소식마저도 2012년을 끝으로 끊기다가 2015년 말에 아주 오랜만에 올라왔으나 또다시 업데이트가 끊어져 버렸다.

그러던 중 2016년이 되어 오랜만에 근황 소식이 올라왔었다. 뭔가 새로운 재미를 찾아냈기 때문에 그쪽에 집중했고, 아직 신변 정리하지 않았다면 정리해달라는 부탁의 글[10]을 올리며 다시 이후 업데이트는 끊겼다. 유튜브 채널도 남아있지만, 마지막으로 업로드 된 영상이 무려 12년 전이다.

2021년 현재 사쿠라 세나는 아직 은퇴 선언을 하고 있지 않지만, 현재의 행보로 보았을 때 휴식에 의한 공백기 수준을 한참 넘어 완전한 잠적에 가까워졌기에 일본 AV나 서양 포르노 전부 은퇴 상황에 가깝다.

6. 특징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글래머러스한 몸매와 관능적인 분위기, 그리고 뚜렷한 미인계의 얼굴을 자랑하여서 주목을 받았다. 활동 초창기 이후에 활동명을 변경하면서 동시에 원래는 E 컵이었으나 I 컵으로 볼륨업을 하였다. 그 후에 한 번 더 개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2,000cc의 실리콘을 주입하는 열정과 투혼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렇게 101cm K컵이라는 놀라울 만큼 경이로운 가슴 사이즈를 앞세워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으며, 해외 포르노 스타까지 진출하게 됨으로써, 크고 아름다운 그녀의 거대한 유방은 "사쿠라 세나"라는 배우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사쿠라 세나의 매력은 일본 AV 특유의 정서, 특히 배우들의 연기를 비롯한 전체적인 정서에 심히 불호인 사람들에게 조차 열렬한 지지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연기와 전반적인 스타일, 그리고 표정과 리액션에서 흘러나오는 관능적인 분위기나 서구 포르노스러운 스타일의 과장된 체형과 기존의 균형잡힌 몸매의 이질적인 조화에서 오는 무언가가 마치 서양 포르노의 감성과 일본 AV의 감성의 혼합물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어찌보면 일찍이 접해온 해외 포르노들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일본인 포르노 스타다운 결과물이다.

7. 기타

사쿠라 세나가 후지와라 시호라는 이름의 현역 AV 여배우였던 시절에 실제로도 음란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 당시 소속사의 남성 사원들을 차례로 유혹해 '회사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상 해고됐다는 일화도 있다.
"성인물 미디어 업계로 다시 데뷔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비로소 언론으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했었죠."
2004년도 인터뷰에서
이전의 경력을 포기하고 사쿠라 세나라는 명의로 새롭게 돌아온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가 그녀의 전성기이다.
일본인으로서 스코어 매거진에 데뷔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언론의 관심과 스포트라이트가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돌아왔을 당시 일본 미디어는 열광했었고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활동[11]이 무리 없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절의 수익을 따져보면, 후지와라 시호 명의 작품이 약 70편 정도로 추정되는데, 2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연간 판매 개수 등의 상세한 숫자까지 알 수 없었지만 1년에 적어도 30편은 나와 있었다고 추정된다.
30편 × 10만 ~ 40만 = 300만 ~ 1,200만
계산을 해보면 최소 300만원, 최대 1,200만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게다가 사쿠라 세나는 당시 인기 AV 여배우이었기 때문에 AV 작품 이외에도 화보 촬영이나 이벤트 출연 등으로 인한 다수 소득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낮게 잡아도 연 수입 1,000만 엔 가까이 벌고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화려했던 스타의 이후 삶은 여러모로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동시에 근황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1]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인 것으로 알려졌다.[2] 영상 속 주연 배우를 보면서 '큰 가슴을 가진 모델로 전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자'는 생각이 마음 속에 일종의 계시처럼 꽂혔다고 한다.[3] 덕분에 스킬이 늘었다며 농담을 했지만 실제로 정말 무섭고 충격적인 경험이었으며, 이런 악질적인 범죄에 피해를 받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도움과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이며 피해자로서의 개인적인 소신을 피력한 바 있다.[4] 원래는 성인잡지 회사였으나, 83년도에 성인영화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시작과 성장을 함께 했던 초기 주역 배우가 바로 사쿠라 세나였다.[5] 10일 4회, 1일 정도 쉴 수밖에 없는 스케줄이었다고 한다. 공휴일에도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을 만나기가 어려웠을 정도로 바빴었다고 한다.[6] ‘임금을 포기하는 야간 인재 기관에서 일하는 무능한 관리자의 삶’과는 다른 것을 갈망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 그녀는 정말 하루 24시간 온종일 에이전시에게 소유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미쳐 가고 있었고 결국 모든 일에 권태를 느끼고 우울해지자 독립을 결정. 이 당시 독립에 대해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고백했다. 일본 업계에선 대부분의 종사자들이 비즈니스적으로 모두가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야 했고, 만약 속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일에 대한 요구나 요구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개인을 고립시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일본은 하나의 폐쇄된 가게와도 같았다고.[7] 자신이 존경하는 로로 페라리와 같이 있을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밀고 포즈를 취하던 해외 포르노 배우들을 떠올리며, '그렇다면 아예 확실히 철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며 의지를 굳혔다고.[8]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오카나간[9] 사실 개인이 운영하는 사이트들이 꽤 있었으나 개인 SNS 계정과 블로그를 제외하고는 다 닫혔다.[10] 사실상 은퇴 선언이나 마찬가지[11] 새로운 작품 활동과 수많은 잡지 촬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