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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5:10:09

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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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씨
파일:사타케 가문 문장.svg
<colbgcolor=#900> 사타케 가문의 가몬
사타케 부채
佐竹扇
본성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요시미츠류(義光流)
가조 사타케 마사요시(佐竹昌義)
종별 무가(武家)
화족(華族)(후작)
출신지 히타치국 쿠지군 사타케향
(常陸国久慈郡佐竹郷)
근거지 히타치국 오오타, 미토
데와국 쿠보타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쿠단
지류
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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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이리씨(山入氏)
오카다씨(岡田氏)
오카베씨(岡部氏)
누카다씨(額田氏)
코바씨(小場氏)
오다노씨(小田野氏)
시라이시씨(白石氏)
타카무라씨(高村氏)
후루우치씨(古内氏)
마츠야마씨(松山氏)
미무라씨(三村氏) 등
당주 제36대 사타케 타카시(佐竹孝)

1. 개요2. 출신3. 역사4. 관련 씨족5. 동성
5.1. 실존 인물5.2. 가상 인물
6. 여담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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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무가 중 하나. 본성(本姓)미나모토(源)로 유서 깊은 세이와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이다. 시조는 미나모토노 요시나리(源義業)인데 그 유명한 다케다 신겐의 가문, 카이겐지(甲斐源氏)의 시조가 되는 미나모토노 신라사부로 요시미츠(源新羅三郎義光)의 아들이다. 이 때문에 사타케 요시시게와 타케다 신겐이 서로 적류로서의 정통성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토오리지(通字)[1]는 '요시(義)'. 문장으로는 둥근 달이 그려진 부채 모양을 썼다. 겐지 중에서도 중세 다이묘, 근대 화족을 거쳐 현대까지 이어지는 가장 큰 가문 중 하나이다.

2. 출신

앞서 말했듯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츠의 후손이다. 초대 당주는 대체로 시조인 요시나리의 아들, 미나모토노 마사요시(源昌義)로 본다. 마사요시가 히타치노쿠니(常陸国) 쿠지(久慈) 군 사타케(佐竹) 향에 살면서 지명을 따라 '사타케'를 성씨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마사요시가 절에서 이상한 대나무를 보고는 길한 징조라고 여겨 사타케씨라고 자칭하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3. 역사

이미 헤이안 시대의 후기부터 연고지인 히타치노쿠니의 북부 일곱개 군을 지배하며 강한 세력을 과시했으며 인근의 유력 씨족과 혼인, 동맹을 맺으며 기반을 튼튼히 했다.

그러나 지쇼-쥬에이의 난(治承-寿永の乱) 때 겐지임에도 타이라 가문의 편에 서 오슈 후지와라씨가 정벌될 때까지 저항했다가[2] 결국 항복, 영지를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조큐의 난 당시에는 막부 편을 들어 보상으로 미노국을 얻었고, 가문 중 일부가 분가하여 미노로 이주했다. 이후 다소 세력을 회복한 후에도 우사미 씨(宇佐見氏), 이가 씨(伊賀氏), 니카이도 씨(二階堂氏) 등 히타치 지방의 다른 토착 씨족들이 강성해졌고, 또 히타치국 지두(地頭)[3] 직을 뺏기면서 이전만큼의 위세를 떨치진 못하였다.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 접어들어 아시카가 막부에 일찍 찬동해 남북조 시대에 북조에 속하여 남조에 속했던 히타치 오다 씨, 무츠 유키 씨 등과 싸운 공을 인정받아 히타치의 슈고(守護)로 임명되었다. 이후 막부가 간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가마쿠라부(鎌倉府) 소속 중진으로서 재기에 성공한다. 위세가 가장 강했을때인 11대 당주 사타케 요시모리 때는 가마쿠라부로부터 공식적으로 간토 지역 8명의 대영주에게 하사한 칭호인 간토 하치야카타(関東八屋形)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시모리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자 당대 간토 지방의 대가문이었던 야마우치 우에스기 씨의 우에스기 요시노리(上杉光國)를 입양해 사타케 요시히토(佐竹義人)로 이름을 바꾸고 당주로 취임했지만, 이에 사타케 가문의 방계인 야마이리 씨(山入氏)가 계승권을 주장하며 막부의 승인 하에 '야마이리의 난'을 일으켜[4],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히토는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 아시카가 가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시적으로 반발하는 분가들을 복종시켰으나, 얼마 안가 쇼군이 간토 아시카가 가문 토벌을 명하면서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이 발발. 최종적으로 간토 아시카가 당주인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자살하면서 패배로 돌아가자 그의 편을 들었던 요시히토도 피해를 입었다. 그는 아들 사타케 요시토시(佐竹義俊)에게 가독을 물려주었지만 실권은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동생인 사타케 사네사다(佐竹実定)를 총애해 가신단 간의 분열을 불러왔다. 결국 야마이리 씨와 나카씨가 사네사다 편을 들고 요시토시를 본성에서 내쫒아 버렸고, 요시토시는 친척인 오야마 가문에 의탁해야 했다. 그렇게 두개로 쪼개져 있던 가문은 요시히토와 사네사다가 연달아 사망하자 요시토시가 본성에 돌아가 조카인 사타케 요시사다를 쫒아냄으로서 간신히 통일된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명목상으로 사타케 가문 소속이었던 나카 씨(후의 히타치 에도씨)가 사실상 독립하였고, 야마이리 가문의 발흥도 전혀 억제하지 못했다.

1477년 요시토시가 죽고 아들(사생아)인 사타케 요시하루(佐竹義治)가 당주직을 물려받았지만, 즉위 직후부터 야마이리 요시모토(佐竹義知)의 도전에 직면했다. 요시모토는 사타케 가문의 가신인 쿠메 가문을 공격해 당주인 쿠메 요시타케를 전사시켰지만, 요시하루가 인접한 이와키 가문을 끌어들여 반격한 덕분에 토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직후 사타케 가문이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와키 가문의 이와키 츠네타카는 곧바로 사타케를 공격해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본성인 오오타 성을 위협했다. 결국 요시하루는 3개의 성을 이와키 가문에 양도하고 츠네타카의 여동생을 아들 요시키요의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그러던 중 1489년 야마이리 가문의 당주 야마이리 요시후지가 이번엔 다테 가문, 아시나 가문에 무츠 유키 가문까지 끌어들여 사타케 가문을 다시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나, 요시하루는 이번에는 오노사키 가문과 동맹을 맺고 방어에 성공한다. 요시하루는 이 침략 불과 1년 후 사망했다.

이렇듯 전국시대에 들어서도 야마이리 가문을 평정하지 못하고 센코쿠 다이묘로의 전환도 늦은 데다 주변의 오다 씨 등의 발흥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으나, 요시하루의 아들인 사타케 요시키요(佐竹義舜)가 야마이리 가문을 완전히 평정시키고 가문을 통일함으로서 안정을 찾는다. 사실, 요시키요 즉위 직후 야마이리 요시모토가 나가쿠라 가문, 우루노 가문 등과 동맹을 맺고 사타케를 공격해 본성인 오오타 성까지 점령하는 등 절정의 위세를 누렸으나 1492년 요시모토가 사망하자 요시키요는 나가쿠라 가문을 공격해 항복시켜 각개격파한 후 이와키 가문과의 중재를 통해 오오타 성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한다. 그러나 야마이리 우지요시가 이를 거부하며 전쟁을 고집하자 1500년 니시카나사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야마이리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다 1504년 오오타 성이 함락되며 최종적으로 멸문당한다. 다만 이 전투 이후 중재에 대한 댓가로 다시 일부 영토를 이와키 가문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요시키요는 주변의 나카 씨나 오노사키 씨의 내부 갈등에 개입해 그들을 다시금 사타케 가문의 휘하로 복속시키고 간토 아시카가 씨의 내분인 에이쇼의 난이나 무츠 유키씨 내부의 내란에 개입해 잃어버린 영토를 꽤 되찾는다. 또 23개조로 구성된 가문법을 반포하는 등, 그의 치세 하에 사타케 가문은 히타치 북부를 통일하고 선진적인 센고쿠 다이묘로서 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대 당주인 사타케 요시아츠의 시대에 동생인 우루노 요시모토(宇留野義元)[5]가 갑자기 무단으로 요시아츠의 가신인 오오누키 씨의 거성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우루노 가문 및 그에 호응한 여러 가문들이 사타케 가문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를 요시모토가 처음 공격한 부타레 성(部垂城)의 이름을 따 부타레의 난(部垂の乱) 이라고 부른다. 요시아츠는 처음에 히타치 오다 가문과 나카 가문 간의 싸움에 개입하고 있어 이에 적절히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곧 화해했지만 1년만에 다시 싸우게 된다. 그러던 중 1540년 요시아츠가 나스 가문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다 돌아오는 길에 요시모토의 본거지인 부타레 성을 급습, 성을 함락하고 요시모토를 포함한 그의 가신 및 일족을 전부 참살했다. 이 사건은 구지 강(久慈川) 동쪽을 통일하고 강 서쪽으로도 여기저기 손을 뻗고 있던 사타케 가문의 행동에 구지 강 서쪽의 여러 가문들이 반발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이후로는 히타치의 대 다이묘로서 인접한 오다씨, 후호조씨, 다테씨 등과 대립하였으며 오니 요시시게(鬼義重)로 이름을 떨친 사타케 요시시게가 제법 큰 판도를 구축하였다. 특히 그는 히타치에서 사타케 씨에 여러번 대립하던 오다 가문과 나카 가문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마침내 히타치 통일을 달성하였고, 오슈로 진격해 무츠 유키 일족을 공격해 이시카와씨와 이와키씨를 복속시켰다. 그 아들인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라 후호죠씨 정벌에 성공한 것까지는 좋았으나[6] 세키가하라 전투 때 중립을 지킨 것이[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 가문은 보전하였지만 오랫동안 거점이었던 히타치를 잃고 데와로 전봉되었다.

에도시대에는 토자마다이묘(外様大名)로서 쭉 존속하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 종가가 후작위에 서임되면서 화족이 되었다. 현 당주인 36대 당주 사타케 타카시(佐竹孝)는 본래 마츠다이라(松平) 가의 일족인 오규(大給)씨인데 사타케 요시시게의 먼 여계 후손이 되는지라 의붓아들로서 대를 이었다.

4. 관련 씨족

5. 동성

5.1. 실존 인물

5.2. 가상 인물

6. 여담

'휴먼버그대학교'라는 유튜브 채널에는 이 이름과 관련된 밈이 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난 당사자의 이름이 사타케 히로후미, 통칭 '사타케'인 경우가 많아서 밈이 된 것이다.

7. 외부 링크



[1] 가문 대대로 이름에 쓰는 글자[2] 오슈 후지와라 가문과 사타케씨가 동맹이었기 때문이다.[3] 막부에서 한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관[4] 정확히는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문-간토 아시카가 가문이 싸운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禅秀の乱) 당시 사타케 본가와 야마이리 가문을 비롯한 여러 방계들이 다른 편을 들었던 것에서 촉발되었다. 사타케 요시히토는 간토 아시카가의 편을, 야마이리 가문을 비롯해 이나키 가문, 나가쿠라 가문은 우에스기의 편을 들었다.[5] 우루노 가문은 사타케 가문의 방계이다.[6] 다만 영지 분봉 당시 히타치국 일부 영토가 유키 가문에 넘어간 것이 옥의 티였다.[7] 정확히는 가신들이 동군에 가담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요시노부는 서군에 가담하고자 한 것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제대로 가담하지 못했다.[8] 한국에서 '사타케'라는 성씨를 유명하게 만든 그 사람 맞다. 그 밖에도 사타케 히로시, 사타케 히로미, 사타케 히로나리 등 여러 단역들 중에 성씨가 '사타케'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