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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04:13:16

샤바르시 카라페트얀

파일:762321.jpg
이름 샤바르시 블라디미로비치 카라페트얀
Шаварш Владимирович Карапетян[1]
Շավարշ Կարապետյան[2]
Shavarsh Vladimirovich Karapetyan
국적 소련파일:소련 국기.svg(1953~1991)
러시아파일:러시아 국기.svg(1992~)
출생 1953년 5월 19일
소련 아르메니아 SSR 키로바칸
종목 수영
주종목 핀수영
1. 개요2. 생애
2.1. 선수 시절2.2. 현실의 슈퍼맨
2.2.1. 통제 불능의 버스를 멈춰세우다2.2.2. 호수에 빠진 버스로부터 승객들을 구하다2.2.3.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다
2.3. 이후
3. 기타

1. 개요

소련의 전직 수영 선수이다. 1970년부터 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세계 신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며 위대한 수영선수가 될 재능을 갖췄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수 생명이 끝장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비록 수영 선수로서의 삶은 일찍 마감해야 했지만, 그는 오늘날까지 만인의 귀감으로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선수 시절

파일:shavarsh-karapetyan-real-life-hero-champion-swimmer2.jpg
1953년 5월 19일 아르메니아 키로바칸에서 태어나 가족 모두 1964년 예레반으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8년간 학교를 다니다가 수영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수영선수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5살 때 카라페트얀은 훌리건들과의 싸움에 휘말렸다. 이 폭력배들은 그를 때려눕히고 목에다 무거운 돌을 매단 뒤 호수에 내던져 버렸다! 이때 그는 물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가까스로 호수에서 기어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수영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훗날 그는 인터뷰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만약 그 돌이 더 무거웠다면, 나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그는 기술학교에서 수영 기술을 익히다가 1970년 핀수영[3]선수로 데뷔해 본격적으로 선수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핀수영 선수로서 엄청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데뷔한 지 불과 6달만에, 그는 소련 핀수영계 최고 선수로 등극했고 12개월 만에 소련 선수권에서 우승하였으며 그로부터 2개월 후에는 유럽 선수권에서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했다. 이후 13번의 유럽 선수권 우승과 7번의 소련 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핀수영 선수로 우뚝섰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끔찍한 사고도 경험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핀수영 대회에 참가한 카라페트얀은 경기 도중 산소 탱크 뚜껑이 열려버리는 바람에 산소가 다 빠져 나가 버리는 악재로 숨을 못 쉴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을 참아가며 75m나 더 수영해 완주에 성공했다. 그는 그 직후 의식을 잃어버려 병원에 입원했고 병원에서 자신이 1등으로 도착해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듯 대단한 실력에 인내력까지 겸비한 그였지만 정작 그가 전세계의 추앙을 받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2.2. 현실의 슈퍼맨

2.2.1. 통제 불능의 버스를 멈춰세우다

1974년 1월 8일 수영장에 가기 위해 아침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버스가 산길을 타고 올라가던 중 엔진이 오작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운전사는 엔진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카라페트얀을 비롯한 30명의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주해 버렸고 운전사가 사라진 버스는 경사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긴급한 상황에서 마침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던 카라페트얀이 재빨리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조정해 통제 불능 상태이던 버스를 멈추는 데 성공해 승객 30명을 구원했다. 그 후 기자들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운전석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었을 뿐입니다.

2.2.2. 호수에 빠진 버스로부터 승객들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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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르시가 23살이던 1976년 9월 16일 아침, 그의 형제이자 역시 핀수영 선수였던 카모와 함께 예레반 호수 주위를 따라 달리는 훈련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20km를 달리며 훈련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두 사람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트롤리버스가 예레반 호수 주위를 지나가던 도중에 갑자기 경로를 이탈해 호수로 추락한 것이다! 멀쩡한 버스가 난데없이 호수로 추락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조된 몇몇 승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승객이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내려달라고 요구했는데 버스기사가 "난 택시기사가 아니다."며 거부하자 실랑이를 벌인 끝에 버스기사를 폭행했고, 그 바람에 버스가 경로를 이탈하고 말았다고 한다. 두 형제가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버스는 이미 10m 정도 가라앉고 있었고 92명에 달하는 승객들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었다.

당시 예레반 호수의 수온은 매우 낮았고 근처의 공장들이 흘려보낸 폐수로 인해 매우 오염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호수에 뛰어들어 호수에 가라앉고 있는 버스를 찾아내 발로 창문을 부수고 승격들을 수면 위로 구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30여 차례나 버스와 육지를 왕복했고 동생 카모는 육지에서 형이 구해낸 승객들에게 응급조치를 취했다. 카라페트얀은 30여번에 걸친 구조 작업의 말미에 이르러 완전히 탈진 상태에 가까워져 그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번은 너무 지친 나머지 가죽의자를 가지고 오고 말았다.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가죽의자를 사람으로 착각해 버렸던 것이다. 훗날,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나만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수해버리는 걸 두려워했다. 물속은 너무 어두워서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잠수 도중에, 나는 우연히 승객 대신에 의자를 움켜잡아버려 또 한명의 승객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의자는 여전히 악몽이 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의 구조는 헛되지 않아 승객 92명 중 30명이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구조를 마치고 육지로 기어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의 온 몸에 수많은 유리파편들이 박혀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차가운 물에 무방비로 오랜 시간 노출되었고 폐수를 들이마셔버려 양쪽 폐가 모두 폐렴에 걸려버렸으며 패혈증에 시달렸다. 그는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46일간 입원해야 했다. 이후 그는 폐가 망가졌기 때문에 선수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은퇴하고 작은 신발회사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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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이 영웅적인 구조는 2년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사고 현장에 투입된 구조대원들은 소지한 공기 탱크들이 죄다 비어 있어서 물 속에 뛰어들지 못하고 단지 카라페트얀이 30번이나 왕복하며 사람들을 구하는 걸 육지에서 도와주는 것에 그쳤다. 이 추문이 세상에 알려지면 여론의 질타는 물론이고 중앙의 엄중한 처벌이 두려웠던 예레반 지방 정부는 당국 구조대원들이 승객 30명을 구조한 것으로 왜곡하고 사건을 덮어버렸다. 그러다가 1978년 10월 12일,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유명 언론사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에 진상을 폭로하면서, 카라페트얀은 비로소 영웅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는 7만 5천 통이 넘는 감사 및 격려 편지를 받았고 무수한 명예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UNESCO는 그의 영웅적인 구조활동을 기리기 위해 '페어 플레이' 상을 수여했고 1978년 소련의 천문학자 니콜라이 체르니크가 발견한 소행성은 그의 이름을 따 '3027 샤바르시'라는 명칭이 붙었다.

2.2.3.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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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15일, 아르메니아의 에데르시의 주요 건물 중 하나인 카렌 데미르찬 복합단지[4]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수십명이 넘는 이들이 화재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어째 사고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는 일이 많은 카라페트얀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건물로 뛰어들어 소방관들과 함께 아직 건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을 구조했다. 이때 그는 독성 연기를 흡입하는 바람에 의식을 잃어버렸고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너무도 심각한 상태라서 다들 그가 사망했다고 생각했지만, 한 택시 기사가 그의 맥박을 짚어보고 약한 맥박이 느껴지자 곧바로 자기 택시에 실어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이후 카라페트얀은 병원에서 몇 달 동안 입원해야 했다.

2.3.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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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내, 두 딸, 아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그는 '두번째 호흡'이라고 명명된 작은 신발 가게를 열었고 얼마 후 모스크바 곳곳에 여러 개의 상점과 카페를 차릴 정도로 부유해졌다. 그는 국적을 러시아로 선택했지만 종종 자신의 고향인 아르메니아와 카라바흐 공화국을 방문하고 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의 성화봉송을 담당해 모스크바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의 두번째 레이스를 돌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러시아아르메니아를 위한 횃불을 들고 있었다.

3. 기타


[1] 러시아어[2] 아르메니아어[3] fin swimming. 핀, 물안경, 스노클을 착용하고 허리의 근육만을 움직여 전진하는 수영 경기다.[4] 소련 시절엔 '소련 스포츠 및 콘서트 복합단지'로 불렸다가 1991년 소련의 패망으로 독립 후에 '아르메니아 복합 단지'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러다가 1999년 카렌 데미르찬 국회의장이 무장집단에게 사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정부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곳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5] 다만 두 번째 버스 사고의 원인을 첫 번째의 원인 중 일부였던 기계결함으로 기재하는 실수가 있었다. 두 번째 사건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진상 승객의 버스기사 폭행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