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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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의종(毅宗) | |
시호 | 소영황제(昭英皇帝) | |
연호 | 연사영국(延嗣寧國, 1049년 천우수성(天祐垂聖, 1050년 ~ 1052년) 복성승도(福聖承道, 1053년 ~ 1056년) 다도(奲都, 1057년 ~ 1062년 9월) 공화(拱化, 1063년 ~ 1067년) | |
능묘 | 안릉(安陵) | |
성씨 | 탕구트어 | 외명(嵬名)[1] |
중국어 | 이(李) | |
휘 | 탕구트어 | 양차(兩岔)[2] |
중국어 | 양조(諒祚) | |
생몰기간 | 1047년 3월 5일 ~ 1068년 1월 (21세) | |
재위기간 | 1048년 ~ 1068년 1월 (20년) |
1. 개요
서하의 제2대 황제.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소영황제(昭英皇帝)였으며, 휘는 탕구트식으로는 외명양조(嵬名諒祚),[3] 중국식으로는 이양조(李諒祚)였다. 서하의 개국 군주인 경종의 아들로, 생모는 선목혜문황후 몰장씨(宣穆惠文皇后 沒藏氏)였다.
2. 생애
2.1. 무소불위의 외척 정치
1048년 1월, 부황인 경종이 이양조의 형인 태자 이가(李哥)의 암살시도에 의해 코를 베이는 일이 발생했다.[4] 경종은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다음날 바로 붕어했으나 태자 이가는 몰장씨 세력의 배신으로, 몰장와방에 의해 어머니인 헌성황후 야리씨와 함께 처형되었고, 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경종의 황자였던 막내 이양조가 제2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5] 그러나 당시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모친이었던 몰장태후(沒藏太后)와 그녀의 친인척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농단하게 되었다. 한편, 경종의 국상을 틈타 요나라 내에서 서하를 정벌하자는 의견이 개의되었고, 결국 1049년 요나라는 서하를 침공했다. 서하 공격에 앞서 요흥종은 서하의 하정사를 본국에 압류시켰고, 북원추밀부사 소유신을 북송에 파견하여 서하 정벌 소식을 알렸다. 이해 7월 요흥종이 친정을 시작했고, 8월에는 황하를 도하했다. 하지만, 하남으로 진군하는 소혜의 군사가 서하군에게 패배하는 등 처음에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야율적고가 북방 유목민인 조복군을 이끌고, 하란산(賀蘭山)[6] 전투에서 서하군을 격파했다. 이때부터 서하는 요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056년, 실질적인 서하의 1인자가 된 몰장태후는 원래 경종의 시종이었던 보세걸다사(補細乞多巳)[7]와 사통하게 되었는데, 먼저 사통하고 있었던 이수귀(李守貴)[8]에게 원한을 사게 되었다. 결국 몰장태후는 연인인 보세걸다사와 함께 떠돌며 사냥을 하다가 이수귀가 보낸 자객에 의해 함께 죽고 말았다. 이에 태후의 오빠인 몰장와방이 이수귀를 죽였다.[9] 이때 의종은 12세의 나이로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전권은 외숙부인 몰장와방에게 있었기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못했다.
2.2. 개혁드라이브
하지만, 몰장와방과 그의 아들은 두려웠다. 시간이 갈수록 의종은 지식을 겸비하게 되었고, 아는 것도 많아졌다. 결국 1061년, 의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의종은 역으로 몰장와방과 그의 딸인 황후 몰장씨를 죽인 후 양씨(梁氏)를 황후로 삼아 외척 세력을 근절시켰다.[10] 마침내 권력을 되찾은 의종은 적극적인 개혁의 일선에 나섰다. 먼저 '번례'(탕구트의 전통의례)를 폐하고, '한의'(漢儀)로 바꾸었으며, 각 부에 상서, 시랑 등 조직적인 관직을 두어 중앙집권적인 행정을 체계화했다. 또한 주•군을 조절하여 지방 통제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개혁은 황제의 권위를 높여 의종 자신이 겪었던 비참한 과거의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화적인 개혁은 의종의 외척이자 한족인 양씨 가문이 제일 반대했는데 이 양씨 가문은 한족이긴 하나 이미 탕구트에 동화되어 있었던 상태로 의종의 대송관계 개선 시도를 번번히 방해하고는 했다.3. 대외 정책
3.1. 요나라와의 관계
하란산 전투 이후 거란과는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했다. 요나라의 태황태후가 사망한 날에 조문 겸 참석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3.2. 북송과의 관계
1044년에 경종이 송인종과 경력의 화의를 맺었지만 의종은 북송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약탈하고 노략질했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요나라가 북송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여 호전성이 줄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66년, 북송과의 전투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상처가 깊어 다음해 그 후유증으로 인해 붕어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향년 22세.[1] 영령(寧令)씨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영령은 성씨가 아니라 서하에서 제후왕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그래서 그의 형인 태자 이가(李哥) 또한 영령가(寧令哥)라 불리기도 했다.[2] 초명은 탕구트식 이름이었다 한다. 상기한 탕구트어 작위 영령과 합쳐져 영령양차(寧令兩岔)로 적히기도 했다.[3] 초명은 양차(兩岔).[4] 경종이 황태자비 몰이씨(没移氏)를 빼앗은 탓에 태자 이가는 부황을 원망했고, 선목혜문황후 몰장씨와 그녀의 오빠인 국상 몰장와방(沒藏訛龐)은 폐서인된 헌성황후 야리씨(憲成皇后 野利氏) 소생의 자식들을 모두 제거한 뒤, 몰장씨의 소생인 이양조를 황태자로 삼고자 했다. 아무튼 경종을 몰아내자는 것에는 뜻이 맞아 몰장씨 세력은 황제를 암살하려던 태자 이가를 후원했다.[5] 참고로 선목혜문황후 몰장씨는 원래 대신 야리우걸(野利遇乞)의 아내로, 경종이 야리우걸을 죽인 뒤 야리우걸의 조카였던 헌성황후 야리씨의 요청으로 황궁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몰장씨는 경종과 사통하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헌성황후는 그녀를 강제로 계단사(戒壇寺)에 출가시켰는데 거기서 그녀는 '몰장대사'(沒藏大師)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경종은 절에 찾아가 여전히 밀회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이양조가 태어나게 되었다.[6] 내몽골자치구와 닝샤후이족자치구의 경계인 하란산맥에 위치해 있다.[7] 보세걸씨에 이름이 다사였다.[8] 원래 야리우걸 휘하의 출납관(出納官)이었다.[9] 이에 대해서는 몰장와방이, 사냥을 하며 떠돌던 몰장태후와 보세걸다사에게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한 전령이란 명목으로 이수귀를 보냈다가 세 사람이 모이자 자객을 보내 한꺼번에 죽여버렸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10] 외척 세력을 근절한다는 의지는 좋았으나, 새로 맞이한 공숙장헌황후 양씨(恭肅章憲皇后 梁氏)도 의종이 붕어하고, 아들인 혜종과 손자인 숭종이 제위를 이어 통치할 때, 몰장씨와 마찬가지로 국정을 농단하고, 자신의 친가인 양씨와 함께 무식하게 권력을 휘둘렀다. 여담으로 공숙장헌황후는 원래 몰장와방의 며느리였는데 황후가 되기 위해 몰장씨 가문을 배신하고, 의종이 몰장씨를 척살하는데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