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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00:41:09

강화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넘어옴

☧ 대한민국의 성공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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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드체는 주교좌성당이다.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424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大韓聖公會 江華聖堂
Sts. Peter & Paul's Anglican Church\, Gang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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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개신교 / 교회
면적 6\,968㎡
지정연도 2001년 1월 4일
제작시기 대한제국
위치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성 베드로와 바우로 성당
江華聖堂 | 강화성당
Sts. Peter & Paul's Church, Ganghwa
종교 성공회
소속 서울교구
강화교무구
지위 본당 (Church)
주보성인 성 베드로성 바우로
교구장 김장환 엘리야 주교
사목단 관할 이대성 가브리엘 신부
건축정보 축성 1900년 11월 15일
건축자 경복궁 도편수[1]
양식 한옥양식, 바실리카 양식
위치

강화성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관청리)
파일:attachment/GSouter01.jpg
파일:attachment/GSouter.jpg
파일:강화성당 앞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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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구조와 내부4. 여담

1.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성공회 성당. 1900년에 지어진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로서 바실리카와 한옥이 절충된 양식이며, 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1890년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찰스 존 코프 주교를 비롯한 성공회 신부들이 1893년 강화도 갑곶 나루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1897년 조선의 해군사관학교격인 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 윌리엄 헨리 콜웰(William Henry Callwell) 대위로부터 땅 3천 평가량을 매입하여 선교본부를 강화성내로 이전하였다.

1900년 11월 15일 찰스 존 코프 주교에 의해 '성 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축성되었다.

3. 구조와 내부

외양은 한옥의 형태를 하였으나, 구조와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른다. 바실리카 성당을 한옥 재료로 만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 그리스도교 토착화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

건물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고려하여 목재는 수령 백년 이상의 백두산 정송을 마크 트롤로프 신부[2]가 직접 신의주에서 구하여 뗏목으로 운반하여 왔고, 석재와 기와는 강화도 내에서 구하였다. 도목수는 경복궁 중수에 참여했던 도편수였고, 중국인 석공과 강화 지역의 교우들이 참여하여 1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그 당시로는 최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기와 지붕에 십자가를 올린 모양새나, 한자 현판 등이 이국적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묘한 분위기라 관광지로 많이 찾는 모양. 4칸x10칸 건물로 전통 건물의 개념에서 본다면 상당히 큰 편이다. 반면 면적에 비하면 그리 높지는 않다.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유산
704호 705호 706호
태안 동문리 근대한옥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문경 가은양조장
파일:강화성당 세례대1.jpg
강화성당 내부 세례대

사진 중앙에 보이는 석재 구조물이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는 세례대[3]이다. 사진에는 오른쪽부터 修己[4]/洗心[5]/去惡[6]/作善[7]이라고 한자로 새겨 교인들의 마음을 다잡게 한다.

이와 유사한 바실리카-한옥 건축물로는 같은 지역의 온수리성당, 충청북도 청주시에 위치한 수동성당 등이 있다. 특히 수동성당은 찾아가기가 까다롭긴 해도[8] 외벽 등이 깔끔하게 단장되어 꽤 예쁘다.

4. 여담


[1] 설계도도 없이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2] 후에 조선교구장이 된다.[3] 아래는 이전에 있던 희미한 사진의 파일이다.
파일:attachment/GSinner.jpg
[4] 수기. 몸을 바르게 하고[5] 세심. 마음을 깨끗이 하고[6] 거악. 악을 제하고[7] 작선. 선을 행하자.[8] 교동로47번길 33, 순위치는 청주의 번화가인 성안길에서 그리 멀지 않다. 다만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작정하지 않고 찾아가기는 좀 거시기하다.[9] 당시 일제는 성당의 종을 뜯어가는 것도 모자라서 성당 정문 앞 계단의 난간까지 뜯어갔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천주교는 서울 명동성당의 제대 앞 철제 영성체 난간이 통째로 뜯겨나간 바 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일본성공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강화성당 축성 110주년을 맞은 2010년에 원형대로 난간을 복원해줬다.[10] 우리나라에서는 범종을 치는 소리가 더 은은하게 멀리 퍼지도록 범종 밑으로 움푹 패인 공간을 만들거나 항아리를 묻는데, 이를 명동(鳴洞)이라 부른다. 일본이나 중국에 없는 우리나라식 방법이다.[11] 당시 유생(儒生)들 사이에서는 성리학(주자학)만을 바른 학문으로 여기고 양명학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성리학 내에서도 서로 편을 갈러 싸우기에 바빴으니, 아예 결이 다른 유학이었던 양명학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12] 양명학의 거두이자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은 양명학의 양지(良知)라는 개념을 기독교의 '성령'과 비교하려는 시도를 했었다. 결국 박은식의 양지론은 양명학의 기반 하에서 기독교의 '성령'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을 가진 신으로의 개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13] 후에 본 성당의 관할사제를 잠시 맡았다.[14] 강화도 인구 중 35% 가량이 감리회 교인으로 강화도 내 최대 종교이다. 감리회와 성공회는 같은 개신교이고, 감리회 자체가 성공회에서 파생된 교회인데도 본토와는 달리 강화도에서는 의외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근본주의 극우성향의 몇몇 목사들은 설교 시간에 가톨릭은 물론이고 성공회WCC성향의 교회들까지 디스하기도 한다(...)[15]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찬반 여부를 접어두고라도, 방화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