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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2-20 23:14:26

성묘보전세초록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

1. 개요

成廟寶典洗草錄. 조선 전기 연산군 5년(1499) 홍문관 대제학 홍귀달(洪貴達)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을 끝낸 후 편찬에 사용한 사초(史草)들을 세초하여 없애는 작업 과정을 모두 기록하여 남긴 한국 최초의 세초록.

2. 내용

1974년에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黃山面) 부곡리(富谷里)에 주재한 조선 전기 실록편찬관 우참찬 윤효손(尹孝孫)의 17세손 윤병진(尹炳珍)의 문중에서 발견된 세초 기록으로, 연산군 5년(1499) 홍귀달이 3월 14일 자하문(紫霞門) 밖 차일암(遮日岩)에서 세초 작업을 하고 조정에서 보낸 내관, 승지와 함께 세초식을 행한 과정을 일기체 형식으로 자세히 남겼다.

총 3권이다. 1권은 성종실록 편찬 후의 세초작업과 세초연 과정을 자세히 적고, 과거부터 우리나라에서 행한 세초의 유래와 그 내용을 밝혔다. 나머지 2권에는 성종실록 편찬과 세초 작업에 참석한 영의정 신승선(愼承善) 등 93명의 관직과 성명, 기타 자세한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기존에는 영조 3년(1727) 실록청당상관(實錄廳堂上官) 윤순(尹淳)이 남긴 '조선 전기에는 세초를 하지 않았고, 광해군선조실록을 편찬한 뒤 처음으로 세초를 했다.'는 말과 기타 조선 후기의 여러 기록들을 토대로, 연산군이 1498년 무오사화를 일으킨 후 중종반정으로 내쫓기고 긴 시간이 흐른 뒤, 연산군 같은 폭군 때문에 사초를 빌미로 다시 사화가 일어날까 염려하여 대국적인 결단으로 세초를 시작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성묘보전세초록에 기록된 글에는 성종 훨씬 이전부터 자연스럽게 계속 행해져왔던 전통의식이라고 설명하여, 기존의 얘기들은 연산군 탓을 하기 위한 사림파들의 거짓말로 드러나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3.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