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원본인 실존인물이었던 영수고륜공주의 노년기 사진.
1. 개요
직위: 청나라 공주 → 조선의 중전 → 대한제국의 황후.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 이형과 정략혼을 한 공친왕의 딸. 이형보다 1살 연하로 첫 등장 당시 나이는 12살이다. 아직 너무 어려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제법 예쁘장하다고.
실제 역사와 대입해보면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한국사 전체 역사상으로는 고려의 노국대장공주 이후로 약 500여 년만에 등장한 외국인 황후이다.
실존하는 인물인데, 실제 역사에선 영수고륜공주(固倫榮壽公主)다.
2. 행적
제1차 조청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에서 이형의 요청에 따라 조선으로 시집을 가게된다. 철없는 아이로 보였지만 의외로 위태로운 아버지의 구명을 이형에게 청하는 등 대강으로나마 정세를 보는 능력이 있다. 이형과는 딱히 사랑은 없지만(너무 어리기도 하고) 서로서로 어느 정도 호의적인 감정은 있다.[1] 영특하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순진한 공주님인지라 주인공의 귀신 들렸단 말에 정말인 줄 알고 호들갑을 떨기도.또 이형과 대원군이 서로에게 일을 떠넘기며 다투는 것을 보고 부자지간이 정말 화목하다며 감동해서[2] 주변 사람들이 어이없어하기도 하는데[3], 왕실에서 서로 틱틱거리기만 하고 상주문 결재 업무를 서로 떠넘기는 정도는 허구한 날 골육상쟁이 벌어지던 청나라 황실에서 자란 사람 눈에는 화목하게 보일 것이다.[4]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형을 깔고 앉는 듯한 묘사가 나오는데 바로 술판에 끼려던 이형에게 방긋 웃으면서 그쯤 하라고 하자 이형이 순순히 자리 접고 가는 놀라운 광경이 연출된다.[5]
결국 참다 참다 못했는지 범아시아 조약기구 창설 이후 자신의 구상을 설명해주는 이형에게 다과상을 물리고 술상을 들여왔는데 안주란 안주가 모조리 체력과 정력에 좋은 안주에 술 역시 복분자주를 택해서 상을 들였다. 술을 따르는 소리에 이형이 "분명 난 술을 좋아하지만 왜 이렇게 섬뜩하게 들리지?" 라고 생각했을 정도이며, 그로부터 한 달 뒤, 황후에게서 태기가 보였다. 이 시점 기준 이형의 나이 만 18세(고3 ~ 대학 입학생), 소양공주 만 17세(고2 ~ 고3)즈음인데 시대적 배경과 계층(황족)을 생각하면 절대 빠른 편은 아니다. 첫째로선 도리어 조금 늦는 시점. 대한제국/황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역사의 고종 역시 첫째를 1871년에 보았고, 장폐색에 걸려서 항문이 막혀 사흘 만에 사망했다는 점이 불안요소였으나 아내가 달라서인지 정상적으로 태어나 문제가 없다. 설령 문제가 있어도 이 소설의 이형이라면 얼마든지 수술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것이다.
이후 시어머니인 부대부인 민 씨가 신부들과 미사를 올린 것처럼 자신도 불교 신자로서[6] 승려들과 법회를 열었다가 유림으로부터 큰 항의를 받는다. 그러나 이형은 잊고 있었다며 간단히 종교의 자유를 공인하였고, 소양공주는 자신 때문에 이형이 유림들과 또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죄송스러워했지만 결국 유림과 불교계가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만 유림과 불교계의 근대화 참여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불교계는 이형이 하는 일에 영합하는 방향이었다면 유림은 이형의 도발에 휘말린 맞불작전 정도. 세계대전이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순산하고 이를 계기로 이형의 정신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대전에 친정을 나서겠다는 이형에게 일말의 서운한 감정을 갖지만, 황태자의 치세를 위해 어쩔 수 없다며 허락을 구하는 그의 모습[7]에 어느 정도 공감했는지 절을 올리고는 술과 약 중 한가지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이형은 이를 충실하게 지켜서 전장에서 고량주만 빨았다.
이후 조선에서 민족주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종전 협상을 위해 돌아올 이형을 마중 나가는 박규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전해달라고 전했다.
황상께, 이 아이(황자)가 얼마 전 처음으로 말을 했는데, 만주말과 조선말 중 어느 쪽으로 마마라 했는지 여쭤보세요.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민족주의의 광풍 속에서 조선이 다민족사회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을 박규수에게 들은 이형은 서둘러 한성으로 돌아가야 했다.[8] 그리고 이형이 소양공주에게 (어머니와 자주 있어서) 아이가 만주어를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이를 부정하면서 씩 웃었다.[9]
그 후 모여든 민중의 환호 속에 이형과 함께 미국에서 모건이 선물로 보내준 마차를 타고 가지만 "황실의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양껏 치장하기만 해서 천박하다."라는 촌평을 내리고는[10] 중국에서 장인들을 불러다가 여러모로 내부 장식을 고치려는 허락을 받는다. 이형은 그런 쪽에 까막눈이었고 본인도 마차가 너무 화려한 게 불편해서 흔쾌히 허락하였는데, 작중 서술을 보면 오는 내내 마차 내부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구석구석 살펴보는 등 아예 다 뜯어고치려고 벼르는 듯하다. 그리고 카네기의 조언에 따라 경마를 도입하려는 이형의 말에 "태자가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라며 궁녀들을 시켜 태자를 내보낸 뒤, "이러다간 아편굴도 (국영으로) 열 거냐?" 라는 투로 그를 타박하면서도 경마 사업에 대한 이형의 뜻을 존중하며 경마를 통해 조련될 군마를 운용할 인적 자원의 육성과 더불어 백성들이 경마에 빠지지 않게 하고 위험한 석전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오락거리로서 택견을 국기로 채택하고 대회 등을 열어보자고 제안한다. 그 후 검계 등의 폭력배를 우려하는 이형에게 한 방 먹지만, 조선에서 이미 검계에 대해 대대적으로 작정하고 잡은지 한참 지난 상태라서 큰 걱정은 없기에 그녀의 제안이 수용된다. 이 과정에서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는 안도감에 마음이 풀어진 이형과 격렬한 밤을 보낸다.
그리고, 이 격렬한 밤의 결과로
이후, 태자의 교육을 담당할 태자태사(太子太師)로 누가 좋을지 물어보고는 이 문제에 대해 이제서야 생각하는 티를 내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교육부 차관보로 재직 중인 김홍집을 꺼낸다. 이에 아차 싶었던 이형은 그때서야 학교 설립 이야기가 내각 총리대신인 박규수에게서 김홍집을 추천받고는 그의 태자태사 임명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려는 설계(?)였다는 걸 알고 크게 웃는다. 어차피 이형 또한 전직 21세기 사학도로서 김홍집이 유능한 인물인데다 1873년 기준으로 이제 이립을 넘긴 지 1년밖에 안 된 젊은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처음부터 김홍집을 얘기했다면 당연히 찬성했겠지만, 이런 남편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대한제국과 척을 질 수 있는 영국에 우호적인 그를 추천하는 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단오 무술대회 때 이하응을 눈여겨보다가, 황상과 태자를 위해서라면 이하응[12]을 암살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차피 청 황실에서 친족 간의 암투는 기본으로 겪은 그녀다 보니, 시아버지의 암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듯. 무엇보다 천명이라는 멍에와 저주에, 만주라는 전철에, 더 이상 자신의 자손들이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태자가 철이 들기 전에 이하응을 끝장낼 각오도 하고 있다고. 제국의 앞날을 생각하는 황후로서의 면모에다가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로서의 각오가 더해진 만큼,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큰 편이다.
그 해 겨울에 둘째 아들 이강을 낳는다. 초산 때 수 시간 소요되었던 난산인 것에 반해 1시간 여의 짧은 진통 만에 이강을 낳았지만, 이틀 동안 앓아야 했다. 그러다 이강이 홍역을 앓은 것을 계기로 남편이 몸이 약한 차남의 상태가 걱정되어 비밀리에 세 사람만[13] 있는 자리에서 '비오'라는 세례명을 받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한테 말 한 마디 없이 그런 것에 내심 서운해 하지만 이형이 종교에 의존할 정도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느낀 바가 있어서 별 말은 안 하고, 그저 차남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불공을 많이 올리는 걸로 대신한다.
후에, 흥친왕 이희가 흥선군의 축재에 화가 나서 보낸 국서를 받은 이형이 토마스 공사를 통해 사정을 알아내고 황후에게 상의하자[14], 황후는 알아서 하겠다며 이형에게 전담권한을 얻어내서 이하응의 부정을 황실과 최대한 분리시키기 위한 뒷공작을 추진한다. 최익현이 움직이지 않자 그가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민심을 자연스럽게 흔들기 시작했던 것.[15]
남편이 미국 대선에 개입하고자 미국에 친히 방문하려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대만에 있는 시아버지를 보내기로 결정하자 아쉬워하는데, 이는 보름 후에 이하응을 독살하려 했기 때문! 물론 본인도 이하응을 미국으로 보낼 생각이 있기에 이형의 결정을 동의한다.
3. 기타
이형에게 선천적으로 부족한 내치계열을 보충해주는 아내. 캐릭터 자체는 직접 전면에 나서는 일 없이 오직 남편의 내조에만 힘쓰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 캐릭터이지만 지나치게 술판을 키우려는 이형을 말 한마디로 진정시킨다던가 후사를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는 등 마냥 얌전하고 조용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그리고 작품 특성상 자주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알고보면 매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녀가 조선의 황후로 들어온 이후부터 이제까지 조선 황실 내부에서 특별히 큰 일이 터졌다는 묘사가 전혀 없다. 즉, 조선 황실의 안주인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맡고 있다는 것. 비록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온갖 고등교육을 받아온 공주이고, 황실 내부 암투로는 조선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살벌한 청나라 출신이며, 황제의 총애를 두고 경쟁할 비빈들이 없다는 걸 감안해도 고작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실상 혈혈단신[16]으로 외국에 시집와서 몇년만에 황실 내부를 제대로 휘어잡았고 한 나라의 국모라는 막중한 역할 역시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17]. 이를 잘 알 수 있는 일화로 후사 만들기 작전(?) 당시 그녀가 내관에게 직접 명령해서 이형이 따로 숨겨놓은 술을 치우는 장면이 있는데, 아무리 황후의 명령이라고 해도 황제가 직접 준비한 물건을 일개 내관이 멋대로 치워버린다는 건 그만큼 황후의 권위가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는 남편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
게다가, J.P 모건이 선물한, 호화로운 마차에 대한 지적에서 드러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청 황실의 사람으로서 온갖 고등교육을 받고 호화로움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란 덕분인지 격조 있는 화려함에 대한 안목을 갖췄다. 이는 이형의 취약한 부분 중 하나인데, 때문에 청을 뛰어넘는 열강이 된 대한제국 황실의 문화를 정비하는 건 그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할 듯하다.
이 밖에도 국고 충당 겸 기병 육성을 겸하여 경마를 도입하려는 이형에게 흥이 많은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 경마에만 빠지지 않게 관심을 분산할 놀이문화를 만들면서도 경마를 통해 생산될 우수한 말에 어울릴 병력 육성을 동시에 해결할 방책으로 석전 금지령과 택견의 국기 채택을 제안[18]하는 등 문화면에서는 이형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
이형 스스로 독백하기를 소양공주가 어느 정도 국책에 사심을 끼워넣은 무리한 부탁을 해도 웬만해서는 다 들어줄 거라고 한다. 그러나 소양의 행적은 문화교육면에 치중되었고, 그녀 본인은 좋은 의미로도 현모양처에 가까운 인물이라 아무런 문제도 없다.[19]
그런 그녀답게 자녀들의 교육에도 크게 신경을 쓰고 있는데, 경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태자를 밖으로 내보내고 내각 총리대신인 박규수에게 김홍집을 태자태사로 추천받는 걸 보면 아무리 황후일지언정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학부모 같은 면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으로 불교를 우대하던 청나라 출신답게 불교도다. 조계종과는 종파가 다른 티베트 불교지만 거의 대승불교적인 면을 공유하고 있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청나라 황실이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고 달라이 라마를 황제의 스승으로 모셨던 건 칭기즈칸 이래로 만주와 몽골의 귀족들부터 일반 계층에 이르기까지 티베트 불교를 믿는 게 생활문화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종교의 권위를 빌어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립하고 황실의 친위대이자 무력기반인 만주+몽골 팔기군을 통제하에 두려 한 게 청의 애신각라 황실이었다.
특히나 청나라의 불교 우대는 절대로 신라나 고려의 그것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신라나 고려는 그저 국가적으로 밀어주는 종교일 뿐 역대 왕들이 반드시 불교를 밀어줘야 하는 이유는 없는 만큼 고려같은 경우 성종은 상대적으로 불교를 억제했다.[20]
하지만 청나라는 '키메라의 제국'이라 불릴 만큼 황제에게 별별 성격이 다른 지위가 여기저기 얽혀 있었고 개중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 자리도 있었다.[21] 아예 지위 자체가 티베트 불교 수호자이니 그런 나라에서 온 왕족이라면 당연히 티베트 불교에 우호적이면 우호적이지, 적대적일 리가 없다. 그렇다 보니 그녀도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덕분에 그동안 마땅한 비호세력 하나 없던 조선 불교계의 새로운 버팀목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22] 당연히 소양공주도 불교계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거기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이형은 덤) 자연스레 조선 불교계는 친황실파의 성격을 띄게 되어 적극적으로 국가 사업들에 협조하게 된다.
게다가, (냉정하기는 해도) 궁중암투에 어울리지 않는 성격인 이형과는 다르게 청 황실의 사람으로서 궁중암투에 해박한 걸로는 이하응 못지 않은 그녀인 만큼, 대한제국 황실의 안위를 위해 (혈통 상) 시아버지[23]인 이하응을 경계 중이다. 실제로 이하응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최익현을 통해 전국 유림에 퍼트리려던 박규수가 자신의 강직함을 이용해 먹으려는 심보에 화가 난 최익현이 침묵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자, 자연스럽게 소문이 퍼지게 해서 최익현이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기도 하는 등, 암투를 꾸미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들인 이원철에게 이형이 시키기 전까지 일부러 만주어를 가르치지 않고, 조선어만 가르치는 것처럼 스스로 황후의 지위에 맞게 처신을 조심하면서도 청나라를 누른 제국의 황후의 자리에 충실하면서도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청나라보다 대한제국의 황후로서의 자각이 더욱 강해서 만주족들을 안심시키는 상징으로서의 위치도 필요했고, 만주의 칸이기도 한 이형이 만주어도 아들이 배우는 것을 권장했다. 특히 황실무용론이 나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의 통합의 상징으로 황실이 존재하게 해서, 황실을 폐지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한 수이기도 했다.
소설 연재 당시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청나라 복식을 입은 굉장한 미모의 여성 사진이 소양공주의 원본 인물인 영수고륜공주의 어릴적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졌고 주인공 이형이 부럽다는 등의 반응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 인물은 완안입동기(왕민동)라는 전혀 다른 인물이며 살았던 시기도 다르고 청나라 공주도 아니다.#
[1] 러시아와의 결투 전쟁에서 이형이 무릎 부상으로 지팡이를 달고 살게 되자 눈물까지 글썽이며 걱정했다.[2] 겉으로는 덕담을 나누며 파안대소하는 모습일 뿐이니.[3] 주변 사람들이야 그 동안 부자지간의 대화를 아니까.[4] 당장 강희제의 말년과 옹정제 즉위 이후의 모습들을 다룬 보보경심과 옹정황제의 여인 등의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친형제고, 부모자식이고 나발이고 권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 청나라, 아니 중국 역사 황실의 현실이다. 실제로 중원을 발아래에 둔 이후 이형과 대원군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전 청나라에서 그렇듯) 천명을 차지함은 저주와도 같다며 한탄하기도 했다.[5] 근데 그전 묘사를 보면 한 술 한다는 초원의 유목 족장들도 발라버릴 정도로 술판을 벌렸고, 또 외국 공사들과도 술판을 벌이려 했다. 자칫 황실의 위엄도가 떨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안 말리는 게 이상하다. 그걸 아니까 이형도 멈춘 것이다. 거기다 이미 과음에 모르핀 투여 등으로 자연 회복력이 약화되기도 했고 술, 담배 제어장치인 허계가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난 마당에 아내로서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못 했다.[6] 원 역사에서도 청 황족인 아이신기오로는 달라이 라마의 첫째 제자라는 형식으로 티베트와 화친을 맺고 있었기에 청 황실 여인들의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다. 다만 본작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대한제국까지 들어오진 못했는지 조계종 승려들을 불러다 법회를 열었다(원각사와 지눌국사의 예에서 보듯 조계종은 조선왕조 시대 내명부 궁궐 여인들의 원찰 역할을 했다.)[7] 총동원된 병력이 50만에 달하며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양적, 질적 발전을 이끌어가야 할 청년층 대부분이 동원됐음을 뜻했다. 따라서 전쟁을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지어야 대한제국의 미래도 어느 정도 보장됐기 때문에 제국의 황제이자 아버지로서 황태자에게 전쟁이 없는 세상을 물려주겠다고 다짐한 그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애당초 이 당시 시대상을 읽고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의 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그밖에 없던 것도 있었고.[8] 사실 다민족사회 어쩌고 하기 전의 문제로, '아이가 어머니만 봐서(만주어), 아버지에 대해(조선어) 제대로 기억 못한다.'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9] 만주족이긴 했지만, 소양공주는 본래 아들 이원철에게 조선어를 위주로 가르쳤고, 만주어를 스스로 자제했었다. 아무래도 외국인 출신 황후다보니, 스스로 눈치를 봐서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이지만 이후 이원철이 어머니의 언어인 만주어를 배우고 싶어하자 만주의 칸 지위에 맞게 만주족과 통합 상징을 중요시하는 이형이 만주어도 배우는 걸 허락했다.[10] 작중 서술이기도 하고 역사적인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청이라는 거대 제국을 통치하던 황실의 공주로서 화려한 생활을 누려왔기에 격조 있는 화려함에 대한 안목이 자연스럽게 키워진 듯하다.[11] 현대시대로 치면 서울대학교 가정관리과 정도일 듯.[12] 영국과 접촉해서 동치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상태였다. 이걸 이용해서 번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흉계를 꾸미는 중.[13] 이형과 전봉준 그리고 베르뇌 대주교.[14] 원래는 박규수에게 상의해야 했으나, 황실의 일이기 때문에 먼저 황후에게 알린 것[15] 먼저 사교회를 흉내내어 한양에 있는 모든 공사를 불러모았으며, 술 마실 건수가 생긴 이형이 기꺼워하며 마구 돌아다니며 시선을 모으는 사이 구석에서 토마스 공사를 어떤 외교관이 봐도 은밀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도록 접견, 일부러 소문을 퍼트릴 대만인 선원으로 가득 찬 소금 수입선을 수배했고, 습기에 약한 소금을 옮기려면 자연스럽게 긴장하면서 하선할 수밖에 없는지라 대만인 인부들에게 스트레스를 잔뜩 유발시킨 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인천 항구 인근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게 했으며, 당연히 선원들은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겸해 선원 특유의 허풍으로 (저도 모르게)소문을 퍼트렸다. 게다가 실제 대만인 선원들의 실 체험담들이라 더욱 생생하며 자극적인 소문인건 덤. 이것만이었으면 인천에서만 소문이 돌았을텐데, 1874년 1월 1일. 신정을 기념하여 황실 예산으로 대량의 술을 구입해서 한양과 경기권 전역에 술을 퍼트리게 되며, 자연스럽게 술안주로 인천에서만 돌던 소문이 경기권 전역에 퍼졌고, 결국 최익현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몰고 갔다.[16] 외국으로 시집을 왔으니 외척이 존재할 리 없고, 가장 강력한 우군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공친왕 역시 조선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공친왕은 자신의 남편인 이형(의 대한제국)과 다른 열강의 힘에 의지하여 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그녀가 외부의 도움을 받았을 확률은 거의 없다.[17] 거기다 수렴청정 초반에 김좌근에 도발에 맞선 이형의 파천황적인 행보에 충격을 받은 조대비가 리타이어한 뒤 조용히 살다 가게 되자 그녀는 왕실 최고 어른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다.[18] 다른 나라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본다면 잉글랜드에서 강요에 가깝게 요먼들에게 활쏘기 장려 정책을 시행하여 대규모의 장궁병 부대를 육성한 게 있다.[19] 단적 예로 이하응, 박규수와 비교해도 범아시아 조약의 목적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지만 그저 시큰둥했다.[20] 다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다. 당연히 성종도 불교를 옹호해줬지만 그럼에도 성종이 불교를 억제했다 볼 수 있는건 불교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했기 때문이다.(이후 둘 다 현종 시기에 부활한다.)[21] 현대로 치면 사우드 왕조가 가지고 있는 두 성지의 수호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22] 조선 역사로 치면 이와 비슷한 사례가 성종 시기에 인수대비가, 명종 시기에 문정왕후가 불교 옹호에 나섰던 것에 가깝다.[23] 고종은 족보상으로는 효명세자의 양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