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소희태[1] |
자 | 태삼(泰三) |
본관 | 진주 소씨[2] |
출생 | 1870년 1월 2일 |
경기도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 (현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 |
사망 | 1948년 3월 5일[3]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8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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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소후옥, 소휘선은 그의 4촌 동생이다.
2. 생애
소휘태는 1870년 1월 2일 경기도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서 아버지 소신술(蘇信述, 1846. 2. 23 ~ 1926. 6. 21)[4]과 어머니 봉화 정씨(奉化 鄭氏, 1846. 9. 3 ~ 1926. 12. 16) 정치행(鄭致行)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경기도 진위현 송장면 이충동(현 평택시 이충동)과 용인현 상동면(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등지에 살았는데, 조부 소수능(蘇洙能, 1818. 1. 20 ~ 1907. 6. 9) 대부터 양성현 원당면 칠곡리로 이주해 와 살기 시작했다.그는 1919년 4월 1일 최은식(崔殷植)·홍창섭(洪昌燮)·이유석(李裕奭) 등이 주동이 되어 전개한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이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 사무소로 행진해 만세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선두로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향했다. 이들이 양성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양성 경찰 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해산하여 돌아가던 양성면민 천여 명과 합세했다.
이리하여 2천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오후 10시경 경찰 주재소 앞에 도착했다. 소휘태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와 숙직실을 불태웠다. 이후 양성 우편소로 가서 그곳의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했고, 일본인 토자 토요테(外里與手)가 경영하는 잡화점과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타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집을 파괴했다. 그 다음엔 양성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의 기물을 파괴하고 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해산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원곡면으로 되돌아온 소휘태는 군중과 함께 원곡면 사무소의 건물을 파괴, 방화했다.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성부로 이주했다가 1948년 3월 5일 그곳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소휘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1990년 7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