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송이출(宋利出) |
자 / 호 | 강숙(康叔) / 은포(隱圃) |
본관 | 야성 송씨[1] |
출생 | 1896년 7월 15일 |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2] | |
사망 | 1969년 11월 27일 |
경상북도 성주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26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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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송수근은 1896년 7월 15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고산리(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송준필과 어머니 성주 여씨(星州 呂氏) 여영주(呂永胄)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919년 경성부에서의 3.1 운동에 이어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적으로 퍼져 우렁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이곳 성주군 유림들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해 4월 2일 성주면 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시위에 주동자로 참가하였는데, 이날의 만세시위는 이기정(李基定)이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봉기상황을 알게 되면서 송홍래·송규선·송회근·송인집 등의 족친들과 더불어 성주군 관내 양반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협의함으로써 본격적인 의거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고 아버지 송준필의 명을 받아 장석영·정재기 등과 연락하여 성주군내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장서 서명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또한 김창숙이 상하이로 건너갈 때 여보회(呂輔會)로부터 군자금을 전달받아 건네주는 등 항일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그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곧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원심 판결이 적용, 대구형무소에 입소하여 미결기간 포함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의열단원 나석주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고, 1927년 신간회 성주지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는 등 독립사상 고취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러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있는 황학산(黃鶴山)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그후 1969년 11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별세하였다.
199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5월 13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