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祝萬堤
1. 개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있는 저수지이다. 서호(西湖)라고 불려왔으나, 2020년에 축만제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2005년 10월 17일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등재되었다.2. 역사
축만제는 1799년 (정조 23년) 조선의 왕 정조가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만든 저수지이다.주로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쓰였으며 만들어진 당시에는 현재의 크기보다 더 컸다. 이후 일제가 경부선을 지으며 저수지를 축소하였는데, 이는 현재 축만제의 동부가 직선의 형태를 띠는 이유이다. 축만제를 조성했을 때 수원화성 주변의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호수가 있었다.
북지(北池)는 만석거를 뜻하고 이는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하고 있다. 남지(南池)는 만년제로 사도세자 묘역 근방에 건설하였고, 동지(東池)는 팔달구 지동 부근에 만들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831년 당시 화성유수 박기수가 호수 남쪽에 정자를 짓고 "서호[1]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 같다"고 읊은 소동파의 시구에서 따와 정자 이름을 '항미정(杭眉亭)이라 하였고, 서호라는 이름도 중국 항주의 서호 같다 하여 이때 생겼다.# 서호는 1961년 국무원 고시 제16호에 의해 정식 명칭이 되었다가 2020년 축만제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국가지명위원회에 따르면 공문 등 법적 문서에서는 '축만제(서호)'와 같은 병기는 지양하지만, 서호라는 지명도 여전히 별칭으로 사용 가능하다.[2]
축만제는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 ICID(세계관개배수위원회)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3. 주변 시설
화서역이 가장 가까이 있고 남측에 국립농업박물관이, 북측에 서호공원이 있다. 그외 스타필드 수원이 가까이 있다.4. 서호납줄갱이
자세한 내용은 서호납줄갱이 문서 참고하십시오.5. 외부 링크
6. 문화재청 소개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있다. 화성부 서쪽에 축조된 수리시설로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정조가 화성을 쌓으면서 1795년(정조 23)에 내탕금 3만냥을 들여 축조한 관개저수지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방 양쪽 끝에 두 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축만제에 가두어둔 물을 활용하기 위한 장치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방이었으므로 제언 관리를 위하여 감관 1명, 감고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축만제 아래쪽에 설치한 축만제 둔전은 총 규모가 답 83석 15두 4승락에 달했다.
정조는 즉위한 이후 농업기술과 농업환경 개선의 핵심은 수리시설이라고 파악했다. 그리하여 화성을 축성하면서 주변에 만석거, 만년제, 축만제 등을 쌓았다. 여러 제언이 축조된 후 물이 관리되자 버려졌던 땅들이 비옥한 전토로 바뀌었다. 축만제는 조선후기 농업수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제방 양쪽 끝에 두 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축만제에 가두어둔 물을 활용하기 위한 장치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제방이었으므로 제언 관리를 위하여 감관 1명, 감고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축만제 아래쪽에 설치한 축만제 둔전은 총 규모가 답 83석 15두 4승락에 달했다.
정조는 즉위한 이후 농업기술과 농업환경 개선의 핵심은 수리시설이라고 파악했다. 그리하여 화성을 축성하면서 주변에 만석거, 만년제, 축만제 등을 쌓았다. 여러 제언이 축조된 후 물이 관리되자 버려졌던 땅들이 비옥한 전토로 바뀌었다. 축만제는 조선후기 농업수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