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어: Basilica di Superga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 토리노의 수페르가 언덕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2. 역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벌어진 토리노 공방전이 치열하던 1706년 9월 2일,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군의 진영을 살펴보고자 자신의 6촌인 사부아 공자 외젠과 함께 소수의 인원만 대동하여 수페르가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을 오르던 도중 그는 작은 성모상이 있는 간이 성당을 보았고, 조국을 침공한 프랑스군을 무찌르면 성모 마리아를 위한 성당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9월 7일, 토리노 공방전은 사보이아 공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시킨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사보이아 공국은 시칠리아를 받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국왕을 자처하는 한편 팔레르모로 건너가 대관식을 치렀다.[1] 이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메시나 출신의 건축가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ra 1678~1736)를 데려왔고, 토리노로 돌아온 후 토리노 공방전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수페르가 언덕에 거대한 성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1717년 성당을 짓기 위한 기초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언덕이 너무 높고 가파른 탓에 40미터를 깎아낸 끝에 1731년이 되어서야 완공되었다.
성당의 건축을 지시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성당이 완공되고 이듬해인 1732년 사망했고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부왕을 이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하였다. 이후 오트콩브 수도원[2]과 토리노 대성당, 베르첼리 대성당을 대체하는 사보이아 가문의 영묘당으로 이용되었다.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여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방계 왕족들은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1949년 5월 4일,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알려진 축구계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토리노 FC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한동안 휘청였다.
3. 관광
수페르가 사시(Sassi-Superga) 정류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으며 수페르가 언덕에서는 몰레 안토넬리아나, 토리노 왕궁, 알리안츠 스타디움 등 토리노의 주요 명소를 넘어 근교의 리볼리로 이어지는 프랑스 대로(Corso Francia), 뒤편의 사크라 디 산 미켈레(Sacra di san Michele)[3]까지 볼 수 있다. 성당 전망대를 올라가면 수사 계곡과 몬칼리에리[4]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관광 포인트는 크게 3곳으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목격했다는 성모상이 있는 내부의 예배당, 사보이아 가문의 영묘당과 왕실 아파트,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사망한 일 그란데 토리노(Il Grande Torino) 선수단을 추모하는 성당 뒤편이다. 사보이아 가문의 영묘당과 왕실 아파트는 가이드 투어로만 입장할 수 있으며 사진 촬영이 제한된다.
4. 주요 안장 인물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안 마리 도를레앙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리세나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사
- 카를로 알베르토&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
- 오스트리아의 아델하이트
- 아메데오 1세
- 마리아 피아
- 토미슬라브 2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5]
5. 기타
2023년 NASA에서 선정한 오늘의 천문학 사진의 배경이 되었다.[1] 여담으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빼앗긴 이탈리아 남부를 포기하지 못한 펠리페 5세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했고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2] 사보이아 백국 시절 사보이아 가문의 구성원들이 묻히던 수도원.[3] 움베르토 에코의 대작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되는 수도원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4] 토리노 근교의 위성도시.[5]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