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19:23:31

술레이만 파샤

오스만 시기 아크레 기반 군벌
제자르 파샤 술레이만 파샤 알 아딜 압둘라 파샤
1. 개요2. 생애
2.1. 집권2.2. 안정적인 통치2.3. 다마스쿠스 총독2.4. 말년과 죽음
3. 건축 사업

1. 개요

사실상 마지막 맘루크 지배 체계를 구축한 팔레스타인의 군벌. 전임자인 제자르 파샤와 달리 평화를 추구하였고, 감세와 긴축 정책을 펼쳐 18세기 말부터 전란에 시달린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810년에는 다마스쿠스 총독에 올라 라타키아 등 북부 레반트 해안을 시돈 에얄레트에 병합하며 후일 베이루트 에얄레트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종 베두인 가문들이 다스리던 나블루스 산지와 마론파 기독교 & 드루즈 세력이 다스르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한 레반트 해안 전역을 14년간 안정적으로 통치한 술레이만 파샤는 1819년 사망하였고 심복 알리 파샤의 아들 압둘라 파샤가 계승하였다.

2. 생애

1760년경 태어난 조지아맘루크로, 1770년대 후반 제자르 파샤에 의해 매입되어 아크레에 당도하였다. 뛰어난 재능으로 그는 알리 아가 카진다르, 살림 파샤 알 카비르[1] & 앗 사기르와 함께 제자르 파샤의 심복 중 하나가 되었다. 1785년 제자르 파샤가 다마스쿠스 총독이 되자 오스만 정부는 미크다드 파샤를 트리폴리 총독으로 봉하였는데, 제자르 파샤는 뇌물을 바쳐 술레이만 파샤가 미크다드 파샤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후 술레이만은 시돈의 무타살림 (징세관)이 되었는데, 이러한 중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1789년 맘루크 반란에 가담하여 시돈을 반란 거점 중 하나로 제공하였다. 다만 반군의 아크레 공격은 대실패로 귀결되었고, 술레이만과 살림 파샤는 레바논 산지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도주하였다.

2.1. 집권

시리아에서 군대를 모아 돌아오려던 술레이만은 계획이 순탄치 않고 나폴레옹을 격퇴하며 제자르 파샤의 명성이 높아지자 1801년 재차 그에게 접근하였다. 놀랍게도 제자르 파샤는 술레이만의 귀환을 '잃어버린 아들'인양 환영하였고, 사실상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1804년 봄, 시돈과 다마스쿠스 총독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아픈 그를 대신한 아미르 알 핫지로써 메카 순례를 이끌던 술레이만은 조정에 의해 시리아 전역의 지배권을 부여받은 이브라힘 파샤 카타라가시와 함께 아크레를 장악한 이스마일 파샤에 맞섰다. 6월 무렵 이브라힘 파샤는 아크레를 포위하였고, 시리아로 돌아온 술레이만 역시 포위에 합류하였다. 가을 무렵 이브라힘 파샤가 내년의 핫지 인도를 위해 다마스쿠스로 돌아가자 술레이만이 사령관으로서 포위를 이어나갔고, 조정은 그에게 시돈 총독위를 하사하며 공격에 박차를 가할 동기부여를 해주었다. 1806년 초엽 술레이만은 아크레에서 나와 셰파 아므르 근처 자신의 진영을 습격한 이스마일 파샤를 격파하였고, 아크레를 점령하며 비로소 제자르 파샤를 계승하였다.

우선 술레이만은 제자르 파샤가 사실상 해체시킨 그의 맘루크 체계를 복원하였고 알리 파샤, 무함마드 아부 나부트 등을 중용하였다. 그는 또한 가자와 야파의 태수이던 무함마드 아부 마라크와 대립하였다. 아부 마라크가 와하비 세력에 맞서라는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자 조정은 술레이만에게 그의 해임을 맡겼다. 이에 술레이만은 아부 나부트를 파견하였고, 1806년 말엽 그는 약 반년에 걸친 포위 끝에 아부 마라크를 축출하고 야파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은 술레이만에게 가자, 야파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산작까지 하사하며 사실상 팔레스타인 남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맡겼다. 술레이만은 제자르 파샤와 같은 중앙 집권적 지배 대신 아부 나부트를 야파를 중심으로 한 가자 산작의 베이로 봉하였다. 동시에 예루살렘에선 민란이 발발하였고, 다마스쿠스 총독이 봉한 징세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술레이만은 장군 중 한명인 무함마드 아가 아부 다리아를 파견하였다. 후자는 질서를 되찾고 징세관으로 봉해졌으나, 얼마 후 다마스쿠스 총독이 임명한 징세관이 당도하자 술레이만은 그에게 도전하지 않고 아부 다리아를 불러들였다.

2.2. 안정적인 통치

자치 세력들과의 전쟁과 지나친 과세를 일삼았던 제자르 파샤와 달리 술레이만은 아크레와 야파 포위 후로는 현지 세력들 간의 중재에 나서 평화를 추구하였고, 세금도 정해진 대로만 거두었기에 공정하다는 뜻인 '알 아딜' 호칭을 얻었다. 이는 단순히 그의 성품만이 아닌 경제적인 측면도 영향을 미쳤는데, 19세기 들어 목화 가격이 하락하며 아크레의 부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레이만은 군대 규모를 줄이고 휘하 태수들과 나블루스 산지의 셰이크들의 자치를 보장해주며 최대한 간섭하지 않았다. 동시에 나블루스 산지의 자라르, 투칸, 니므르 가문들을 각각 지원하면서도 중재에 나서며 견제와 동시에 명성을 쌓았다. 야파의 아부 나부트 외에 술레이만은 이즈짐의 유력자 마수드 알 마디를 야파 ~ 아크레 사이에 있는 아틀리트 & 하마 해안의 징세관으로 봉하며 분권화 정책을 이어나갔다. 한편 아크레 궁정은 알리 파샤[2]와 (제자르 파샤 때부터 사실상 총리였던) 유대교도 하임 파르히, 멜키트 기독교도인 서기 이브라힘 아르와 등이 두각을 드러내었다.

파르히의 지도 하에 술레이만은 아크레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기존에 행해지던 목화 독점을 완화하여 목화의 가격을 다변화하였고, 시내의 상인들에게 정부에서 빌려준 상점들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을 주어 상업에 전념하게 하였다. 또한 제자르 파샤 시기에 심심치 않게 행해지던 상인들에 대한 착취나 물품 압류를 금하였으며 상인들 뿐만 아니라 재배를 담당하는 농민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하였다. 다만 목화 무역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권은 유지하였다. 이러한 경제 정책은 목화 외에 올리브유와 곡물과 같은 다른 팔레스타인의 대표 상품 작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1808년 술레이만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병력이던 알바니아 부대를 해산시켰다. 가자 ~ 베이루트 해안에 배치된 그의 병력은 대략 1500 정도였다. 아크레에는 겨우 2백여만이 배치된 것에 반해 아부 나부트 휘하의 야파에는 5백명이 주둔하였다. 이렇듯 술레이만의 시기에 군대의 규모는 대폭 격감되었다.

2.3. 다마스쿠스 총독

1810년 다마스쿠스 총독 쿤즈 유수프 파샤는 하우란 지역을 침공한 와하비 세력과 맞서기 위해 술레이만과 바시르 2세에게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호응한 술레이만은 남은 마그레브, 쿠르드, 튀르크, 아랍, 알바니아 병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출정하였고 바시르 2세 역시 순니/쉬아 무슬림, 드루즈, 기독교등 다종교 혼성 군대를 꾸렸다. 연합군은 티베리아스에 집결한 후 요단강을 건너 진격하였는데, 아크레와 다마스쿠스의 중간 지점인 쿠네이트라에 당도했을 무렵 유수프 파샤는 와하비 군대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알리며 철군을 요구하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분노한 술레이만은 명령을 거부하며 그대로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였다. 유수프 파샤는 도시 서남쪽 방면으로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술레이만은 제디다 아르투즈에서 짧은 대치 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술레이만은 메카 순례단을 이끄는 의무를 지속적으로 이행하지 못한 유수프 파샤를 대신하라는 조정의 승인을 받았다. 다마스쿠스 총독과 아미르 알 핫지 외에 그는 시돈 총독위를 유지하였고, 트리폴리 총독위까지 얻으며 제자르 파샤 때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얻었다.

한편 1811년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가 중앙 집권을 위해 맘루크들을 학살하자. 아민 베이 등 탈출에 성공한 이들이 (마지막 맘루크 거점으로 여겨진) 아크레로 망명해왔다. 영국에 대한 곡물 수출로 재정을 확보하던 술레이만은 그들을 고용하였고 1812년 여름에는 수백여 신규 맘루크를 구매하였다. 이로써 그의 병력은 2500명까지 늘어났다. 다만 기병대에 있어 맘루크들은 샴딘 아가, 니마트 아가, 아얄야킨 아가 휘하의 5백여 쿠르드 부대와 (아랍인) 무사 아가 알 하시, 알리 아부 자이드 아가 휘하의 4백여 하와라 베두인 비정규 부대에게 뒷전으로 밀렸다. 보병대에서도 티레의 알바니아인 장교 무함마드 아가 앗 누만 휘하의 2백여 병력과 아크레의 7백 포병대가 주도권을 쥐었다. 따라서 술레이만은 맘루크들을 정치와 행정 부문의 관직에 임명, 그들의 충성을 기반으로 한 유연한 지배 체계를 구축하였다. 다마스쿠스 총독으로서 술레이만은 그곳에 머물며 맘루크 우준 알리 알 카시르를 하마, 자파르 아가를 홈스, 다르위시 아가를 다마스쿠스, 쿤즈 아흐마드 아가를 예루살렘의 징세관으로 봉하였다.

나블루스에는 현지 유력가인 무사 베이 투칸을 징세관으로 두어 자치를 인정하였고, 심복인 알리 파샤에게 자신이 부재한 아크레를 맡겼다. 1812년 말엽 술레이만은 2년만에 다마스쿠스 총독에서 해임되었고 실라다르 쉴레이만 파샤로 대체되었다. 다만 그동안 술레이만은 조정의 승인을 받아 라타키아 산작을 포함한 트리폴리 에얄레트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근거지인 시돈 에얄레트에 병합하였다. 이미 제자르 파샤 시기에 가자 산작을 병합했던 시돈 에얄레트는 사실상 레반트 해안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소속이지만 나블루스, 예루살렘, 랏준 산작 역시 이미 제자르 파샤때부터 시돈 총독이 실효 지배 중이었기에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남부는 이때 사실상 아크레를 중심으로 통일된 공동체를 이루었다. 술레이만 파샤는 이후에도 1816년 실라다르 쉴레이만 파샤가 사망했을 때를 포함해 두 차례에 걸쳐 임시로 다마스쿠스 총독을 맡는다. [3]

2.4. 말년과 죽음

술레이만이 임시 다마스쿠스 총독을 맡았을 때는 모두 핫지 달이었고, 총독이 아미르 알 핫지로서 순례세인 미리를 걷기 위한 다르와 (징세 순행)를 행하는 시기였다. 이는 자치적인 지역들에서 쉽지 않은 임무였고, 특히 여러 대에 걸쳐 총독들이 직접 지배를 확립하지 못했던 나블루스 산지에서는 더욱 어려웠다. 다만 술레이만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투칸 가문과 친교를 맺은 덕에 수월히 미리를 거둘 수 있었고, 시돈 총독의 관할령 밖이었음에도 팔레스타인 중부 고원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1817년 투칸 가문은 나블루스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 상대인 니므르 가문과 충돌하였다. 이는 자라르, 아불 하디, 카심 가문 등 나블루스 산지 전역의 현지 셰이크들이 보복을 거듭하는 내전으로 치달았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술레이만은 본래 투칸 가문을 지지하였으나 단일 세력의 집권 대신 세력 균형을 이루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나는 서기 이브라힘 알 아르와[4]의 조언에 따라 무사 베이 투칸에 대한 물질 지원을 끊고 아크레에서 평화 협상을 주재하였다.

1817년 말엽 술레이만의 중재로 무사 베이와 자라르, 압둘 하디 가문간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1818년 7월에는 나블루스의 무프티를 통해 니므르 가문 역시 평화 협정에 끌어들였고, 무사 베이는 기타 가문들에게 사망자들에 대한 위자료를 제공하는 대신 나블루스의 징세관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1818년 들어 술레이만은 와병하였고, 후계자 논의가 물망에 올랐다. 1814년 알리 파샤 카지나르가 사망한 후 영향력을 확대한 파르히는 전자의 10대 아들 압둘라 파샤를 술레이만의 후계자로 지지하였고, 유력한 후보였던 야파 태수 아부 나부트를 지속적인 설득을 통해 해임하게 하였다.[5] (1818년 여름) 술레이만은 이를 수용하는 대신에 압둘라와의 몇가지 규칙을 정하였는데, 그가 알리 파샤처럼 자신의 궁정에 집무실을 두지 말고 공개적으로 손에 키스를 받지 말것이며 자신과 함께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1819년 8월 술레이만은 사망하였고 제자르 모스크에 옛 주인의 곁에 안장되었다. 뒤를 이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된 아불라 파샤는 약 1년여 만에 섭정 파르히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3. 건축 사업

파일:야파 오스만 술레이만.jpg
야파의 사빌 술레이만. 여행자들을 위한 분수대로, 아부 나부트가 상관의 명의로 세움
파일:아크레 수도교.jpg
아크레 수도교

제자르 파샤와 달리 술레이만은 건축 사업에 있어서도 대규모 공사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새로 건축한 구조물은 1810년 세워진 아크레의 당나귀 시장을 위한 칸 (카라반사라이)였다. 1813년에는 시돈 에얄레트 관내 주요 도로들을 따라 감시탑을 건설, 교통 안보를 확보하였다. 다만 도로 자체에 대한 방치는 계속되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야 라스 앗 나쿠라 산간 지방의 도로를 확장하고 자흐라니 강에 다리를 부설하는 정도의 개선을 이룩하였다. 그외에는 모두 재건 혹은 보수 공사였다. 술레이만은 자히르의 집권 이전 아크레의 유일한 이슬람 사원이었던 시난 파샤 모스크를 재건하였고, 이후 바흐르 (바다) 모스크라 불렸다. 1815년에는 제자르 파샤 시기에 지어졌으나 1799년 나폴레옹의 포위 시에 파괴되었던 카브리 수도교를 복원하였다. 1817년에는 화재로 전소된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바자르를 재건하였고, 이후로 수크 알 아브야드 (노예 시장?)로 불리게 되었다. 아크레 외에 그는 예루살렘 일대 건물들에 대한 보수 공사비를 후원하였는데, 그중 1816년 알 아크사 모스크가 주요 사례 중 하나이다.

[1] 1786년 사망[2] 1814년 사망[3] 모두 후임 총독이 부임하기 전까지 질서를 유지하는 임시직이었다.[4] 다만 그는 더 나아가 자라르, 압둘 하디 가문을 지원해야 한다고도 주장하나 그정도까지 수용되지는 않음[5] 정확히는 해임 명령에 의해 내부 쿠데타가 일어나 축출됨. 이후 코스탄틴예로 향하여 복수 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