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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23:51:56

슈테판 3세 폰 바이에른

<colbgcolor=#4169E1><colcolor=#ffffff>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 폰 바이에른
Stephan III von Bayern, Herzog von Bayern
파일:Stephen III of Bavaria.jpg
이름 슈테판 3세 폰 바이에른
Stephan III von Bayern
별명 장엄한 자
Prächtige
출생 1337년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사망 1413년 9월 25일 (향년 75~76세)
신성 로마 제국 아우크스부르크 바이에른 교구 니더쇠넨펠트 수도원
아내 타데아 비스콘티 (1364년 결혼/1381년 사망)
클레베의 엘리자베트 (1401년 결혼)
자녀 루트비히 7세, 엘리자베트, 요한 (사생아)
아버지 슈테판 2세 폰 바이에른
어머니 시칠리아의 엘리사베타[1]
형제 아그네스, 프리드리히, 요한 2세
직위 오버바이에른 공작 →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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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공작. 알자스와 상부 슈바벤의 제국 행정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아버지다.

2. 생애

오버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2세와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엘리사베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아그네스[2],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 프리드리히(1339~ 1393), 바이에른-뮌헨 공작 요한 2세(1341~1397)가 있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장손이었다. 1365년 8월 12일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타데아 비스콘티와 약혼했고, 1367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1363~1369년 티롤 전쟁에서 아버지 편 기사로 참전했으며, 1371~1373년 브란덴부르크 전쟁에 참여했다. 1368년 이탈리아에서 장인과 함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결성한 반 밀라노 동맹에 맞서 싸웠다. 1374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3]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걸 도운 대가로 밀라노의 라이벌인 베로나를 공격할 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슈테판은 1371/1372년에 튜튼 기사단에 가담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이 단행될 때 참여했다. 137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에 의해 형제 프리드리히와 함께 알자스와 상부 슈바벤의 제국 행정관에 선임되었다.

1375년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려 했지만, 아버지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당시 오버바이에른은 그 외에도 두 형제인 프리드리히와 요한 2세, 그리고 아버지의 이복 형제이자 그에게는 숙부가 되는 오토 5세[4]까지 권한이 있었다. 1376년에 반포된 바이에른 분할령에 따르면, 슈테판 3세와 요한 2세가 처음에 오버바이에른을 다스리고, 프리드리히와 오토 5세는 니더바이에른을 다스리며, 2년마다 서로 바꿔가며 바이에른을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이 특이한 규정은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

그는 상바이에른 공작이 된 후에도 이탈리아 반도알자스에서 계속 활동했고, 로마를 방문해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저녁에 교회 종을 울리는 권한을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그러던 1376년 7월 4일, 슈바벤 도시 14곳이 자신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긴 독일왕 벤첼에게 반발해 슈바벤 도시 연맹을 결성했다. 슈테판과 프리드리히는 슈바벤 행정관으로서 카를 4세와 슈바벤 도시 연맹간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9년, 벤첼이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에게 슈바벤 행정관 직위를 약속하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슈바벤 도시 연맹과 연합해 벤첼이 세금을 철회하는 데 일조했다. 1380년, 슈테판 3세는 바츨라프 4세의 로마 진군을 저지하려는 교황청을 도왔고, 몇 달간 교황령에 머무르면서 움브리아의 토디 시를 잠시 통치했다.

1383년, 형제 프리드리히가 프랑스 왕실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신부로 딸 엘리자베트를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 1385년 4월 캉브레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장남인 느베르 백작 용맹공 장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가 결혼하고, 마르가레테의 형제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작 빌헬름 2세가 용맹공 장의 여동생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을 때, 엘리자베트와 샤를 6세의 결혼이 다시 제안되었다. 당시 샤를 6세를 대신해 프랑스 국정을 총괄했던 호담공 필리프는 이 결혼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동맹을 성사시킴으로써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슈테판 3세는 딸을 프랑스 국왕과 결혼시키는 대신 독일 귀족들 중 한 사람과 결혼시키는 걸 선호했다. 샤를 6세가 스코틀랜드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게서도 결혼 계약을 제안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딸이 채택될 수 있을 지 미지수였고, 프랑스 궁정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관습을 껄끄러워했다. 특히 결혼하기 전에 궁녀들 앞에서 신부의 옷을 전부 벗겨서 몸을 조사하게 하는 관습을 혐오했다. 그러나 호담공 필리프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비텔스바흐 가문 구성원들도 적극적으로 권하자, 슈테판 3세는 마지못해 딸을 프랑스 왕실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슈테판은 딸이 나중에 결혼을 거절당하고 이에 따른 불명예를 입을 것을 우려해 딸이 세례 요한의 유물을 순례한다는 구실을 대고 프랑스의 아미앵으로 보냈다. 이때 그는 결혼을 주선한 형제 프리드리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왕이 내 딸을 버린다면, 그녀는 평생 수치심에 시달릴 것이오. 그러니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시오. 그녀가 끝내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의 원수가 될 것이오!"

다행히 이자보는 샤를 6세의 총애를 얻고 무사히 결혼했다. 이후 슈테판 3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391년 아들 루트비히 7세를 프랑스 궁정에 보내 딸을 보좌하게 했다.

1387 ~ 1389년, 슈테판 3세는 형제들과 니더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슈바벤 도시 연맹 및 잘츠부르크 대주교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벌어지던 와중인 1387년 1월27일 형제 프리드리히가 잘츠부르크 대주교 필그림 폰 푸흐하임을 라이텐하슬라흐에서 체포해 부르크하우젠으로 끌고 가서 슈바벤 도시 연합과의 동맹을 파기하라고 강요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격분해 바이에른 공작들을 파문에 처했고, 벤첼은 바이에른 공국을 상대로 제국 전쟁을 선포했다. 결국 슈테판 3세를 비롯한 바이에른 공작들은 1389년 슈바벤 도시들과 화해하고 필그림 폰 푸흐하임을 풀어줬다. 1390/1391년 비스콘티 가문 편에서 다시 싸웠고, 파도바에서 프란체스코 다 카라라가 복위하는 데 기여했다.

1392년, 슈테판 3세와 형제들은 아버지 슈테판 2세의 영지를 바이에른-뮌헨, 바이에른-란츠후트, 바이에른-잉골슈타트로 분할했다. 슈테판 3세는 추첨을 통해 오버바이에른과 노르드가우 내 여러 영지를 상속받고 잉골슈타트에서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가진 영지가 너무 좁다고 여기고, 1394/1395년 바이에른-뮌헨 공작 요한 2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의 아들 루트비히 7세는 139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스트리아 공작의 총리였던 베르톨트 폰 베힝겐이 주교를 맡고 있던 프라이징을 습격했고, 파펜호펜을 위협했으며,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바이에른-뮌헨 공국의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나우를 약탈했다. 요한 2세와 아들 에른스트, 빌헬름은 이에 대응해 아이하흐와 프리드베르크를 습격했고, 슈바벤 마크트 성을 파괴했다.

그 후 슈테판 3세와 요한 2세는 협의를 거친 끝에 1395년 9월 바이에른-뮌헨과 바이에른-잉골슈타트를 함께 통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조카인 에른스트와 빌헬름에 대항하여 반항적인 뮌헨 길드를 지원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바이에른-뮌헨 공국은 1402년 그의 통치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 후 그는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느라 막대한 빚을 빌렸다. 당시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루트비히 7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나중에 자신이 영지를 상속받을 때 빚에 허덕일 것을 우려해 잉골슈타트 지역의 귀족 및 수도사들에게 아버지한테 돈을 더 잇아 빌려주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에 따랐고, 슈테판 3세는 격분해 아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무시당했다.

한편, 벤첼은 슈테판 3세를 1394년부터 1397년까지 슈바벤의 제국 행정관에 선임했다. 슈테판 3세는 그 대가로 보헤미아 왕국 대귀족들에게 맞서는 벤첼을 지원했다. 그런데 벤첼이 1395년 슈테판 3세의 장인 베르나보 비스콘티를 살해한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를 밀라노 공작으로 승격시키자 슈테판 3세는 큰 불만을 품었다. 1397년 벤첼은 슈테판 3세를 더이상 슈바벤의 제국 행정관으로 선임하지 않고 대신 프리드리히 폰 오팅겐에게 수여했다. 이에 슈테판 3세는 1399년부터 아들 루트비히 7세와 함께 벤첼에게 반기를 들고 친척인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대립 독일왕으로 추대했다. 또한 딸이 프랑스의 왕비인 점을 이용해 프랑스의 중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루프레히트가 룩셈부르크 왕조와 갈등을 벌이자, 룩셈부르크 왕조와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룩셈부르크 왕조와 손잡기로 하고 1407년 마르바흐 연맹에 가담했다.

1410년, 티롤 후백국에서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에 반대하는 귀족 연합이 결성되었다. 슈테판 3세는 귀족 연합의 지도자인 하인리히 폰 로텐부르크를 지원하고자 티롤을 침공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13년 초, 그는 재차 티롤을 직접 침공했지만 이번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13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바이에른 교구 니더쇠넨펠트 수도원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은 루트비히 7세는 1430년경 슈테판 3세의 유해를 잉골슈타트에 새로 건설된 리브프라엔뮌스터 수도원으로 옮겼다.

3. 가족



[1] 시칠리아 국왕 프리드리히 3세의 딸.[2]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자크 1세의 부인[3]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손자로 합스부르크 가문 레오폴트계의 시조.[4] 본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물려받았으나 황제 카를 4세에게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