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23:52:26

루트비히 7세 폰 바이에른

<colbgcolor=#4169E1><colcolor=#ffffff>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7세 폰 바이에른
Ludwig VII von Bayern, Herzog von Bayern
파일:louis-vii-the-bearded.jpg
이름 루트비히 7세 폰 바이에른 (Ludwig VII von Bayern)
별명 수염 난 자
Gebartete
출생 1368년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사망 1447년 5월 1일 (향년 78~79세)
신성 로마 제국 바이에른 부르크하우젠
배우자 부르봉의 안[1] (1402년 결혼/1408년 사망)
알랑송의 카트린[2] (1413년 결혼)
자녀 루트비히 8세, 요한, 아나
아버지 슈테판 3세 폰 바이에른
어머니 타데아 비스콘티
형제 엘리자베트
직위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여동생 엘리자베트의 비호 아래 프랑스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외손자로서 이탈리아 반도 정계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 하인리히 16세와 전쟁을 벌이던 중 평소 불화를 빛던 아들 루트비히 8세가 하인리히 16세 편을 드는 바람에 생포되었고, 장기간 옥고를 치르다가 사망했다.

2. 생애

1368년경 오버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 폰 바이에른과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타데아 비스콘티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왕비인 엘리자베트가 있었다. 1388년 아버지와 슈바벤 도시 연맹 사이의 전쟁에 참전했으며, 1388년 9월 도나우슈타우프 공방전에 참여했다. 1391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특사로서 프랑스 왕실을 방문해, 교황령의 치안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전달했다. 샤를 6세는 그를 따뜻하게 환대했고, 독일식 옷을 입었으며, 그에게 5,000 프랑의 연금을 제공했다.

1393년 아버지의 영지인 잉골슈타트로 돌아간 뒤 1394/1395년 바이에른-뮌헨 공작 요한 2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139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스트리아 공작의 총리였던 베르톨트 폰 베힝겐이 주교를 맡고 있던 프라이징을 습격했고, 파펜호펜을 위협했으며, 주님 공현 대축일에 바이에른-뮌헨 공국의 노이슈타트 안 데어 도나우를 약탈했다. 요한 2세와 아들 에른스트, 빌헬름은 이에 대응해 아이하흐와 프리트베르크를 습격했고, 슈바벤 마르크트 성을 파괴했다. 1395년 가을 슈테판 3세와 요한 2세가 화해한 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엘리자베트의 비호를 받으며 프랑스 왕실에서 활동했다.

1400년 2월 1일, 슈테판 3세를 비롯한 바이에른 공작들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성속 선제후들을 꼬드겨 벤첼을 타도하고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대립왕으로 선출하도록 유도했다. 1400년 8월 21일 렌스에서 벤첼의 폐위와 루프레히트 3세의 독일왕 선출이 발표되었다. 루트비히는 프랑스 왕실이 이 문제에 관련해 중립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정치 공세를 펼쳤고, 그 결과 프랑스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1390/1391년 이탈리아로 가서 나폴리 왕국과 결혼 동맹을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1402년 루프레히트의 롬바르디아 원정에 참여했지만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실로 돌아간 루트비히는 여동생 이자보의 시녀인 부르봉의 안과 결혼해 130,000 프랑에 달하는 지참금을 받아냈고, 12,000 프랑의 연금도 추가로 확보했다. 그는 자신이 받을 자격이 있는 돈을 실제로 받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현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프랑스 왕실 재무부 일부를 담보로 가져갔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에서 100,000 길더의 가치에 해당되는 보석들을 잉골슈타트로 보냈다. 이에 프랑스 사람들은 이자보가 독일인 형제를 위해 국고를 약탈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루트비히는 이렇게 확보한 수입 절반을 바이에른으로 보내 잉골슈타트에 쌓여가는 빚을 갚았다.

1402/1403년 겨울, 루트비히 7세는 에른스트와 빌헬름 3세 공작에 맞서 반기를 든 뮌헨 시민들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 슈테판 3세와 이 문제를 놓고 긴밀히 논의했다. 1403년 3월 중순에 뮌헨이 이미 두 공작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바이에른으로 돌아갔고, 두 사촌이 뮌헨을 접수하는 걸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해 5월 31일 두 사촌이 뮌헨을 탈환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루트비히는 라인강으로 가서 루프레히트와 마인츠 선제후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다.

1403년 7월, 잉골슈타트에 도착한 루트비히는 아버지 슈테판 3세가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느라 막대한 빚을 빌린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영지를 상속받들 때 빚에 허덕일 것을 우려해 잉골슈타트 지역의 귀족 및 수도사들에게 아버지한테 돈을 더 이상 빌려주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에 따랐고, 슈테판 3세는 격분해 아들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무시당했다.

1403/1404년, 루트비히는 사촌 하인리히 16세가 1392년 바이에른 분할 당시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국에 불이익을 주었다며 고발했다. 그러나 판결을 맡은 바이에른-뮌헨 공작 에른스트는 1406년 그의 주장을 기각했다. 이에 루트비히는 1407년 루프레히트에게 항소했고, 1409년에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게 재소했으며, 피사 교황 요한 23세에게도 재소하기도 했다. 1410년 프라이징 중재 법원에서 하인리히 16세가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으로서의 권리를 확인할 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에른스트 및 빌헬름 3세와의 동맹을 통해 하인리히 16세를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두 사람에게 광범위한 양보를 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두 사람은 하인리히 16세 쪽으로 돌아섰다.

1407년 11월 샤를 6세의 형제이자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암살당한 후, 루트비히 7세는 프랑스 왕실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궁정의 모든 여행에 동행했으며, 왕실 거주지 인근에 있는 호텔 뒤 포크파인을 구입한 뒤 정실질환에 시달리는 남편을 대신해 정국을 이끌던 엘리자베트를 보좌했다. 1408년 용맹공 장과 함께 리에주 주교 요한 3세를 상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리에주 민병대를 공격해 오태여 전투의 완승에 기여했다. 이후 프랑스의 권신이 된 용맹공 장에게 협력했지만, 용맹공 장의 추종자들이 갈수록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자 위협을 느끼고 점차 그에게 등을 돌렸다.

1412년, 용맹공 장은 루트비히 7세에게 연금을 덜 받고 사치를 줄이라고 요구했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성난 군중이 그의 저택 앞에 모여들었다. 이에 루트비히 7세는 에노 백작 빌헬름 2세에게 망명했다. 그의 귀중품을 실은 수송선은 부르고뉴파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약탈당했고, 선원들은 피살되었다. 그 후 파리로 돌아온 루트비히 7세는 1413년 알랑송의 카트린과 재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1413년 5월 23일로 계획되었지만, 그 전날에 용맹공 장을 지지하는 카보슈앵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신하 및 시녀들과 함께 생포되었다. 이후 루브르 궁전에 투옥되어 2달여 간 국외로 반출한 보물에 관해 심문받았다. 그 해 8월 4일에 석방되어 프랑스 왕실로 돌아왔고, 10월에 알랑송의 카트린과 결혼했다.

1413년 9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이 되었지만 귀국 대신 프랑스에 계속 머물었다. 1415년 2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고자 프랑스를 떠난 그는 벤첼의 이복 동생으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자 독일왕 지기스문트의 영접을 받았다. 그는 이 회의에서 루이 1세 도를레앙 암살은 폭군을 살해한 것이므로 정당하다는 부르고뉴파를 비난했다. 1417년 하인리히 16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의 공격을 받고 큰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겨우 건졌다. 그 후 루트비히 7세는 하인리히 16세를 "인간의 피를 완전히 잃어버린 자", "블러드하운드"라고 규탄했다.

그 후 잉골슈타트에 돌아온 그는 1420년 하인리히 16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뉘른베르크 요새를 약탈했다. 이후 전쟁은 2년간 이어지다가 알링 전투에서 패배한 뒤 1422년 10월 2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보헤미아 왕국에서 벌어진 후스 전쟁제국군을 집중하려는 지기스문트의 중재로 4년간의 휴전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 후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국은 일시적으로 제국 행정관에게 종속되었고, 루트비히 7세와 하인리히 16세는 지기스문트의 대 후스파 토벌전에 참가했다. 또한 튜튼 기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파견되기도 했다.

1425년 1월 6일, 하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그에게는 남성 후손이 없었고, 조카인 에노의 자클린에노 백국을 탈환을 위해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결혼 동맹을 맺고 선량공 필리프와 대결하고 있었기에 니더바이에른 공국에 신경쓰지 못했다. 루트비히 7세는 2월 5일 프라이징에서 에른스트와 하인리히 16세를 만나 하바이에른 공국을 분할하는 문제를 논의했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도 니더바이에른 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바이에른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지기스문트는 1426년 3월, 니더바이에른을 인수할 후보자로 하인리히 16세, 에른스트, 빌헬름 3세를 지명했다. 그러자 루트비히 7세는 자신을 배제한 독일왕의 결정에 분노해 이를 거부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10월에 루트비히 역시 니더바이에른의 상속 후보로 받아들였다. 1427년 7월 21일 하인리히 16세가 상속을 포기하기로 한 뒤, 루트비히 7세는 에른스트, 빌헬름 3세와 함께 영지 상속에 관한 최종 결정을 제국 의회에 회부했다. 지기스문트는 처음에는 니더바이에른을 3부분으로 분할하려 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인구에 따라 나누도록 했다. 그 결과 1429년 프레스부르크 중재로 니더바이에른은 4부분으로 분할되었고, 2개 부분을 뮌헨으로, 1개 부분은 잉골슈타트와 란츠후트에 각각 넘어갔다.

한편, 루트비히 7세와 하인리히 16세간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결국 1436년, 두 공작은 다시 전쟁을 단행했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438년, 지기스문트의 위임을 받은 아이히슈타트 주교 알브레히트 2세 폰 호엔레흐베르크가 양자의 중재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443년, 루트비히 7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아들 루트비히 8세가 하인리히 16세에게 가담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였다. 루트비히 7세는 노이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로 철수한 뒤 몇 달간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1443년 10월 4일 항복한 뒤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루트비히 8세는 아버지를 끌어내린 뒤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으로 취임했다.

1445년 루트비히 8세가 사망한 뒤, 루트비히 7세는 그의 며느리인 브란덴부르크의 마르가레테의 형제인 안스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에게 넘겨졌다. 1446년, 알브레히트는 거액의 돈을 받고 하인리히 16세에게 루트비히 7세를 넘겼다. 그렇게 오랜 세월 원수 사이였던 하인리히 16세의 포로가 된 그는 부르크하우젠 성에 갇혀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몸값을 지불하면 풀어주겠다는 제의를 거부했고, 잉골슈타트 지방에서 그의 석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것 역시 금지했다. 결국 1447년 5월 1일에 옥사했고, 부르크하우젠 인근의 라이텐하슬라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잉골슈타트 공국은 하인리히 16세에게 넘어갔다.

3. 가족



[1] 장 1세 드 부르봉라마르슈의 딸.[2] 피에르 2세 달랑송의 딸.[3]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의 아들[4]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