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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6대 군주 Σκερδιλαΐδας | 스케르딜라이다스 | ||
제호 | 한국어 | 스케르딜라이다스 |
그리스어 | Σκερδιλαΐδας | |
라틴어 | Scerdilaidas | |
존호 | 왕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206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217년 ~ 기원전 2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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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디아이 - 라베타이 왕국 6대 군주.2. 행적
아르디아이 왕국 2대 군주 아그론의 형제 또는 사촌으로 추정된다. 여성 섭정 테우타가 집권하는 동안, 그는 사령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230년, 아르디아이 해군은 온체스모스에 육군을 상륙시켰다. 일리리아 육군은 에페이로스 연맹의 수도인 포이니케를 재빨리 점령했다. 이에 에페이로스인들이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고, 그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맞섰다. 에페이로스 인들은 비스트리카 강 인근에 진영을 세운 뒤 일부 병력을 파견해 안티고니아 방향으로 이동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으며, 일리리아인들이 비스트리카 남쪽으로 진격하는 걸 막기 위해 두 강둑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를 파괴했다.에페이로스인들은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할 테고, 보급로가 끊기면 곧 철수하리라 여기고 방심했다. 그러나 그는 적군이 병력을 분산시키고 경계를 느슨하게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야간에 쪽배를 동원해 병사들을 비밀리에 도하시켰다. 다음날 아침 적이 강을 건너 아군 진영으로 접근했다는 걸 알게 된 에페이로스인들은 급히 전투 대형을 편성해 맞섰다. 전투 결과는 일리리아인들의 대승이었다. 에페이로스인들 다수가 죽임을 당하고 더 많은 이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나머지는 아틴타니아로 도주했다. 그는 뒤이어 에페이로스 일대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에페이로스인들은 아카이아 동맹과 아이톨리아 동맹에 일리리아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두 동맹은 돕기로 하고, 에페이로스에 구원군을 보냇다. 그는 페이니케에 주둔한 병력과 5천 정예병을 합세시킨 뒤 헬리크라눔 인근에서 아카이아-아이톨리아 연합군과 조우했다. 그는 기원전 231년 아그론이 아이톨리아 동맹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리스군을 어서 상대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일부러 불리한 지형에 군대를 이동시켜서 적을 도발했다. 그러나 아카이아-아이톨리아 연합군은 섣불리 공격했다가 지난번처럼 완패할까 두려워하여 전투를 회피했다. 그러던 중 테우타로부터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가능한 한 빨리 복귀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이에 그는 다른 부대를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자신은 5,000 정예병을 이끌고 안티고네이아 인근의 고개를 지나 천천히 귀환했다. 아카이아-아이톨리아 동맹군은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고, 에페이로스 연맹은 아르디아이 왕국에 공물을 바치고 봉신이 되기로 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기원전 228년 로마가 4개 군단과 200척의 함대를 파견해 해적 행위를 일삼는 아르디아이 왕국을 침략했다. 그는 로마군을 상대로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했고, 테우타는 기원전 227년 로마에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해적 행위를 중단하며 해안 지대를 로마에 넘기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고, 로마군에 협력한 덕분에 일리리아 해안지대의 지배권을 얻어낸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는 어린 피네스의 어머니 트리테우타와 결혼함으로써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위세가 강했기 때문에, 일부 권력을 넘겨줘야 했다. 기원전 221년, 그는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와 동맹을 맺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3세와 맞붙었다. 전투 자체는 그가 패배했지만, 안티고노스 3세는 전투 직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 일은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관계를 놓고 그와 데메트리오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원전 220년 초, 그와 데메트리오스가 이끄는 90척의 일리리아 함대는 리소스 남쪽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 마을인 필로스에 상륙하여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그들은 둘로 나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50척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주변을 계속 항해하여 키클라데스에 도착한 뒤 여러 곳을 습격했다. 한편 그는 40척의 함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나우팍토스에 도착했다. 이후 아겔라오스를 통해 아이톨리아 동맹과 토지 분할에 대해 합의한 뒤, 그들과 함께 아카이아 동맹을 치기로 했다. 일리리아-아이톨리아 동맹은 아카이아 동맹의 영역으로 진격해 키나에타를 공략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인들이 전리품 일부를 전달하지 않자, 그는 아이톨리아와의 동맹을 끊고 본국에 돌아갔다. 기원전 219년,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로부터 연간 20달란트를 받는 대가로 고용되어 전선 30척을 이끌고 아이톨리아 해안가를 약탈했다.
기원전 219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전쟁에서 패한 뒤 마케도니아로 피신했고, 그는 아직 어린 피네스 왕의 섭정이 되었다. 기원전 217년 피네스가 죽었을 때 비로소 왕을 칭했다. 당시 그의 영역은 스코드라 호수 인근의 라베타이 인들의 영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후대 학자들은 그의 왕국을 '라베타이 왕국'으로 칭한다. 그는 15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레우카스 항구에 접근했다. 레우카스 사람들은 일리리아인들이 마케도니아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4척의 마케도니아 선박을 나포하고 코린트인 선원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마레아 항구까지 진군하면서 마주치는 상선들을 포획하여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후 그는 로마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적대했다.(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필리포스 5세는 레우카스 항구가 그에게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함대를 파견해 해안지대를 순찰하여 적을 찾아내 보복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본국으로 귀환했고, 이번에는 육지에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로마의 보호를 받던 파르티니족의 땅과 마케도니아 사이의 리크니도스 호수 인근 고지를 넘어간 뒤 다사레티스에서 안티파트레아, 크리손디온, 게르토스 등을 잇따라 공략했다. 뒤이어 펠라고니아로 진격해 피사이움 마을을 약탈했다. 당시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육군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에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필리포스 5세는 어쩔 수 없이 아이톨리아 동맹과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마케도니아로 북상했다. 그 후 군대를 총동원해 그가 공략했던 도시들을 빠르게 탈환하고 뒤이어 그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전투력도 뛰어난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고, 그의 지배권 마저 위협받았다. 이에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한니발 바르카에게 시달리고 있던 로마는 10척의 배만 겨우 파견했다. 이 소규모 함대는 그에 대한 지원보다는 일리리아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로마군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필리포스 5세는 로마와 당장 대결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일단 공세를 중단했다.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 5세는 지난해에 벌어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디라키움, 아폴로니아, 코르기라, 파로스, 파르티니, 아틴타네스로부터 로마의 영향력을 배제하기로 하고, 그를 처단하면서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를 일리리아 왕위에 복귀시키기로 했다. 기원전 213/212년, 마케도니아군은 해안 도시 리소스와 그 근처의 요새인 아크로리소스를 공략했다. 그는 이에 맞서 로마군과 연합해 지속적으로 항전했다. 기원전 208년, 아들 플루라토스 3세와 함께 리소스의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공격했다. 그 결과 리소스, 아크로폴리소스와 인근 영토를 탈환했다. 두 사람은 기원전 207년까지 로마의 보호를 받던 일리리아 내륙 지대를 상당 부분 탈환했다. 당시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 동맹, 스파르타, 로도스, 페르가몬 왕국 등 로마와 연합한 주변 국가들의 공세에 맞서느라 일리리아인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기원전 206년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가던 중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아들 플루라토스 3세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