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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00:32:11

스티브 맥마흔

스티브 맥마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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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87-88 · 1989-90
}}} ||
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파일:SteveMcMahonEngland.jpg
<colbgcolor=#eeeeee> 이름 <colbgcolor=#fff,#1F2023> 스티브 맥마흔
Steve McMahon
본명 스티븐 조셉 맥마흔
Stephen Joseph McMahon
출생 1961년 8월 20일 ([age(1961-08-20)]세)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노즐리 도시 자치구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에버튼 FC (1979~1983)
아스톤 빌라 FC (1983~1985)
리버풀 FC (1985~1991)
맨체스터 시티 FC (1991~1994)
스윈던 타운 FC (1994~1998)
감독 스윈던 타운 FC (1994~1998)
블랙풀 FC (2000~2004)
퍼스 글로리 FC (2005)
국가대표 17경기 0골 (잉글랜드 / 1988~1990)
1. 개요2. 경력
2.1. 선수 경력2.2. 감독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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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경력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2.1.1.1. 에버튼 FC
해일우드 출신인 맥마흔은 에버튼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굿디슨 파크에서 볼보이로 활동한 후 청소년 시절에 에버츤에서 뛰었다. 그는 1980년 8월 16일 로커 파크에서 열린 선덜랜드와의 경기에서 리그 데뷔를 했고, 1980-81 시즌이 끝날 때 팬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중원에서 그의 강력한 존재감은 그에게 클럽의 주장 자리를 안겨주었다. 4시즌 동안 100회의 리그 출전과 11골을 기록한 후, 맥마흔은 애스턴 빌라로 이적했다.
2.1.1.2. 아스톤 빌라 FC
1983년 5월 20일에 £175,000의 이적료로 아스톤 빌라에 합류해, 1983년 8월 27일에 열린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과의 경기에서 4–3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리그 데뷔를 했다. 맥마흔은 빌라 중원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았지만, 빌라는 그가 첫 시즌을 보낸 10위로 마무리했고, 그의 이전 팀인 에버튼은 7위로 시즌을 마쳤다. 다음 시즌인 1984/85 시즌에는 더 나빠져 빌라는 다시 10위에 머물렀고, 에버튼은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2.1.1.3. 리버풀 FC
맥마흔은 1985년 9월 12일 £350,000에 리버풀로 이적해, 새 감독 케니 달글리시의 첫 번째 영입 선수가 되었다. 9월 14일에 열린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 리그 데뷔를 했고, 일주일 후인 9월 21일에 그의 이전 팀인 에버튼을 상대로 첫 골을 기록해 리버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그 시즌 리버풀이 리그와 FA컵 더블을 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에버튼을 상대로 한 FA컵 결승전에서 제외되어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다음 시즌에는 리그컵 결승전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경기에 나섰으나, 리버풀이 2-1로 패했다. 맥마흔은 풀럼을 상대로 한 리그컵 경기에서 네 골을 넣으며, 리버풀의 10-0 승리에 기여했다. 다만 그 경기에서 페널티를 놓쳐 한 경기에서 다섯 골을 넣는 기록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는 다음 라운드 레스터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또다시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컵에서 총 9골, 리그에서 5골, 모든 대회를 합해 14골을 기록했다.

달글리시는 다음 시즌 존 반스, 피터 비어즐리, 존 올드리지, 레이 휴튼 등 새로운 선수를 영입했지만, 맥마흔은 계속 팀의 핵심 멤버로 남았다. 그의 터프한 경기 스타일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축구 실력은 최고 수준이었다. 1988년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획득할 때, 맥마흔은 중요한 골들을 기록했다.

FA컵 결승전에 도달한 리버풀은 앤필드 랩이라는 공식 곡을 발표했으며, 맥마흔과 존 올드리지 두 명의 스카우저는 이 곡에서 랩을 선보였다. 그러나 리버풀은 결승전에서 윔블던에 패했다.

그의 뛰어난 경기력은 비니 존스와의 맞대결에서도 드러났다. 존스는 맥마흔을 상대하는 것이 리버풀을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경기 초반에 맥마흔을 거칠게 태클했다. 맥마흔은 이 태클에서 일어나면서 존스의 눈을 팔꿈치로 가격해 상처를 남겼다. 리버풀은 경기에서 패했지만, 맥마흔은 PFA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동료 존 반스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88년 맥마흔은 잉글랜드 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다. 많은 언론과 팬들이 그를 대표팀에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ITV 해설자 브라이언 무어도 FA컵 결승곡에서 이를 언급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보비 롭슨은 1988년 2월 17일 이스라엘과의 친선 경기에서 그를 처음으로 출전시켰다. 맥마흔은 바넷, 비어즐리와 함께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1989년 리버풀은 다시 리그와 FA컵 더블을 노렸으나, 힐스버러 참사로 큰 충격을 받았다. FA컵 결승전에서 맥마흔은 올드리지의 첫 골을 어시스트해 팀의 3-2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리그 타이틀은 아스널에게 내주었다.

맥마흔은 1990년 리버풀이 다시 리그 타이틀을 획득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FA컵 준결승에서 크리스털 팰리스 FC에 패해 또다시 더블을 놓쳤다.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어 1990년 월드컵에 참가했다. 맥마흔은 개막전에서 아일랜드를 상대로 교체 출전했으나, 실수를 범해 동점골을 허용했다. 그는 이후 이집트전과 벨기에전에서 선발 출전했으나, 후반에 교체되었다. 맥마흔은 3위 결정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다시 출전했으며, 이후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한 경기에 더 출전했다.

1991년 그레이엄 수네스가 리버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맥마흔과 갈등을 빚었다. 수네스는 맥마흔을 포함한 몇몇 고참 선수들을 방출하기로 결정했고, 맥마흔은 1991/1992 시즌 15경기를 치른 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2.1.1.4. 맨체스터 시티 FC
맥마흔은 1991년 12월 24일 £900,000의 이적료로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해, 이틀 후 열린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는 시티에서 87번의 리그 경기에 출전했으며, 스윈던 타운의 선수 겸 감독 제안을 받고 맨체스터 시티를 떠났다.

2.1.2. 국가대표 경력

맥마흔은 1988년 2월 17일 이스라엘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그는 같은 해 서독에서 열린 유럽 선수권 대회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소련과의 최종 조별 경기에서 출전했지만 잉글랜드는 3-1로 패해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맥마흔은 1990년 월드컵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포함되었다. 첫 번째 조별 경기에서 아일랜드를 상대로 잉글랜드가 1-0으로 앞서고 있던 후반전에, 맥마흔은 잉글랜드 18야드 박스 가장자리에서 공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즉시 아일랜드의 케빈 시디가 공을 가로채 왼발 슛으로 잉글랜드 골키퍼 피터 실튼을 넘겼다. 맥마흔은 피터 비어즐리를 대신해 교체 투입된 직후였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그는 이집트와의 마지막 조별 경기와 벨기에와의 16강전에서 선발로 출전했지만, 잉글랜드의 8강과 준결승 경기에서는 모두 교체 선수로 대기했으나 출전하지 못했다.

맥마흔은 1990년 11월 14일 아일랜드와의 유로 92 예선 경기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으며,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2.2. 감독 경력

맥마흔이 1994년 11월 스윈던 타운에 합류했을 때, 그들은 프리미어 리그에서 강등된 직후였으며 또 다른 강등을 피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는 더비 카운티와의 리그컵 경기를 준비하던 중 팀에 합류했다. 임시 감독 앤디 롤랜드가 팀을 지휘하며 타운은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맥마흔은 다음 경기인 사우스엔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팀을 전적으로 지휘했고, 자신을 선발 명단에 포함시켰다. 타운은 2-0으로 패했고, 맥마흔은 퇴장당했다. 그의 첫 승리는 상위권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한 2-1 승리였다.

이적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주전 득점자인 얀 아게 퓌르토프트가 팀을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대부분의 소식통은 이적료를 300만 파운드에서 400만 파운드 사이로 추정했다. 결국 퓌르토프트는 130만 파운드에 팔렸고, 맥마흔은 다른 제안이 없었다고 말했다. 퓌르토프트가 떠난 후, 타운은 다음 8경기 중 6경기에서 득점에 실패하며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 맥마흔은 강등 후 "뱀의 배보다 더 낮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다음 시즌 타운은 디비전 2 챔피언십을 우승하며 반등했다. 맥마흔은 세 번의 이달의 감독상과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 시즌의 두 주요 득점자는 맥마흔이 영입한 웨인 앨리슨과 스티브 핀니였다. 타운이 겪은 유일한 문제는 상대의 완강한 수비를 뚫는 것이었다.

다음 두 시즌은 비슷한 패턴을 따랐다. 괜찮은 출발 후 나쁜 결과가 이어졌다. 1996-97 시즌 타운은 3월 중순까지 중위권을 유지했지만 마지막 10경기에서 단 두 골만 기록했다. 볼턴 원더러스에 7-0, 올덤 애슬레틱에 5-1, 입스위치 타운에 4-0으로 패하며 19위에 머물렀다.

1996년 8월, 앨런 볼이 맨체스터 시티 감독에서 떠난 후, 맥마흔이 메인 로드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스윈던 감독으로 5년 계약을 체결하며 이 소문을 일축했다.

다음 시즌의 몰락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1997년 10월 31일 포츠머스에서의 승리로 타운은 테이블 상단에 올랐다. 11월 중순까지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12월 중순까지 플레이오프 위치에 머물렀다. 이후 남은 24경기 중 3경기만 승리하고 12골만 기록했다. 맨체스터 시티에 6-0, 미들즈브러에 6-0, 노리치 시티에 5-0으로 대패했다.

1998-99 시즌이 시작되자 타운은 첫 5경기에서 승리 없이 단 세 골만 기록했다. 두 번의 연속적인 더비 승리, 브리스톨 시티와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맥마흔과 헌트의 위치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포츠머스에서 5-2로 패한 후, 왓퍼드가 카운티 그라운드에서 4-1로 승리하자 팬들은 경기 후 중앙 서클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맥마흔은 "상호 합의"로 클럽을 떠났다.

다음 목적지는 블랙풀이었다. 그는 2000년 1월 7일에 18개월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직책이 "훌륭한 기회"라고 말하며 "올해 우리를 안전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블랙풀은 5월에 디비전 3로 강등되었다. 다음 시즌 그는 플레이오프를 통해 승격시켰고, 3년 동안 두 번의 풋볼 리그 트로피를 획득했다. 2001년 2월 8일에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2002-03 시즌 종료까지 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2003-04 시즌 마지막 경기 직전, 자금 문제로 인해 클럽을 떠났다. 중간에 사임했지만 1월 15일에 사임 철회를 발표했다. 떠날 당시, 맥마흔은 블랙풀에서 축구 리그 경기에서 가장 오래 재임한 다섯 번째 감독이었다.

2005년 초, 그는 호주 A-리그의 첫 시즌을 준비하는 퍼스 글로리 FC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기는 짧았고, 2005년 12월 시즌 도중 클럽을 떠났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